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이윤미 기자]1776년 영조 52년 1월30일 왕세손이었던 정조는 영조의 명에 따라 효장궁에 나아가 효장세자에게 책보와 시호를 올리는 예를 거행했다.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은 뒤 정조는 10살때 죽은 큰아버지인 효장세자의 양자가 되었는데 이날 예를 거행하면서 생부 사도세자에 대한 마음이 간절했다. 정조는 2월4일 할아버지인 영조에게 상소를 올려 조심스러우면서도 강한 어조로 그 때의 일을 승정원일기에서 지워줄 것을 청한다.
“신에게는 너무도 가슴 아프고 절박한 사정이 있습니다. 아! 이는 전하께서 차마 들을 수도 없고 소자가 차마 말할 수도 없는 바입니다.(...) 다만 승정원일기로 말하면 그 당시의 사실을 모두 기록하여 모르는 사람이 없고 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신의 애통한 마음은 마치 돌아갈 곳 없는 곤궁한 사람과도 같습니다.(...) 대개 전하의 처분은 곧 천리의 공정함에서 나온 것이고, 신의 애통함은 인정의 궁극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처분은 처분이고 애통함은 애통함이니, 진실로 이른바 ”같이 가도 어그러지지 않으며 둘 다 두어도 손상될 것이 없다“라는 것입니다.”
상소를 읽은 영조는 정조의 효심과 바름에 대신들과 함께 기뻐하며 청을 수용해 그때의 일기를 창의문 밖 차일암에 나가 지우라고 전교한다. 그후 한달, 영조는 평생의 마음의 짐을 내려놓고 세상을 떴다.
왕명출납을 맡은 승정원의 별칭은 ‘후설’(喉舌)이었다. 목구멍과 혀라는 뜻이다. 임금을 수행하면서 보고 들은 말과 행동뿐 아니라 국정의 이모저모를 일기형식으로 기록한 것이 ’승정원일기‘다.
한국고전번역원이 펴낸 ‘후설'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역사의 현장을 재구성한 것으로 당시 국정과 사회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다.
명종과 인조때 대신 이원익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의지가 되는 신하였다. 일생동안 임진왜란, 인조반정, 정묘호란 등 국란속에서 백성을 먼저 챙겼으며 40년 정승에 초가집 한채 밖에 지니지 않았던 청백리였다.
1631년 4월5일 인조는 경덕궁 흥정당에서 이원익을 만났다. 이때 이원익의 나이 84세. 다리가 마비돼 제대로 걷지못해 환관의 부축을 받고 들어오자 인조는 그런 이원익에게 “방석을 앉은 채로 받쳐들고 들어오게 했는데도 기어이 그냥 들어왔으니 힘들지 않냐”며 챙긴다. 인조는 나라가 위급하고 어려우니 나라를 위해 힘써달라며 어찌하면 훌륭한 정사를 펼수 있는지 물었다. 이원익은 씀씀이를 절약해 백성을 아껴준 다음에야 국가 낭비가 없어지고 민심을 얻을 수 있다고 답한다. 이원익은 향촌에 물러나 지내고 싶다는 뜻을 아뢰지만 인조는 ”아무일 않고 누워만 있어도 국가는 그 덕택에 편안해질 수 있다“는 말로 믿음을 표했다.
승정원일기에는 일개 성균관 유생이 영조 앞에서 왕의 잘못을 얘기하며 큰 소리 치는 놀라운 장면도 생생하게 들어있다.
1725년 영조 1년 6월 생원 정유 등 성균관 유생 수백명이 신축년 경종1년에 연잉군을 왕세자로 세울 때 반대한 자들의 죄를 다스리도록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6월11일 영조는 입직한 승지를 만나는 자리에 상소를 올린 우두머리인 정유를 불렀다. 영조는 성균관 유생으로서 역적을 토벌하기를 청한 것은 옳다고 하면서도 상소 내용 중에 조태억이 지은 교문을 언급한 부분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았다. 이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정유는 영조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영조는 ”사람의 자식으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말을 계속 제기하니 이 어찌 된 일인가?“고 화를 낸다. 이에 정유는 ”성상의 하교가 매번 이와 같으시니, 이것이 바로 아랫사람들이 답답해하는 이유입니다. 성상의 하교에 매번 차마 제기할 수 없는 말이라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이 뒤로는 악역이 있어도 문제를 제기하여 아뢸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난신적자가 이리저리 날뛰더라도 이를 징토하는 자가 없어 나라가 반드시 망할 것이니,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습니까”고 받았다. 격노한 영조는 서진을 들어 책상을 내리치고 소장을 집어던졌다.
그러자 신하들이 영조에게 노여움을 진정할 것을 권하며 유생의 기개를 꺽지말 것을 요청한다. 임금앞에서 뜻을 굽히지 않는 유생, 격노한 임금앞에서 눈치보지 않고 설득하는 신하의 모습은 조선왕조 500년 역사의 힘이 어디에 있는지 보여준다.
이 책에는 전교, 비망기, 비답,교서, 윤음, 계사, 등 조선시대 사용하던 문서 형식을 사례를 곁들여 알기쉽게 설명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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