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육룡이 나르샤’(SBS)와 ‘송곳’(JTBC)에는 시대와 소재를 초월한 공통분모가 나온다. 지금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리며, 분노해야할 대상을 명확하게 보여주고, ‘행동하는 인물’을 통해 체제 혁신을 그린다는 점이다. 현실에 발 붙인 사람들의 대사는 직설적이다.
이전의 드라마와는 다른 방식이다. “기존의 드라마가 드라마로서 해야하는 선을 지키며 어느 정도 힘든 현실을 그리고 공감하는 정도”(정덕현 대중문화평론가)였다면, 이젠 “행동강령을 알려주고 시스템의 변화”(정덕현 평론가)를 보여준다. ‘체제 순응적’이었던 드라마 속 인물들은 ‘행동하는 개혁가’로 옷을 갈아입었다.
‘육룡이 나르샤’의 제목은 조선 창업을 노래한 ‘용비어천가’ 1장에 나오는 구절을 따왔다. 세종의 6대 선조를 찬양하는 노래다. 실존인물(이성계 정도전 이방원) 셋, 가공인물(이방지 무휼 분이) 셋을 ‘여섯 용’으로 부르며, ‘거악’으로 규정된 고려를 허물고 새 나라를 세우는 사람들의 ‘혁명기’를 그린다. 기존 드라마와 달리 다수의 인물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데에는 이유가 있다. “모두가 불편하고 모두가 억울한 시대”(김영현 작가)이기 때문이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한 나라가 망해가는 피폐한 지옥상과 새 나라의 창업을 표현하는 데에 있어 역사 속 세 인물이자 백성보다 나은 위치에 있던 사람들의 이야기만으로는 설득이 되지 않았다”며 “백성의 입장에서 조선 건국에 대한 시각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허구의 인물들을 통해 그린 백성의 삶은 “시청자가 여러 인물 가운데 하나에 몰입해 개인의 삶을 대입하는”(정덕현 평론가) 장치가 된다.
신세경이 연기하는 분이는 ‘시대의 입’을 대변한다.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 나라에서 “산다는 건 뭔가 한다는 거잖아요. 근데 전 아무 것도 할 게 없어요. 길을 잃었다고요. 그럼 그냥 이렇게 죽어요? 뭐라도 해야 사는 거잖아요”라는 어린 백성의 대사엔 울분과 개혁의 의지가 담겨있다.
드라마 관계자들은 김영현 박상연 작가의 장점으로 “역사 속에서 현재를 읽는 대사”(윤석진 교수)와 “그 안에서 긍정적인 에너지를 끌어내는 힘”(한정환 SBS 드라마국 EP)을 꼽는다.
김영현 박상연 작가는 “대본을 쓸 때 무엇을 의도하고 쓰진 않는다”고 한다. 다만 “팩션사극을 쓸 때 모든 장면에서 다양한 상상력을 열어두되, 시대정신만은 결코 위반하지 말 것을 염두한다”고 했다.
‘육룡이 나르샤’ 역시 이 관점에서 쓰였다. 두 사람은 “난세는 약자의 지옥”이라고 봤다. 드라마에서 “아이들의 죽음이 자주 등장하고, 아이를 갓 낳은 여자가 돼지에게 젖을 먹이는 유모로 끌려가는 것”은 “붕괴된 국가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피해를 보는 약자들의 삶을 통해 난세 중의 난세를 보여주기 위한 설정”이라고 설명했다. 박상연 작가가 가장 공 들였다는 정도전의 대사에도 시대관은 담겼다. “전쟁은 가진 사람이 결심해선 아니 된다. 전쟁에서 죽는 것은 오직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전쟁은 늙은 자들이 결정해선 아니 되는 것이다. 죽는 것은 단지 젊은이들이기 때문이다”라는 대사다. 박 작가는 이 짧은 대사를 무려 6개월 동안 고민하고 다듬기를 반복했다. ‘송곳’은 탄탄한 원작을 놀라운 싱크로율로 영상으로 옮겼다. 원작 에피소드를 일부 재배치하고, 주변인물들의 에피소드를 추가해 “웹툰과 드라마의 간극을 메운 것”을 제외하면 대사, 내레이션, 화면구성까지 100%에 가까운 싱크로율을 자랑한다.
