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OC=정진영 기자] 그 어느 때보다 설레는 마음으로 가득한 추석 귀성길. 그러나 설렘도 잠시, 고향으로 향하는 첫 번째 관문인 고속도로 톨게이트는 그야말로 ‘헬게이트’입니다. 나아갈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답답한 처지가 기약 없이 계속되니 말입니다. 이쯤되면 고속도로 통행료를 지불하는 일이 몹시 억울해집니다. 지루하기 짝이 없는데 운전 중 DMB 시청은 불법이니 답은 역시 음악 뿐입니다.
기자는 올 초부터 매주 발매되는 앨범들 중 추천할 만 한 앨범들을 ‘정진영의 이주의 추천 앨범’이란 문패기사로 선정해왔습니다. 이번에 기자는 그동안 추천한 앨범들 중에서 운전의 지루함을 덜어줄만한 흥겨운 음악을 담은 앨범들을 따로 모아 소개할까 합니다. 조수석에 계신 분은 이 기사를 가이드로 삼아 1일 디제이(DJ) 역할을 해보시죠. 조수석에 계시는 분은 운전하시는 분에게 이 기사를 참고해 잘난 척하셔도 좋습니다. 기분과 상황에 맞춰 앨범을 선택해보시죠.
▶ 여행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두번째달 정규 2집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 하루에도 수많은 신곡들이 쏟아지는 정신없는 세상에 밴드 두번째달의 행보는 느긋하기만 합니다. 무려 10년 만에 새로운 정규 앨범을 발표하다니 말입니다. 10년 전 데뷔 앨범 ‘세컨드 문(2nd Moon)’으로 음악 판을 뒤집어 놓고 기약 없이 기다리게 만들더니, 잊어버린 지 한참 지나서야 멋쩍은 인사를 전하는군요.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
두번째달이 다양한 악기로 쏟아내는 이국적이면서도 친근한 선율의 매력은 설렘이었습니다. 두번째달의 데뷔 앨범은 매 트랙마다 음악으로 다른 세상을 펼쳐 놓았던 역작이었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도 국적을 짐작하기 어려운 이름 모를 어딘가를 여행하는 체험을 가능하게 만든 작품이었다고 표현한다면 과장일까요? 말 그대로 ‘월드뮤직’이었습니다.
세계 각국의 민속 음악을 친근한 방식으로 재해석해 연주하는 밴드라는 정체성은 여전합니다. 남인도 지역의 구음 장단이라는 ‘콘나콜’을 퓨전재즈 풍의 연주와 결합한 곡 ‘타키타타키타다디게나도’가 결코 낯설게 들리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달이 피었네’로 시작해 연속으로 이어지는 ‘가라앉는 섬’ ‘똑바로 걷기’ ‘달리는 비행기’는 두번째달 특유의 여정을 엿보는 듯한 두근거림을 선사합니다.
하지만 변화도 적지 않습니다. 이번 앨범의 알파와 오메가 트랙인 ‘구슬은 이미 던져 졌다’와 ‘그동안 뭐하고 지냈니’의 넘치는 흥은 과거 두번째달의 음악에선 접하기 어려웠던 부분이죠. 강산이 한 번 변해서야 다시 돌아온 두번째달은 여기에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도 품은 듯 슬그머니 음악에 우리 소리를 더했습니다. 그 결과물이 판소리 ‘춘향가’의 한 대목을 원형 그대로 차용해 소리꾼 이봉근과 협업한 곡 ‘사랑가’이죠.
▶ 어르신들과 함께 차에 있다면…강허달림 정규 3집 ‘비욘드 더 블루스(Beyond The Blues)’= 블루스(Blues)는 한 마디로 명확한 정의를 내리긴 어려운 장르이지만, 과거 미국 남부의 농장지대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들의 노동요에서 기원한 음악이란 사실 하나만큼은 분명하죠. 흑인 노예들의 피와 땀을 먹으며 탄생한 음악인만큼 블루스 보컬리스트들의 목소리에선 삶의 고단함이 묻어납니다. 싱어송라이터 강허달림이 ‘블루스 디바’로 통하는 이유 역시 그 절절하고도 깊은 목소리 때문이겠죠.
