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그 시절 우리의 심장을 뛰게 했던 그리운 목소리가 돌아왔다.
“스컬리, 나예요.”(이규화), “멀더, 어디에요?”(서혜정)
불가사의한 현상에 집착해 외계인만 출몰하면 연락이 두절된 채 사라지는 멀더. 그를 감시하는 것이 임무인 스컬리는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럴 즈음 스컬리의 모토로라 휴대폰으로 멀더의 전화가 걸려왔다. “멀더, 난 믿을 수가 없어요.”(서혜정) 스컬리가 매회 들려준 대사다.
14년 만에 다시 만난 멀더와 스컬리의 음색이 여전하다.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늙지 않는 부분이 성대잖아요.”(서혜정)
‘X파일’은 더빙 외화 사상 다시 없을 인기를 모은 원조 ‘미드’(미국드라마) 열풍의 주역이다. 다시 돌아온 우리만의 멀더와 스컬리, 성우 이규화와 서혜정을 최근 서울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세월이 흘러 다시 연기하는 ‘X파일’이지만 “마치 엊그제 만났던 것처럼 익숙했고”, “호흡을 맞추는 데에도 어색함이 없었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도 흘렀다. 1994년부터 2002년까지 총 9개 시즌을 방송한 FBI 요원 멀더와 스컬리의 이야기는 국내에서 큰 사랑을 받았다. 20세기 음모론의 백과사전 격이었던 드라마로 인해 ‘엑스파일’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PC통신을 통해 팬덤이 형성됐다. 이젠 30~40 세대가 된 ‘X파일’ 팬을 당시엔 ‘엑스필(x-philes)‘이라고 불렀다. 성우 서혜정은 “아직도 연락하는 그 시절 ‘엑스필’이 시즌10의 제작 사실을 알려줬다”고 말했다.
캐치온은 지난달 29일 현지와의 시차를 3일로 줄이며 ‘X파일’ 시즌10을 국내에서 독점 방송했다. 채널이 생긴 이례 최초로 원어가 아닌 더빙판 외화를 선택했다.
더빙 외화 ‘품귀’ 시대에 성우의 목소리를 입힌 미드가 등장했다는 것만으로도 놀라운 일이다. “다 꺼져가는 촛불을 살린 거죠.” (이규화) 그 시절 멀더와 스컬리의 목소리를 그리워한 세대들의 향수가 두 사람을 다시 불러낸 셈이다.
‘X파일’은 이 둘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는 독특한 외화였다. 어쩌면 그 시절을 공유했던 이들에겐 ‘X파일’ 실제 배우들의 목소리는 생소하고 낯선 것,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처음부터 더빙판만 보고 자란 분들은 ‘X파일’을 원어로 보면 어색해 하더라고요.”(이규화)
“그래서 한국에서 개봉한 영화가 잘 안 됐잖아. 더빙을 안 해서.(웃음)”(서혜정)
사실 ‘X파일’은 한국 정서와는 맞지 않는 드라마였다. “그 당시에 외계인 이야기를 했으니까.”(서혜정) “남녀 주인공도 처음 소개되는 배우였고.”(이규화)
캐스팅 제안을 먼저 받은 건 이규화였다. “전화가 와서 갔지. 일단 만나서 그림을 봤어. 할 수 있냐고 물어보는데, 보나마나 하는 거지. 신인인데 뭐든 해야지. 게다가 주인공인데.”(이규화)
멀더의 탄생은 속전속결이었다. 스컬리는 성우 이규화의 추천으로 동기였던 서혜정이 낙점됐다. “아마 당시 PD가 멀더를 캐스팅했을 때, 이규화씨를 제일 먼저 떠올렸을 거야. 멀더라는 캐릭터의 성격, 이미지가 이규화씨와 똑같아요. 더빙을 할 때도 이규화씨랑 대화하고 있는 것 같다니까. 이 사람이 아니라면 멀더를 할 사람이 없어요.”(서혜정) “내가 멀더처럼 좀 어벙해.(웃음)”(이규화)
이규화는 그래서인지 시간을 훌쩍 건너뛰어 다시 만난 ‘멀더’를 연기하는 것도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무슨 고민을 해. 그냥 했지.”