김석윤 PD는 “워낙에 완성도가 높고 내레이션의 톤이 특별한 작품”이기에 “각색으로 대사 등 일부 이야기가 빠져버리면 전체 완성도에 문제가 생긴다고 봤다. 주제에 대한 운신의 폭이 거의 없는 작품이라 원작에 최대한 충실했다”고 말했다. “연출자의 몫은 원작자의 의도를 정확하게 해석하고, 웹툰의 감동을 풍성하게 만들어 연착륙하게 하는 것”이라는 판단에서다.
드라마는 외국계 대형마트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이야기를 다루며, 중간관리자 이수인(지현우)과 노무사 구고신(안내상)이라는 ‘행동하는 인물’을 통해 당연하다 여겨지는 시스템의 폐부를 끊임없이 찌른다.
이수인이라는 인물은 드라마의 중심에 서지만 사건에선 벗어난 제3자라는 점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매만진다. “있지 않아야 할 곳에 있지 않아야 할 것이 있는 상상해본 적이 없는 기이한 있음이 만들어내는 공포와 혼란”(이수인 내레이션)은 노골적인 주제의식에 대한 거부감을 덜어낸다.
정덕현 평론가는 “부당 노동행위가 만연한 시스템에서 가장 먼저 바뀌어야 할 주체인 중간 엘리트 집단을 통해 객관성을 담보하고 그 시선에 비친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각성을 불러온다”고 말했다. 드라마는 때문에 “모든 곳에서 누군가의 걸림돌“이었던 이수인의 “성장 스토리를 축”(김석윤 PD)으로 삼는다. “다음 한 발이 절벽일지 모른다는 공포 속에서도 제 스스로 자신을 어쩌지 못해서 껍데기 밖으로 기어이 한 걸음 내딛고 마는”, 이해관계에 얽히지 않고서도 “반드시 하나쯤은 뚫고 나오는” 송곳 같은 인간들의 이야기다.
또 다른 인물 구고신은 ’약자들의 방패막이‘다. 그의 입에선 삶의 통찰력을 더해진 명대사가 줄줄이 나온다. 대사는 끊임없이 생각할 꺼리를 던지는 격언집과 같다. “서는 데가 바뀌면 풍경도 달라진다”거나 “싸우지 않으면 경계가 어딘지 모른다”는 대사는 꾸준히 회자되고, “국가는 평범한 사람들을 벌주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대사는 승자독식 경쟁사회의 치부를 들춘다.
배우 안내상은 드라마의 명대사로 구고신이 이야기한 “선한 약자를 악한 강자로부터 지키는 것이 아니라 시시한 약자를 위해 시시한 강자와 싸운다”는 대사를 꼽았다. 안내상은 이 대사를 통해 학생운동에 몸 담았던 자신의 청년시절을 돌아봤다고 했다. “시시한 약자들에게서 작은 흠결이 보이면 사회는 그들에게 매몰찬 반응을 보낸다. 그건 이 사회가 아주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라는 그는 “나 역시 아직도 딜레마를 겪고 있다. 시시한 약자들에게 너그러이 마음을 열지 못한다”고 말했다. “(학생운동을 할 땐) 내가 왜 이 시시한 사람들을 위해 청춘을 바칠까 싶었다. 답을 낼 수 없어 (학생운동을) 접었지만, 그 때 왜 구고신과 같은 삶을 선택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실망하면서도 변화할 것이라 기대하는, 구고신 같은 삶을 추구해야하는 것이 아니겠냐” 말했다.
고승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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