강허달림은 사실 블루스라는 장르의 테두리에 묶여있는 가수가 아닙니다. 그는 밴드 신촌블루스의 보컬 출신이긴 하지만 정규 1집 ‘기다림, 설레임’(2008), 2집 ‘넌 나의 바다’(2011)의 수록곡 중 사실 블루스라고 부를만한 곡은 많지 않거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주저 없이 강허달림을 ‘블루스 디바’로 부르는 이유는 블루스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그 독특한 목소리 때문일 겁니다.
리메이크 앨범은 매우 흔합니다. 그러나 김광석의 ‘다시 부르기’ 1ㆍ2와 조관우 정규 2집 ‘메모리(Memory)’ 정도를 제외하면 단순한 다시 부르기 차원을 넘어섰던 리메이크 앨범을 떠올리기 쉽지 않군요. ‘비욘드 더 블루스’는 선곡부터 남다릅니다. 이정선의 ‘외로운 사람들’, 신촌블루스의 ‘골목길’처럼 유명한 곡도 있지만 송창식 ‘이슬비’와 ‘밤눈’, 윤명훈의 ‘어떤 하루’, 숙자매의 ‘열아홉 살이에요’, 고(故) 채수영의 ‘이젠 한마디 해 볼까’, 최백호 ‘내 마음 갈 곳을 잃어’ 등 대부분의 수록곡들이 대중에게 낯선 편입니다. 특히 ‘기슭으로 가는 배’는 다소 난해한 포크 음악으로 유명한 김두수의 곡을 처음으로 리메이크한 사례여서 눈에 띕니다.
이번 앨범의 수록곡 중 블루스로 꼽을 수 있는 곡은 ‘외로운 사람들’ ‘이젠 한마디 해 볼까’ ‘어떤 하루’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곡들이 새로운 곡으로 들리고 또 블루스로 들립니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은 강허달림의 목소리이겠죠. 앨범을 모두 듣고 나면 ‘블루스를 넘어서’라는 의미를 가진 앨범의 타이틀을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흔한 리메이크를 흔치 않게 만드는 목소리의 힘이 돋보이는 앨범입니다.
▶ 졸음을 제대로 깨우며 웃고 싶다면…피해의식 정규 1집 ‘헤비메탈 이즈 백(Heavy Metal is Back)’= 짙은 화장과 긴 머리, 가죽바지와 호피무늬 의상, 강렬한 기타 리프와 유려한 멜로디. 2015년에 이런 ‘쌍팔년도 헤비메탈’을 다시 듣게 될 줄 누가 상상이나 했나요? 심지어 앨범 타이틀까지 당당하게 “헤비메탈이 돌아왔다!”입니다. 구시대의 유물이라고 생각했던 이런 음악이 세월을 돌고 돌아 신선하게 들리는 날이 올 줄 몰랐습니다.
피해의식이 단순히 화려했던 과거의 유산을 추억하고 재현했을 뿐이라면 이렇게 관심을 모으진 못했을 겁니다. 앨범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피해의식은 과거의 유산을 모두 비틀어 재현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우선 금발을 휘날리는 미남 보컬 대신 가발을 눌러 쓴 자유육식연맹 총재가 과장된 표정으로 프론트 맨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부터 파격입니다. 가사에서도 멋을 기대했다면 꽤 당황스러울 겁니다. “애 아빠가 나인지도 확실하지 않잖아”라며 당혹감을 드러내는 ‘속도위반’은 시작에 불과합니다. 제목부터 민망한 ‘사면발이’는 80년대 록발라드를 충실하게 재현한 사운드 위에 “아침 햇살에 깨어/난 습관적으로/그 곳에 손을 넣어/근데 이 가려움은 뭘까”라는 가사를 실어 실소를 자아냅니다. ‘러브 오브 식스티나인(Love Of Sixtynine)’에 대한 설명은… 그냥 생략하겠습니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시죠. ‘음란마귀’가 도와줄 겁니다. 특히 ‘걸 그룹(Girl Group)’을 감상하실 땐 반드시 이어폰을 지참하시고요. 배경에 깔린 키보드 연주를 듣고 ‘야동’으로 오해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해의식의 시도는 꽤 멋있어 보입니다. 이 멋은 피해의식이 역으로 멋있는 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가능했다면 무리한 의견일까요?
