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8>인정사정 볼 것 없다 (33)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이제부터 뜨거운 애무를 시작해야 할 것이라고, 그러지 않고는 뜨거운 몸을 가눌 수 없어서 지레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백광돌은 적극적으로 그녀를 만질 수 없었다. 아니, 만지기가 어려웠다. 그는 느닷없이 겁쟁이가 되어 벌벌 떨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이렇게 변죽만 울릴 줄 알았더라면 애초부터 그녀가 티셔츠를 말아 올리지 못하도록 할 것을… 풍만하고 어여쁜 원추형 젖가슴이 눈앞에 드러나도록 내버려두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그는 이런 생각을 하며 냉정해지기 위해 무진 애를 썼지만 웬걸, 그녀를 품은 두 팔에 자신도 모르게 힘이 들어가더라는 사실이 놀라울 뿐이었다.
“우리 사랑하는 거 맞지요?”
진작부터 무아지경에 빠져든 유리의 눈매는 고혹적이었다. 오랫동안 별러온 일이었다는 듯 결의가 담긴 눈빛을 내비치다가도 운명을 받아들이는 체념의 눈빛을 띄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은 잠시일 뿐, 그녀의 눈빛은 또다시 이글이글 타오르며 진한 갈망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여자가 옷을 벗은 채 젖가슴을 내보였다고 해서 오로지 남자의 뼈마디가 녹아드는 것은 아닐 터, 팔색조처럼 시시각각 변해가는 그녀의 고혹적인 눈빛에 백광돌의 뼈마디가 노골노골해지던 중이었다.
“우리가 만난 건 운명예요. 그렇지요?”
“그렇긴 하다만, 유리야!”
“스톱, 더 이상 말하지 말아요. 우리 만남이 운명이라는 사실만 인정하면 되는 거예요.”
“운명이긴 하지만…”
“그만! 그만 하라니까요?”
“하지만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유리야.”
말 그대로 백광돌은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고 있었다. 유리가 제아무리 절세미인이라 해도 그녀는 절친한 선배의 딸이었다. 뿐만 아니라 어려서부터 그녀의 골프매니저로 일해 왔던 터라 거의 식구와도 다름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이미 티셔츠를 둘둘 말아 올려 알몸을 드러낸 상태이기 때문일까? 그녀는 백광돌의 가슴을 밀쳐 주먹이 들어갈 틈을 만든 후에 스스럼없이 그의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내기 시작했다.
“사랑은 낭만적인 거예요, 오빠.”
“현실을 똑바로 봐야한대도 그러네…”
1967년, 그 유명한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 일본의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는 낭만이란 곧 어린애 장난과 같은 속임수라고 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낭만적인 세계란 현실에 존재할 수 없다고도 했다. 그런 줄을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 도망치기 위한 소도구로 사용하고, 어쩌면 존재할지도 모른다며 믿고 기대한다고도 했다.
어쩌면 백광돌이나 강유리, 두 사람 모두 현실을 똑바로 인식하는 중인지도 몰랐다. 다만 백광돌이 현실에 처한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일 뿐이었다면, 강유리는 잘 알면서도 현실에서 멀리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이랬거나 저랬거나… 둘의 공통된 생각은 드디어 슬픈 사랑에 빠져들고야 말았다는 것, 그러니 앞으로 둘이 헤쳐가야 할 길은 가시밭길이 될 지도 모른다는 예감이었다.
“불나방이 죽을 줄 뻔히 알면서도 어째서 불 속으로 훨훨 날아드는지… 이제야 알 것 같구나, 유리야.”
백광돌이 와이셔츠의 나머지 단추를 풀어내며 중얼거렸다. 불가사의한 매력의 소유자가 슬픈 눈망울로 자기를 올려보고 있음을 그는 참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녀는 이미 토플리스 차림이 되어 병든 짐승처럼 앓는 소리를 내고 있지 않은가. 에라, 모르겠다. 사랑은 결코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 것이라고도 했으니…
불과 5분이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신희영과 강준호가 다다랐음을 알 턱이 없는 그는 기꺼이 투우사가 되기로 결심했다. 어느새 성난 암소가 되어, 거친 숨을 토하며 뿔을 세우고 돌진해 들어오는 그녀를 가급적이면 조심스레 달래다가, 목덜미를 겨누어 일시에 창을 꽂아 제물로 받아들이고 싶었던 것이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