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여심(女心) 저격수가 됐다. 시청자들은 드라마 캐릭터가 아닌 이서진을 봤다. ‘꽃보다 할배’, ‘삼시세끼’를 통해 보여줬던 불만 가득한 투덜이. 좋은 척은 죽어도 못 하는 까칠한 남자가 한 여자에 빠지니 ‘밀당’ 없는 순정파가 됐다.

“닮아보였나요? (웃음) ‘삼시세끼’에서 본래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잖아요. 그 연장선으로 가자는 생각이었어요. 이미 예능으로 제 모습을 다 알고 있는데, 너무 다른 사람처럼 보이면 이상하지 않을까 싶었어요. 덕분에 시작이 부담없었죠.”

MBC 주말드라마 ‘결혼계약’을 무사히 마친 배우 이서진(45)을 최근 서울 여의도에서 만났다. 이서진은 드라마 한 편으로 배우로서 입지를 다졌고, 마성의 중년남으로 또 한 번 거듭났다. 40대 중반, 가장 바쁜 시기를 보내고 있는 요즘이다.

재벌2세와 신데렐라, 심지어 시한부를 사는 여자는 아이까지 있는 싱글맘이다. 까칠하고 자기밖에 몰랐던 재벌2세는 “도무지 좋아할 리가 없는 여자”를 만나 진부한 신파 한 편을 찍었다. “어찌 보면 새로운 내용이 아니죠. 70년대 ‘러브스토리’와 비슷하잖아요. 정말 대한민국 드라마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영화예요. (웃음)”

뻔한 멜로에 시청자는 답도 없이 빠졌다. 20%대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사실 처음엔 안 하겠다고 했어요.” ‘격정 멜로’는 해보고 싶었다지만, ‘결혼계약’이 처음부터 이서진의 마음을 끌었던 것은 아니다.

“엄청 착한 캐릭터였어요. 이런 애는 누가 봐도 애틋하게 사랑할 것 같잖아요. 처음엔 아니었던 사람이 변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싶었죠. 착한 사람이 갑자기 나쁘게 변하진 않거든요.”

대본을 집필한 정유경 작가에게 조심스럽게 의견을 비쳤다. 캐릭터의 수정이 가능한가에 대한 부분이었다. “성격도 안 좋고, 버릇없어 보이지만, 엄마밖에 모르는, 세상과 벽을 쌓고 사는 사람이라면 좋겠다 싶었어요.” 이서진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맞춤형 캐릭터가 태어났다. “3일 만엔 고치신 대본을 보내주셨어요. 거기에 너무 감동해서 앞으로 한 마디도 안 할테니, 같이 하자고 했죠.”

급히 편성된 ‘땜빵용’ 드라마는 뻔한 멜로극이라는 지레짐작을 딛고 보기 좋게 장타를 쳤다. 17세의 나이차를 극복한 남녀주인공의 호흡도 압권이었다. 드라마 종영 이후 여주인공 유이와 배우 이상윤이 열애설을 인정하자, 기사엔 ‘이서진, 의문의 1패’라는 댓글까지 달렸다. “하하. 좋은 얘기네요.” 이 드라마 한 편에서 보여준 이서진의 감정 연기에 수많은 시청자가 이끌렸다는 이야기다. “워낙에 연출이 뛰어났어요. 비슷한 스토리도 전혀 새로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죠.” 이서진은 단번에 ‘멜로킹’의 자리를 꿰찼다.

“제가 특별히 멜로를 잘 한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결혼계약’ 같은 경우엔 나도 어릴 때 이런 사랑을 해본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런 기억이 떠오르더라고요. 모든 걸 다 버리고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 감정, 오래 잊고 살았던 감정을 연기를 하면서 떠올렸죠.”

1999년 ‘파도 위의 집’으로 데뷔한 이후 수많은 작품을 거쳤다. 사극과 현대극을 아울렀고, 이미 20~30대 시절 멜로드라마 주인공 자리를 섭렵했다. “30대엔 제가 어떻게 연기를 했는지 기억이 안 나요. 열정은 어릴 때 훨씬 깊을지 몰라도 감정은 나이가 들면서 이해하는 폭이 넓어진 것 같아요. 그 시절의 열정을 겪고난 뒤, 감정이 깊어진 나이대죠. 제가 아니라 40~ 50대 다른 배우였더라도 그럴 거예요.”

다만 이서진의 전략이 통했다. 자신의 본래 모습이었던 ‘삼시세끼’의 연장에서 한지훈을 찾아가자는 것. “제 연기관은 메소드보다는 어떤 역할을 제 안에서 끌어내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해요. 내 안에서 만들어가고 나오는 것이 맞지 않나 싶어요. 어릴 땐메소드 연기가 많았지만, 시대가 바뀌면 연기도 바뀌는 거죠.”

드라마 한 편으로 다시 배우로서의 입지를 착실히 다진 이서진은 다시 예능(KBS2 ‘어서옵쇼’)으로 돌아갔다. “최근 3년처럼 바쁜 날도 없다”고 한다.

“30대엔 일을 하면서 예민할 때가 많았어요. 특별히 뭘 하고 싶어하는 성격은 아닌데…(웃음) 지금은 그냥 재밌게 하는게 좋더라고요. 광고를 찍더라도 안 해본 콘티라면 좋겠고요. 되레 내려놓으니 일도 잘 되는 것 같고요. 제 나이에 이렇게 많은 일을 하는 것도 고맙고 좋은 일이죠.”

다시 찾은 전성기다. 배우로서도, “예능은 잘 모른다”지만 예능인으로도 찾는 데가 많다. 나영석표 예능을 통해 익히 봐왔듯 “싫은 걸 하면 있는 그대로 티가 나는” 솔직함이 예능인으로의 강점이다. “뭘 어떻게 해야할지 몰라 고민”이라던 ‘어서옵쇼’는 6%대의 시청률로 순항했다. 스타들의 재능을 판매하는 홈쇼핑 형식의 프로그램이다. “제 재능이요? 전 팔 게 없어요.” 이상한 매력의 까칠남이 지금 안방을 종횡무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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