▶ 이 참에 식구들에게 ‘힙’한 척 해보고 싶다면…혁오(hyukoh) 미니앨범 ‘22’= 단언컨대 한국에서 데뷔 후 이렇게 빠른 시간 안에 전 방위로 주목을 받은 밴드는 없었습니다. 밴드 혁오는 지난해 9월 미니앨범 ‘20’으로 데뷔해 아직 데뷔 만 1년차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오는 아이유를 비롯해 장기하, 타블로, 빈지노 등 선배 뮤지션들이 팬을 자처하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앞 다퉈 혁오의 새 앨범 인증 사진 및 추천 글을 남길만큼 ‘핫(Hot)’한 존재로 떠올랐습니다. 특히 최근 혁오의 리더 오혁이 프라이머리와 함께 작업한 이후, 혁오는 힙스터(자신들만의 고유한 패션과 음악 문화를 좇는 부류)들의 아이콘을 넘어 대중적인 관심을 받게 됐죠.
혁오의 음악은 특정 장르로 정의내릴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장르를 ‘혁오’라고 정의해도 조금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말이죠.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확실합니다. 바로 세련미가 넘친다는 점이죠. 음악적으로 이번 앨범은 전작의 연장선상에 놓여있고, 큰 변화는 없습니다. 다만 혁오는 데뷔 앨범의 다소 거칠게 느껴졌던 음악적 질감이 아쉬웠는지, 이번 앨범에는 작정하고 잘 빠진 사운드를 담아냈습니다. 안정된 소속사를 찾았다는 것도 한 몫을 했겠죠. 매력적인 톤을 가진 오혁의 목소리도 여전합니다. 전작과 마찬가지로 오혁은 1993년생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능적이면서도 깊은 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이번 앨범에는 익숙해지면 떠나가 버리는 사람들과 그 관계들에 대해 노래한 타이틀곡 ‘와리가리’를 비롯해 ‘세틀드 다운(Settled Down)’ ‘큰새’ ‘메르(Mer)’, ‘후카(Hooka)’, ‘공드리’ 등 6곡이 담겨 있습니다. 비록 타이틀곡은 ‘와리가리’이지만 나머지 곡들 역시 타이틀곡 못지않은 저마다의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세틀드 다운’과 ‘큰새’는 앨범보다 라이브를 더욱 기대하게 만드는 역동성을 품은 곡입니다. ‘후카’는 감각적인 뮤직비디오 영상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프라이머리ㆍ오혁의 협업 앨범 ‘럭키 유(Lucky You)’의 수록곡으로 김예림이 함께 했던 ‘공드리’는 혁오만의 목소리로 재정리돼 원곡의 몽환적이면서도 나른한 분위기를 새로운 방향으로 연출합니다.
▶ 에너지 음료가 필요한 시간이라면…솔루션스 미니앨범 ‘노 프라블럼(No Problem!)’= 여름에 어울리는 청량한 음악을 듣고 싶으신가요?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처럼 자연스럽게 몸을 흔들 수 있는 흥겨운 록 음악을 원하시나요? 그렇다면 여기 해결책인 솔루션스(The Solutions)가 있습니다.
솔루션스는 록과 일렉트로닉을 절묘하게 결합한 세련미 넘치는 사운드로 각광을 받아왔습니다. 특히 흥겹고 유려한 멜로디와 리듬은 아이돌 그룹의 댄스 음악 이상으로 매력적이죠. 솔루션스의 공연장이 늘 여느 EDM 클럽 이상의 분위기를 연출하는 이유입니다. 그랬던 솔루션스가 최근 매우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멤버 나루와 박솔의 듀오였던 솔루션스는 3년 동안 공연장에서 세션 연주자로 함께 해 온 권오경(베이스), 박한솔(드럼)을 정식 멤버로 받아들여 밴드로 거듭났습니다.
전작인 정규 2집 ‘무브먼츠(Movements)’에서 과감하게 전자음을 활용했던 솔루션스는 이번 앨범에선 밴드로 재편된 라인업을 강조하려는 듯 강렬하면서도 공간감 넘치는 밴드 사운드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앨범 발매에 앞서 싱글로 선공개된 수록곡 ‘스테이지(Stage)’는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죠.
