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5>인정사정 볼 것 없다 (30) 글 채희문 / 그림 유현숙 하와이 원정 골프훈련… 이 얼마나 흥분되고 가슴 뛰는 말인가. 하지만 남녀가 골고루 섞여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관광여행이건, 학술여행이건, 묻지마관광이건 간에 남녀가 골고루 섞여있기만 하면 사달이 난다는 것쯤은 이미 만천하에 공인 된 일이기도 할 것이다.
처음 여행을 떠날 때엔 소 닭 보듯 하던 사람들이, 대략 사흘쯤 지나면 무리로 갈라지다가 닷새쯤 되면 노골적으로 짝이 정해지더라는 말이다. 무슨 여행에서건 함께 떠난 남녀의 숫자가 비등하면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되는 것이다.
“왕회장님은 강 프로님과 외출하시고, 한승우 실장은 한솜이가 꿰어 찼고… 도대체 난 뭐예요? 개밥에 도토리 신세지 뭐야?”
강유리는 매니저 백광돌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푸념했다. 물론 박 대리와 공 과장이 함께 따라오긴 했지만, 강유리의 생각에 그들과는 군번 차이가 나도 한참이나 날 것이라고 여겨졌기에 아예 논 외로 치부할 따름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개밥이란 소린가?”
백광돌 역시 유리의 두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대답했다. 둘이 서로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있다는 것은… 아뿔싸! 어느새 둘이 가슴을 마주한 채 살짝 끌어안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며칠 전 미국 내에서 제일 어려운 골프장이라는 코올라우CC 16번 홀에서처럼 그들 사이에는 요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코올라우 16번 홀에서… 네 눈을 들여다봤지. 그날, 코스 위에 펼쳐진 잿빛 하늘과 구름이 네 눈동자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어.”
백광돌이 침을 꼴깍 삼키며 연극대사 읊듯이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이를테면 그는 유리를 안아보고 싶다는 뜻을 비친 셈이었다. 하지만 그건 마음속에 품고 있는 뜻에 불과했다. 백광돌은 엄연히 유리의 매니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직업윤리 때문에? 물론 아니었다. 매니저와 선수 간에 사랑의 결실을 맺은 경우는 오히려 흔했다. 날마다 함께 다니고, 함께 훈련하다보면 없던 정도 생겨날 판이니 서로 간에 상열지사를 벌이기도 쉬울 터였다. 그러나 백광돌은 유리의 아버지, 강준호가 가장 아끼는 후배였는데… 바로 그 점이 백광돌에게는 큰 걸림돌인 셈이었다.
“그래요? 내 눈이 예뻤어요?”
“예뻤지.”
“거짓말 말아요. 이번 전지훈련에 따라온 목적을 누구보다도 매니저님이 잘 알잖아요. 목적이 매우 불손하지요. 일종의 사기극을 연출하는 거니까. 말하자면 나는 사기극의 주인공인 셈이에요. 그런 사람의 눈이 예쁘다고요?”
반성이라고 해야 하나? 혹은 자아성찰? 언젠가부터 강유리는 자신이 행해온 일과 앞으로 해야 할 일을 떠올리며 고민하는 경우가 잦아지고 있었다. 창창한 나이에 어여쁘고 늘씬한 몸매를 지닌 처녀가 뭐가 어째? 옷 벗기 게임이나 하고, 남 등치는 여행이나 따라다니는 중이라고? 이런 생각을 하노라면 문득 슬퍼지곤 했다는 말이다.
“아버지를 위하는 길이라고 여기면 안 될까? 그것도 당분간…”
“처음엔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런데 하루하루 이런 나날이 길어지면서…”
유리는 차마 말을 잇지 못하고 백광돌의 품속으로 안기고야 말았다. 백광돌은 가슴이 저릿해져 오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 얼마나 품에 안아보고 싶었던가? 물론 지난여름, 베트남 내해에 머물던 크루즈선에서 그녀를 품에 안고 젖꼭지를 비틀었던 적도 있었지. 혹은 백사장에서 잠시 함께 뒹굴어본 적도 있었고… 그러나 그 당시엔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옷 벗기 내기골프에서 결코 지지 않아야 한다는 절치절명의 순간에서 생존을 위해 벌인 접촉이었다고 변명해야만 할까?
“내 몸속에 원래 사악한 피가 흐른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신희영 회장의 재산을 가로채기 위해 이런 짓을 하는 것이 너무 즐겁고 짜릿하다고요.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고고하게 순결을 지키고 있다는 게 웃기지 않아요? 이젠 내 맘대로 연애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똑바로 올려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뜨겁다는 걸 알아차리기란 결코 어렵지 않았다. 이걸 어째야 하나… 백광돌의 머릿속이 혼란해져오기 시작했다.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