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속눈썹에 깊은 눈으로 여성 팬들을 사로잡았던 캡틴 아메리카가 인류의 마지막 희망을 싣고 달리는 열차의 하층민들이 타고 있는 꼬리칸에 탑승했다. 그는 열차의 맨 앞 칸에 있는 엔진을 차지하기 위한 반란 세력의 리더로 분했다.

영화 ‘설국열차’(감독 봉준호)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한 크리스 에반스는 연일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다. 자신을 보기 위해 공항에 나온 팬들은 물론이며, 그만큼 뜨거웠던 한국의 여름, 그리고 취재진들.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어려 있었다. 무엇보다 봉준호라는 감독과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이었다.

“‘설국열차’에 있어서 가장 매력적으로 생각한 점은 봉준호 감독이다. 무엇보다도 나는 작품을 선택하는데 있어서 감독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시나리오, 배우, 스태프 들이 좋아도 감독 때문에 영화가 형편없어지는 걸 경험했기 때문이다. 항상 좋은 감독이 하는 작품을 찾게 된다.”

솔직한 답변에 이어 봉 감독에 대한 칭찬이 계속됐다.

“한국 감독, 배우와 호흡은 큰 차이가 없었다. 오히려 영화를 만들면서 이 사람들이 더욱 열성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다소 다른 점은 서양은 한 장면을 여러 각도에서 촬영하지만, 봉 감독은 필요한 것만 촬영한다. 그만의 영화를 만들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재편집 한다는 건 생각할 수 없다. 이러한 확신은 배우 입장에서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게 된다. 재능이 많은 사람들과 일할 수 있는 기회였다. ‘설국열차’는 연이어 축복을 받은 느낌이었다.”

크리스 에반스는 극중 기차에 탑승했던 17년 전에 커티스로 분했다. 슈퍼 히어로의 방패를 내려 놓고 반란 세력의 리더가 된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을까. 그는 캐릭터를 위해 기차의 꼬리칸으로 제작해 놓은 세트장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감정 몰입에 들어갔다.

“커티스는 죄책감, 수치심 등이 주가 되는 캐릭터다. 이러한 감정들이 자기 행동의 원동력이 된다. 그런 사람과 공감하기 위해서는 내 스스로도 수치심과 죄책감 등을 느꼈던 순간들을 매일같이 떠올렸다. 감정적으로는 힘들었지만, 연기를 하는 내내 치료를 받는 느낌이었다. ‘설국열차’는 이제까지 내가 한 영화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영화다.”

‘어벤져스’에 보면 깔끔했던 캡틴 아메리카가 덥수룩한 수염을 기른 채 등장하는 장면이 있다. 당시 그가 ‘설국열차’의 커티스로 분해 있었기 때문이다. 촬영하는 입장에서는 웃지 못할 에피스드였지만, 그는 그만큼 커티스라는 인물에 몰입해 있었다.

이와 관련해 봉 감독은 “크리스 에반스가 완전히 준비된 감정으로 세트에 왔다. 본인이 신을 가지고 왔기 때문에 부드럽게 진행됐으며, 현장에서 주문할 것이 거의 없었다.”고 전했다.

좋은 감독을 찾던 크리스 에반스는 이제 자신이 좋은 감독이 되기 위한 준비 중에 있다. 인생의 목표를 연출로 잡은 그는 오는 11월에 감독으로서 영화를 만들 기회를 갖게 된다.

“모든 영화 장르를 다 좋아하기 때문에 온갖 영화를 다 하고 싶다. 스스로 좋은 감독이 될 수 있을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만, 작품이 잘 되면 연기보다 연출 쪽에 비중을 둘 생각이다.”

반란 세력의 리더가 된 크리스 에반스가 그 뜻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31일(오늘) 전야개봉 하는 ‘설국열차’에서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의 깊고 섬세한 연기와 함께.

조정원 이슈팀기자 /chojw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