솔루션스는 이번 앨범의 녹음을 미국 마이애미에서 진행했습니다. 세계적인 프로듀서 지미 더글러스(Jimmy Douglass)가 프로듀서를 맡아 솔루션스의 작업을 도왔죠. 멤버들이 마이애미에서 맞았을 햇살의 청량감이 앨범 전체에서 느껴집니다. 다소 정교하다는 인상을 줬던 편곡과 연주에서도 자유로움이 느껴집니다. SF 영화를 연상케 했던 전작의 앨범 커버와 비교되는 이번 앨범의 자유분방한 커버처럼 말이죠.
재치 있는 밝은 일렉트로닉 사운드로 앨범의 문을 여는 ‘노 프라블럼’을 지나면 타이틀곡 ‘러브 유 디어(Love You Dear)’의 단 번에 귀에 들어오는 강렬한 리프(반복악절) 연주와 멜로디가 귀를 자극합니다. 전작의 수록곡 ‘세일러스 송(Sailor’s Song)’을 연상케하는 진취적인 가사와 직선적인 사운드가 인상적인 ‘싱 앤드 플로(Sing and Flow)’과 몽환적인 리듬 연주에 실린 서정적인 멜로디가 돋보이는 ‘러브(L.O.V.E)’도 쉽게 지나칠 수 없는 곡들이죠. 더글러스와 함께 작업한 ‘러브 유 디어’ 마이애미 버전의 여유로운 느낌을 주는 사운드도 들을 거리입니다.
▶ 막혔던 길이 뚫려 풍경이 보인다면…세이수미(Say Sue Me) 미니앨범 ‘빅 서머 나잇(Big Summer Night)’= 모든 것이 서울로 집중되는 대한민국에서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뮤지션들의 존재감은 작기만 한 것이 현실입니다. 한때 부산과 인천이 헤비메탈의 메카로 통했고, 청주가 하드코어 신으로 이름을 날렸지만 이제 과거의 영광이니 말입니다.
‘인서울’이 지상목표가 돼 버려 너도나도 서울로 올라오는 세상이지만, 반대의 움직임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제주는 이미 뮤지션들을 비롯해 많은 아티스트들이 둥지를 튼 곳입니다. 사우스카니발과 젠 얼론처럼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린 제주 출신 뮤지션들도 등장했죠. 이효리의 앨범 작업에 참여해 눈길을 끌었던 김태춘과 밴드 지니어스로 미국과 일본 등지에서 해외투어를 벌이기도 했던 김일두는 부산 출신 뮤지션으로 부산과 서울을 오가며 활동 중입니다. 부산을 거점으로 활동 중인 세이수미는 최근 들어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뮤지션들 중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밴드 중 하나입니다.
세이수미는 지난 2012년 결성돼 지난해 10월 첫 정규 앨범 ‘위브 소버드 업(We’ve Sobered Up)’을 발표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세이수미의 데뷔 앨범은 서프록(196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주를 중심으로 유행한 음악으로 비치 보이스(The Beach Boys)가 대표 뮤지션)을 표방했지만, 한창 단풍이 무르익어 가는 가을에 서프록은 철 지난 옷이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이수미는 국내에선 흔치 않은 음악으로 음악 마니아들 사이에선 꽤 입소문을 탔습니다.
지난해의 실수(?)를 만회하려는 듯 세이수미는 작심하고 여름 휴가철에 맞춰 새 앨범을 발표하는 승부수를 띄웠습니다. 긴장감을 주며 질주하는 앨범의 첫 곡 ‘파이트 더 샤크(Fight the Shark)’는 세이수미의 ‘여름밴드’ 선언문입니다. ‘배드 해빗(Bad Habit)’의 몽환적인 연주를 따라 부유하는 나른한 목소리와 ‘마이 프라블럼(My Problem)’의 간결하면서도 경쾌한 사운드는 바닷가와 맥주 생각이 절로 날 정도로 매력적입니다. 초저녁 바닷바람처럼 귓가를 부드럽게 스쳐 지나가는 ‘서머 나잇(Summer Night)’은 어떻고요. 적어도 이 앨범 앞에서 “여름엔 EDM이 최고”란 말은 하기 어려울 겁니다. 이 앨범은 정말 휴가 같은 음악이니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