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한일월드컵 때의 일이다. 조 예선전에서 포르투갈을 꺾고 월드컵 사상 첫 16강 진출에 성공한 한국 대표팀의 주장 홍명보는 당시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격려를 받는 자리에서 후배 선수들에 대한 병역혜택을 건의했다. 이에 김 대통령은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이에 기존의 병역법 시행령은 순식간에 개정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16강 진출로 최고조의 분위기에 들떠 있던 선수들은 병역혜택이라는 낭보에 더욱 고무되어 기적적인 4강 진출이라는 신화까지 창조했다. 2015년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정규리그에서 1위를 차지한 삼성 라이온즈가 시리즈를 앞두고 청천병력 같은 소식을 접했다. 세 명의 주전 선수가 ‘원정도박’ 의혹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삼성은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들끓는 비난 여론 앞에 고개를 숙였다. 또한 당사자들을 한국시리즈 앤트리에서 제외했다. 한국시리즈 5연패 꿈에 부풀었던 팀 분위기는 ‘초상집’과 다르지 않았다. 결국 삼성은 두산에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1승4패로 완패하고 말았다. 일부 가수들의 곡 제목이나 가사라도 많이 쓰였던 ‘폼생폼사’ 라는 단어처럼 스포츠계에는 ‘분생분사’라는 말이 있다. 분위기에 살고 분위기에 죽는다는 말이다. 승부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실력이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다 해도 심리 상태가 불안정하면 상대에게 맥없이 덜미를 잡히게 된다. 특히 팀 스포츠의 경우 분위기는 개개인의 실력 이상으로 경기에 영향을 미친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4강에 오른 원동력도 ‘병역헤택’이라는 분위기 고조용 낭보(朗報)에 기인했다고 볼 수 있다. 삼성이 한국시리즈에서 보여준 경기 모습은 ‘원정도박’이라는 분위기 추락용 악보(惡報) 앞에 무기력 그 자체였다. 다시 말해, 한국축구는 분위기로 살았고(분생), 삼성 야구는 분위기에 죽었다(분사). 삼성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있다. 주전 선수들의 엔트리 제외로 그들을 메울 만한 선수를 찾기가 어려웠다. 또 이들의 공백에 따른 구체적 전력과 전술을 짤 수 있는 시간 역시 턱 없이 부족했을 것이다. 이로 인해 삼성은 한국시리즈 내내 갈 지자 [之] 행보로 일관했다. 피가로, 클로이드, 장원삼 등 10승 이상의 주전 선발투수들이 동시다발로 부진했고, 정규리그 팀 타율 1위였던 타격조차 침묵을 지켰다. 거기에다 선수들은 “이겨야겠다”는 투지조차 없었다. 상대가 두산이 아니라 그 어떤 팀이라 해도 이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모두가 ‘원정도박’이라는 악재로 인해 가라앉은 팀 분위기의 여파일 수 있다.한국시리즈라는 대사를 불과 며칠 앞두고 갑작스럽게 맞은 ‘초상집’ 같은 분위기를 반전시킬 수 있는 시간이 삼성에게는 너무나 부족했다. 이번 한국시리즈가 애당초 불공정하게 시작됐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전혀 일리 없는 주장이 아니다. 재산과 생명을 다투는 급박한 것도 아닌 사안을, 시즌 중도 아니고 굳이 일년 농사의 결산을 앞두고 세상에 터뜨려야 했냐는 의문이 나올 수 있다. 류중일 감독이 도박 기사가 나왔을 때 누군가 삼성을 흔들고 있다는 뉘앙스로 불만을 터뜨린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필자는 삼성이 ‘불공정’ 한국시리즈를 자초했다고 본다. 이번에 터진 ‘원정도박’ 의혹 파문은 지난 6월 이미 한 언론사에 의해 보도된 바 있다. 이 언론사는 당시 스포츠스타 세 명의 ‘원정도박’ 의혹을 제기하면서 삼성 구단에 사실 여부를 확인하려 했다. 언론사에 따르면 그러나, 삼성은 이를 확인해주지 않았다. 결과론이지만, 삼성은 그 때 자체조사로 내용을 철저하게 확인했어야 했다. 국가정보원보다 정보력이 뛰어나다는 삼성이 이 정도를 알아내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랬다면 불공정 한국시리즈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것이다.포스트시즌은 단기전의 묘미를 살려 선수와 팬들을 최대한 긴장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다. 공 하나 하나에 선수와 팬 모두 이목을 집중한다. 그래서 가장 드라마틱하고 재미있는 경기들이 연출된다. 정규리그에서는 성적이 좋지 않았던 팀이 포스트시즌에서는 강팀들을 물리치는 ‘역전’ 드라마가 펼쳐진다. 이번에는 정규리그 3위였던 두산이 1위 삼성을 꺾고 14년 만에 다시 한 번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 두산 팬들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두산 구단과 두산 팬들은 기쁘겠지만 매년 한국시리즈를 지켜본 필자는 찝찝하기만 하다. 삼성이 5연패를 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모두가 같은 조건에서 공정하게 대결을 펼쳐야 할 한국시리즈가 시작 전부터 한 구단이 자초한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그리 드라마틱하지도 않고 재미도 없는 사상 최악의 ‘불공정’ 시리즈로 끝났기 때문이다. Sean1961@naver.com*필자는 미주 한국일보와 <스포츠투데이>에서 기자, 체육부장 및 연예부장을 역임했고, 현재 스포테인먼트 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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