멀더와의 첫 만남부터 그랬다. 시청자가 기억하는 외화 속 성우들의 목소리엔 과장이 많다. 남자배우의 경우 웅장하고, 중후한 음성이 주를 이뤘다. 목소리로 등장인물을 입체화하길 원했던 시대가 있었기에, 성우의 ‘목소리 연기’는 더 극적이었다. “일반인이 접할 땐 이질감을 느낄 수 있죠.” (서혜정)
이규화가 연기한 멀더의 목소리엔 꾸밈이 없다. 이규화가 곧 ’멀더‘였기에, “굳이 목소리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었다”고 한다. “멀더의 스타일이 조미료를 치지 않은 음식과 같아. 가감없이 순수함 그대로의 말투야. 어떤 사람들은 자다 깬 말투 같다고도 하고. 목소리를 일부러 가다듬을 필요도 없어.”(이규화)
두 사람은 “말과 목소리에도 트렌드가 있다”고 했다. 과거 같았다면 자연스럽기 그지 없는 이규화의 목소리와 말투는 ‘성우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20~25년 전엔 잔뜩 꾸며진, 예쁘고 멋진 목소리를 선호했는데 점차 성우 같지 않은 말투와 목소리를 찾기 시작한 거야.”(이규화)
성우에게 ‘성우같지 않은 말투’를 요구하는 시대가 오고 있었다. “근데 이것처럼 어려운게 어딨겠어. 30년 넘게 성우를 했는데 아마추어 같이 하라니.”(이규화) 하지만 이규화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목소리였다. 자연스러운 목소리. 업계에선 ‘멀더 스타일’로 통칭되곤 했다.
서혜정은 ‘X파일’ 더빙판이 유독 인기를 모으는 이유도 “이규화의 자연스러운 목소리에 있었다”고 말했다. “그 시절 사람들이 원하는 트렌드가 꾸미지 않은 목소리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성우같지 않은 목소리 연기가 “시대가 원하는 성우”였던 셈이다. 두 사람은 때문에 후배 성우들에게도 “말투와 목소리를 바꿔가며 트렌드를 따라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멀더 곁의 스컬리를 연기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스컬리도 똑같이 멀더처럼 할 순 없었어요. 시즌1, 시즌2 땐 그래서 갖은 애를 다 썼죠. 어떤 분들은 성우가 바꼈다는 말씀도 하세요. 이규화씨 연기가 워낙에 독특했기에 조화를 이뤄내기가 쉽지 않았죠. 세 번째 시즌이 돼서야 맞춰진 거예요.”(서혜정)
14년을 건너 뛰어 다시 만난 스컬리를 연기할 때도 고민한 부분이 있었다.
서혜정은 “스컬리는 굉장히 원숙하고 세련된, 깊이 있는 배우로 성장했다. 이 목소리를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했다”고 한다. “배우는 성장했는데 목소리가 따라주지 않으면 더빙은 엉망이 돼요. 그가 성장한 만큼 나도 성장해야 하는 거죠. 질리언 앤더슨이라는 배우의 인간적인 성장에 목소리의 변화를 줄까 고민했지만, 자신감으로 밀어붙였어요. 나 역시 그 세월 동안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거죠.”(서혜정)
두 사람에게 ‘X파일’은 일일이 의미를 부여하기엔 삶의 너무 많은 부분들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규화는 “성우 생활을 하며 멀더라는 이름으로 살아가고 있고, 죽을 때까지 그렇지 않을까 싶다. 이 프로그램 이상의 것이 어떻게 나타날까. 없으리라 생각한다”고 했다. “내 인생의 전부고, 존재이유지.”
서혜정은 ‘X파일’ 이후에도 ‘롤러코스터 남녀탐구생활’(tvN)의 내레이션을 통해 또 한 번 큰 사랑을 받았다. 스컬리의 이미지도 그 때 완전히 벗었다. 그럼에도 ‘X파일’을 향한 애정이 남다르다. 그의 30대를 온전히 바친 프로그램이다. “성우로서 연기를 하고, 스컬리라는 캐릭터에 또 하나의 영혼을 불어넣었죠. 내 얼굴은 아니지만 그 안에 내가 있다는 걸 느껴요. 그 애정을 이루 말할 수 없죠.”
복고 열풍처럼 다시 살아난 원조 미드와 추억 속 ‘성우들의 목소리’는 다시 진실을 찾아나섰다. “정답을 알려주지 않고 시청자가 결론을 내리게 하는”(이규화), 그래서 “보는 사람의 상상력을 자극”(서혜정)하는 힘이 큰 드라마다. 마니아들이 그토록 바라던 멀더와 스컬리의 로맨스는 시즌10에서 결실을 맺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다. 난데없이 두 사람의 아이가 등장했다. 이규화 서혜정은 입을 모았다. “진실은 저 너머에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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