
어릴적 기억을 떠올린다. 친구나 지인 혹은 가족과 순서를 정할 때, 혹은 의견이 엇갈릴 때 우리는 국민 게임으로 의사결정을 이뤄냈다. 이를테면 피자를 나눠먹다 딱 한 조각이 남았을 때 호기롭게 ‘가위 바위 보’를 외쳤다. 이 승부로 대망의 마지막 조각의 주인공을 가르곤 했다. 승리를 위해 상대방의 패턴을 분석하고, 때로는 손바닥 속 어둠을 바라보며 점을 치기도 했다. 누군가 확연히 늦게 내 게임이 성립하지 않는, 이른바 ‘각하’ 요건만 아니라면 우리는 탄식과 함께 패배를 수용했다. 괜히 국민게임이 아니다.
욕망이 있는 다수의 사람이 모여사는 사회가 유지되려면 서로의 합의된 약속과 질서가 있어야 한다. ‘가위 바위 보’도 좀 거창하게 말해서 유구한 전통의 합의된 질서이자 갈등조정 시스템이었다. 유치하게 ‘가위 바위 보’ 이야기를 꺼낸 건 오랜 기간 체화된 이 승복의 경험이 지금 이 타이밍에 너무나 절실해서다. 12·3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 그리고 헌법재판소의 변론을 거쳐 이제 최종선고만을 남겨두고 있다. 결론이 임박했다. 국가 최고 리더의 부재라는 대혼란의 마침표가 드디어 찍힌다. 끝은 새로운 시작과 같기에 긴장되는 마음으로 선고를 숨죽이며 기다린다.
그런데 많은 국민이 불안해한다.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끝이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지 않을 것 같아서다. 단순한 우려가 아니다. 불복을 기정사실화하는 모습이 곳곳에서 엿보인다. 헌재 재판관의 성향, 고위공직자수사처의 수사권, 윤석열 대통령의 구속 취소까지 논란이 더해지며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목소리가 하루하루 쌓여간다.
다시 ‘가위 바위 보’로 화제를 돌려본다. 당신의 아이가 게임에서 패한 뒤 승부에 불복하겠다 한다. 상대방 주먹 쥐임의 강도, 검지와 중지의 각도, 손바닥의 모양 등을 문제 삼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 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적어도 건전한 상식의 어른이라면 정정당당하게 패배를 수용하라 조언할 것 같다.
어떻게 ‘가위 바위 보’를 헌재의 판단과 동일선에 놓고 이야기하냐 반문할 것 같다. 비약이 심하다 비판할 게 눈에 선하다. 하지만 역으로 되묻는다. 이 게임은 철저하게 ‘우연’과 ‘운’으로 승부가 갈린다. 논리조차 없다. 스스로 ‘룰’에 동의한 적도 없다. 오직 전해져 내려온 게임의 약속만 있는데도 우리는 이견 없이 승복해왔다.
하물며 사법 시스템은 다르다. 사법부는 헌법과 법률에 의해 구성되고 이를 기반으로 운영된다. 이 헌법과 법률은 국회가 만든다. 그리고 국회는 국민의 뜻을 대신하는 헌법기관이다. 다수결에 의한 국민의 뜻으로 만들어진 게 사법부라는 말이다.
불복을 외치는 이들의 주장대로 이 시스템의 오류, 헌법과 법률의 미비점 등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 또한 우리 사회의 축적된 현주소다. ‘약속된 룰’과 그 ‘룰’의 ‘미비점’은 다른 차원이다. 정해진 ‘룰’을 따르되, 또 다른 합의를 통해 그 ‘룰’을 고쳐가면 된다. 이를 통해 역사는 진보해왔다. 이미 개헌의 목소리는 여야를 가리지 않고 거세지 않은가.
부디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그 결과가 나의 생각과 다르더라도 겸허하게 받아들였으면 한다. ‘가위 바위 보’에 승복했던 우리의 ‘쿨’함이 지금 너무나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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