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9>인정사정 볼 것 없다 (34)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현실과 낭만이 복잡하게 뒤섞인 상태에서의 상열지사를 무엇에 비유해야 옳을까? 현실이 처연한 것이라면 낭만은 환상일 것이다. 들끓는 환상 속에 처연함이 생생히 드러나는 싸움, 과연 투우와 다름없지 않을까?
오페라 ‘카르멘’을 관람하노라면 ‘투우사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장면에서는 모든 관객이 환상의 극치 속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뿔을 세우고 돌진해 들어오는 성난 수소, 긴장한 모습으로 창을 겨누는 투우사 ‘돈 호세’… 그 배경에 울려 퍼지는 ‘카르멘 환상곡’의 리듬을 느끼는 순간, 그 누구라도 낭만 속으로 빨려들고야 말더라는 것이다.
비브라토 주법이 돋보이는 현란한 바이올린의 음률, 금빛 투우사 제복에 빨간 망토를 휘날리는 화려함의 극치, 그런 장면을 보면서… 귀로는 엄청난 난이도를 지닌 환상곡을 듣다보면 관객들은 그만 넋을 잃게 마련인 것이다.
“오빠, 오빠, 오빠…”
유리는 아직 스커트를 벗지도 않은 상태에서 두 팔로 백광돌의 어깨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열병을 치르는 그녀의 상태로는 이미 현실과 환상을 구분할 수 없었다. 그녀가 뿜어내는 거친 호흡은 함성 가득한 투우장에서 외롭게 날뛰는 투우의 숨소리와 다를 바 없었다.
“천천히, 유리야… 천천히!”
그녀의 달뜬 모습에 비하면 백광돌은 침착했다. 하자는 것인지 말자는 것인지 모를 정도로 느릿느릿, 하지만 부드럽게 그녀를 다루는 그의 손길에는 사랑이 듬뿍 담겨있었다. 그러나 이미 성난 소가 되어버린 그녀의 목덜미에 창을 꽂아야만 했으니… 이왕이면 한 번을 품에 안더라도 화려하게, 상열지사를 한 번 벌이더라도 비브라토 주법의 기교를 섞어가며 환상적으로 치르고 싶었던 것이다.
“미안해 할 것 없어요, 오빠. 나를… 함부로 좀 다뤄 봐요.”
“숨이 막혀서 감당하기 어려워.”
“아무 생각 말고, 느낌대로… 운명이니까요.”
이 말을 끝으로 유리는 눈을 감았다. 어쨌거나 유리는 성난 소가 되어 그에게 돌진해 들어갔다. 오히려 ‘으’, ‘억’ 등등의 외마디 소리를 내뱉는 쪽은 백광돌이었다. 외마디 소리였지만 오랫동안 참았다가 발산하는 열광의 환호성이나 다름없었다. 그의 까칠한 턱수염이 젖가슴에 닿을 때마다 유리의 몸이 활처럼 휘었고, 그럴 때마다 높은 옥타브로 흘러나오는 그녀의 교성에 그도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이것 좀… 벗어요.”
여태껏 투우사 돈 호세의 빨간 망토처럼 등 뒤에 늘어져 있던 와이셔츠를 그녀가 애써 벗겨내고 있었다. 이제 어디론가 자리를 옮겨 몸을 뉘어야 할 것이다. 그토록 간절히 열망하던 상대를 품에 안았으니 이대로 어정쩡하게 서서 사랑을 나눌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는 와이셔츠를 벗어던지고 그녀를 소파로 이끌었다. 평소 운동으로 단련된 그의 갈색 몸은 매우 단단해 보였다. 어깃어깃 게처럼 옆걸음질을 치면서도 그녀의 가슴은 격정으로 들끓었다. 걸음을 옮기면서 제 손으로 스커트를 벗어내고, 제 스스로 스타킹을 말아 내리며 그녀는 긴장을 풀었다.
어느덧 소파 위에 몸을 겹친 그들의 몸은 천천히, 그러나 탄력 있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백광돌이 세련되게 이끄는 탓일까? 여태껏 외마디로 들려오던 교성이 점차 감미로운 여운을 남기며 흐느끼듯 길어지기 시작했다.
“으으으~”
옷을 훌훌 벗어던진 상태였으므로, 백광돌은 어린애의 심성으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목을 타고 흘러 에스라인으로 이어지는 그녀의 옆태는 숨을 멎게 할 정도였다. 아련히 피어나는 향기, 우윳빛 젖가슴… 아, 눈길을 아래로 내리니 어느새 극락으로 통하는 문이 눈앞에 열려있었다. 이 상황에 더 이상 무엇을 바란단 말인가.
둘이 환상을 헤매는 그 순간, 그러나 현실은 어김없이 눈앞으로 다가왔다. 신희영과 강준호가 어느새 숙소 현관을 들어서고 있던 것이다. 짧았던 데이트를 못내 아쉬워하면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