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음악거장 윤이상 선생의 고향
통영국제음악제 선율타고 봄꽃 활짝
커튼콜 끝나면 한려수도해상공원 물멍
동피랑·강구안…1호 야경인증도시 매력
[헤럴드경제=함영훈 기자] “통영과 한산도 일대의 풍경, 자연미를 나는 문필로 묘사할 능력이 없다.”
시 ‘향수’로 유명한 정지용은 젊은 한때 통영을 방문한다. 미륵산에 올라간 그는 뒤로는 통제영, 강구안, 동피랑, 앞으로는 한산도, 소매물도, 욕지도 등 한려해상국립공원이 빚어내는 장관에 감탄한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한다. ‘시어의 마술사’답지 않게 절경 묘사를 포기한다고. 그 고백은 미륵산 시비에 남았다.
통영은 강구안, 디피랑, 통제영, 웰니스인증 나폴리농원, 욕지도 등 숱한 여행 명소를 갖고 있지만, 올 봄엔 세계가 주목하는 클래식 선율까지 더했다.
통영의 봄, 음악을 만나 더 자유로워지다
드뷔시는 “음악은 자연과 상상력의 만남 위에 만들어지니, 어느 것 보다도 자유를 숨쉴 수 있는 터전”이라 했다. 통영의 봄 풍경이 음악을 만나 여행의 자유를 배가시킨다.
세계적인 음악가 윤이상을 다시 그리는 통영국제음악제(~4.7)는 유럽에서 ‘아시아의 잘츠부르크 음악제’라고 부른다. 모차르트 생가가 있는 곳의 이름을 딴 잘츠부르크 음악제는 세계 최고 권위 음악축제이다.
봄꽃 흐드러지게 핀 통영의 명소를 여행하다 국제음악제의 클래식 공연을 즐기고, 커튼콜이 끝나면 음악당 로비에 앉아 ‘물멍’을 해도 좋겠다.
“통영에 봄이 왔습니다. 그리고 세계적인 음악제가 시작됐습니다. 통영이 고향이신 윤이상 선생님은 이런 봄을 꿈꾸셨습니다. 이제 통영국제음악제는 윤이상 선생의 망향을 넘어, 아시아 클래식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올해의 주제는 ‘순간 속의 영원’입니다.”
천영기 통영시장은 ‘2024 통영국제음악제’ 개막을 선언하면서 유럽과 아시아가 음악가들의 존경을 받던 윤이상(1917~1995) 선생을 떠올렸다.
윤이상은 세계적인 명성에도 불구하고 과거 정권의 공안조작 사건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다. 최종 무죄가 선고된 이후에도 그에게 드리워진 어두운 그림자는 지워지지 않아 그의 시신은 통영 근해를 떠돌았다. 하지만 윤 선생이 작고한 지 13년 만인 지난 2018년, 그는 드디어 고향에 묻히면서 평온을 얻었다.
유치환·김상옥·김춘수…윤이상과 함께 한 문인들
윤이상 선생은 1945년 유치환, 김상옥, 김춘수 등과 통영문화협회를 만들었다.
청마 유치환(1908-1967)은 회장, 음악의 윤이상과 미술의 전혁림(1916~2010), 시조시인 김상옥(1920~2004)이 간사를 맡아 좌중을 이끄는 동안, 막내인 꽃의 시인 김춘수(1922~2004)는 총무를 맡아 연락을 다녔다.
협회에는 나전칠기 명장 김봉룡(1902∼1994), 국내 서양화 선구자 김용주(1910~1959), 작곡가 정윤주(1918~1997), 영문소설의 김용익(1920-1995) 등도 참가했다.
회원은 아니지만, 박경리(1926~2008)는 춘수 오라버니를 따르던 문학소녀였다. 통영에 잠시 머물던 이중섭(1916~1956) 화가와 백석(1912~1996) 시인은 먼 발치에서 이들의 활동을 응원했다. 윤이상 간사는 협회의 거중조정자, 마에스트로였다.
독일에서 유학하는 동안 그의 천재성이 발휘된다. 윤이상 선생은 스트라빈스키, 카라얀을 뛰어넘는 20세기 최고의 음악가로 꼽힌다.
그는 뮌헨올림픽 메인 테마곡 ‘심청’, ‘베를린 필하모닉’의 탄생 100주년 기념곡인 ‘교향곡 1번’을 작곡했고, 독일 공영방송 선정 ‘20세기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뉴욕 브루클린 음악원 역시 그를 ‘유사 이래 최고의 음악가 44인(20세기 1인=윤이상)’으로 위촉했다.
