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영상 기자] # 경기도에서 역세권 개발사업을 진행 중인 A시행사는 지난달 도래한 600억원의 분양택지 잔금을 한국토지주택공사(LH)에 아직 납입하지 못하고 있다. 전체 토지대금 2500억원 중 약 1900억원의 계약금과 중도금을 납입했지만 최근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불가 통보를 받으면서 자금 사정이 급속도로 악화됐다. 오는 6월까지 잔금을 납입하면 추가 지연이자를, 납입하지 못했을 때는 이미 지급한 계약금 250억원을 포기해야 할 상황이다. 결국 A시행사는 최근 LH에 잔금기한을 최소 1년 이상 연장해 달라고 요청한 상태다.
부동산경기 침체로 부동산PF 자금줄이 마르면서, 이른바 시행사로 불리는 디벨로퍼들이 공멸위기로 치닫고 있다. 분양시장이 차갑게 식으면서 금융권의 자금 공급이 뚝 끊긴 상태가 이어지며, 이미 계약한 토지에 대한 대금 납부마저 줄줄이 연체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1일 부동산업계에 따르면 민간 PF 축소 등으로 자금난에 허덕이는 여러 부동산 디벨로퍼(시행사)들이 LH를 상대로 분양택지 잔금 납입기일을 유예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디벨로퍼들은 대지 입찰에 나설 때 자금계획을 수립해놓고 있었던 만큼 과거 전례가 없었던 일이다. 최악으로 치닫고 있는 시행업계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분석이다.
현재 확인된 업체만 해도 2기 신도시에서 250억원에 토지를 낙찰받아 근린생활시설을 개발하며 2차 중도금 납부부터 어려움을 겪는 B시행사, 경기도에서 오피스텔 400실을 개발하며 1차 중도금을 연체 중인 C시행사 등 다수다. 시행사들이 회원사로 등록된 한국부동산개발협회 역시 이 같은 요구를 취합해 국토교통부에 수차례 비슷한 의견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통상 LH의 많은 택지 분양일정이 12월에 몰려 있고, 중도금·잔금 납입일자가 6개월씩 간격을 둔 점을 고려했을 때 올해 6월과 12월에 돌아오는 납입일정을 시행사들이 연기해 달라고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LH는 올해 6월에 받아야 하는 중도금·잔금(공동택지에 한정) 규모만 100여개의 업체에서 최소 1조4000억원, 12월에는 90여개의 업체에서 1조2000억원이 넘는다고 밝혔다. 자금난을 겪고 있는 택지들은 2기 신도시 중 동탄, 평택, 파주 외에도 다수다.
상황이 이렇지만 LH는 ‘유예 불가’ 통보를 한 상황이다. 요청한 업체들에 우선 계약 일정대로 대금을 납입해줄 것을 통보했다.
LH 관계자는 “납부금액, 기간 등은 상호간의 계약으로 확정된 사안이며, LH가 임의로 조정할 수 없다”며 “아울러, 대금회수 지연은 공사의 재무부담을 가중시켜 주거복지, 지역균형발전 등 공사가 추진중인 공익사업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고 했다.
이에 대해 한 시행사 대표는 “과거 분양시장이 좋을 때만 해도 공급가격의 300%에 낙찰받고도 환호했다. 당시 너무 비싸게 매입한 토지들이 지금 문제가 되고 있다”면서 “다만 사업대금의 구조를 들여다보면 시행사뿐만 아니라 금융사, 시공사 등 다양한 업체가 포함돼 있는데 시행사가 계약금을 몰취당했을 땐 그 파장이 다른 업계에까지 미친다. 단순히 시행사만의 문제가 아니다”고 호소했다.
한국부동산개발협회 관계자도 “중도금·잔금 일정 납부 유예와 연체이자율 인하 등이 가장 시급한 현안”이라며 “전반적인 경기 사정을 고려해 조금만 늦춰 달라는 것인 만큼 국토부의 의지가 중요한 시점”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