이와 함께 독일, 일본, 대만 등지 음악계를 윤이상 제자들이 주도한다. 유네스코는 2015년 윤이상 선생의 국제적 공헌을 인정해 통영을 국내 첫 ‘창의음악도시’로 지정했다.
통영국제음악제, 클래식의 미래를 말하다
진은숙 통영국제음악제 예술감독은 “우리나라 클래식의 미래는 유럽과는 달라야 한다”면서 “시선을 유럽에만 고정 시킬 게 아니라 우리만의 또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에 통영국제음악제 무대에는 다양하고 새로운 공연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스레드’와 ‘리히터스 패턴스’ 등 멀티미디어 기반 공연이나 판소리 명창 김일구의 ‘적벽가’ 등 한국적인 무대도 음악제를 준비하고 있다.
아울러 코로나로 불발됐던 헝가리 거장 페테르 외트뵈시(1944~2024)의 작품도 무대에 오른다. 그는 안타깝게도 축제 개막 닷새 전 향년 80세로 작고했다. 여생을 자신이 존경하던 윤이상 음악가의 고향 통영을 위해 보낸 것이다.
국제음악도시 답게 통영시민과 청소년들의 음악 열기, 국제 교류도 활발하다. 동원중학교 학생 60명은 섹소폰 오케스트라 ‘더 샵’을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시민악단 ‘꿈의 오케스트라’, 빈소년합창단과 어깨를 견줘보겠다는 꿈을 가진 통영소년소녀합창단도 ‘찾아가는 음악회’를 열고 있다. 윤이상 선생이 흐뭇해 했을 풍경이다.
동원중학교는 베트남 탄쉔중학교 등과 상호 교육교류를 하고 있고, 뒷 건물의 동원고 학생들은 지난 29일 동피랑에서 친구인 일본 도쿄 근교 아리마고 학생들과 자유롭게 놀며 웃음꽃을 피웠다.
아리마 고교생은 한국말을 많이 쓰려고 했고, 동원고 학생들은 짧은 일본어로 그들을 편안히 대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정겹다. 놀이를 함께 할 때 일본 친구의 도전에 한국 친구는 우정 어린 리액션으로 화답했다. 청소년 때부터 국제 감각이 뛰어난 통영이다.
국내 1호 야간관광특화도시 위엄…디파랑의 야경이 뜬다
통영의 자랑꺼리 중 하나는 지난 2022년 국내 제1호 야간관광특화도시로도 선정됐다는 것이다. 특히 최근엔 디피랑의 야경이 입소문을 타고 있다. 강구안 인근 남망산조각공원이 있는 디피랑은 밤에 첨단 예술 전시장으로 바뀐다. 동피랑과 서피랑에서 사라진 벽화를 주요 주제로 다룬다.
통영시는 2년에 한 번씩 공모전을 열어 벽화를 교체하는데, 이때 사라지는 그림을 미디어아트로 되살리고 있다. 15개 테마로 운영하는 디피랑은 인공조명과 인터렉티브 콘텐츠, 대형 화면 미디어 아트를 통해 여행자들의 추억이 서린 작품들을 새롭게 재생한다.
통영의 강구안은 통영 대중음악과 맛집의 메카로, 거북선 여러 척을 백댄서로 둔 프린지 무대에서 프로, 아마추어 가리지 않고 버스킹이 이어진다. 최근 완공된 보도교가 강구안의 밤을 더욱 아름답게 장식한다.
강구안 밤 풍경은 동피랑, 서피랑에 오르면 더욱 멋지다. 삼도수군통제영 동서를 지키는 포대망루이지만, 어부들이 망루 아래 집을 짓고 벽화를 그려 ‘한국의 친퀘테레’ 같은 아름다움을 연출했다.
동피랑에선 송중기의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착한 남자’ 등 많은 드라마 촬영이 있었다. 서피랑은 명정동으로 이어져 박경리 소설 ‘김약국의 딸’ 배경이 됐다. 통영문화협회 멤버들의 아지트였던 하동댁(현재 이즘 카페) 역시 그들의 이야기를 품고 있다. 김춘수는 윤이상의 사망 소식에 “이제 그 형님 오셔서 협회가 부활할 모양입니다”고 목놓아 울었다고 한다.
봄엔 봉수골 벚꽃을 빼놓을 수 없다. 전혁림 미술관이 봉수골의 예술미를 더한다. 통영의 봄은 문화예술이 함께 하면서 더욱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