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시절 아버지 배당금 수령 심부름

주식에 대한 거리감이나 선입견 없어

장기근무 원동력은 긍정적 자세 ‘첫손’

대리 때까진 동기들 보다 늦었던 사원

27년 IB업무 ‘남들이 가지않는 길 개척’

두번의 세계 금융위기에서 기회 포착

공감대 형성·솔선수범이 리더의 덕목

열심히 하면 나도 모르게 돈이 붙을것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은 1988년 공채로 입사해 33년간 증권업에 종사하며 업계 내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린다. 그는 증권업이라는 한우물을 팔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꼽았다. 최근 사모펀드 사태에 대해 100% 보상이라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그는 고객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삼는 경영철학을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이상섭 기자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은 1988년 공채로 입사해 33년간 증권업에 종사하며 업계 내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린다. 그는 증권업이라는 한우물을 팔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꼽았다. 최근 사모펀드 사태에 대해 100% 보상이라는 파격적인 결정을 내린 그는 고객과의 신뢰를 최우선으로 삼는 경영철학을 인터뷰 내내 강조했다. 이상섭 기자

“유년 시절을 보낼 때 집 근처에 증권사가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주식투자를 하셨는데, 식사시간이 되면 객장에 가서 모셔오기도 하고, 은행 주주총회에 가서 배당금을 받아오는 심부름도 했습니다. 일찍이 주식을 접하다보니 거리감이나 선입견은 따로 없었습니다.”

증권업계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는 정일문 한국투자증권 대표이사 사장이 맺은 증권과의 인연은 의외로 약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정 대표는 1988년 한국투자증권의 전신인 동원증권에 입사해 올해로 근무연수가 33년. 금융업의 특성상 이직이 흔한 분위기에서 한 직장에서 최고경영자 자리까지 오른 정 대표를 여의도 집무실에서 만났다.

▶신입사원에서 대표까지...샐러리맨 신화 근간은 삶과 일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신입사원에서 정점인 최고경영자의 자리까지 오른 비결을 묻자 정 대표는 거침 없이 “애티튜드(태도)”라고 답했다. 그는 신입 직원이 우선 갖춰야 할 게 ‘태도’라며, 삶과 일에 대한 긍정적인 자세를 꼽았다.

정 대표는 “입사해서 대리로 승진할 때까지 동기에 비해 늦었습니다. 심지어 2년 아래 기수와 같이 승진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차창 승진부터는 가장 빨리, 심지어 부장을 건너뛰고 상무보로 승진하기도 했다”며 “처음 업무에 미숙했다면 차장이 되면서 익숙해지고, 다음에는 내가 완급을 조절할 수 있을 만큼 능숙해지더라”고 회상했다. ‘미숙-익숙-능숙’의 과정을 거치면서 일 자체에 재미를 느끼게 됐다는 그는 항상 매사에 긍정적인 자세를 잃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27년을 기업공개(IPO), 인수합병(M&A) 등 투자은행(IB) 분야에 몸담았던 정 대표는 자신 만의 차별화된 영업 노하우가 분명했다. 그는 일부러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길을 다니며 경쟁사들이 찾지 않는 회사를 방문하곤 했다고 귀띔했다. 사업체 규모가 크거나 잘 알려진 곳은 찾아가도 환영을 못 받지만, 외부에서 잘 찾지 않는 회사는 그 반대였다 논리다. 이에 그의 선배들이 수도권 내 방문하기 쉬운 곳을 찾을 때 정 대표는 천안, 대전까지 차를 몰고 다니다보니 여러 에피소드가 즐비했다.

20여년 전 기업들이 자본시장을 통한 자금조달이 일반화되기 전, 그는 주부들 사이에서 저온살균우유로 입소문을 타던 회사를 찾았다. 여러번 방문 끝에 가까스로 회사에 들어갔고, 현찰 장사만 하던 회사에 회사채 발행을 권유했다. 설득 끝에 회사채를 발행하기로 했는데, 회사의 본사가 있던 강원도 신용보증기금이 지급보증 업무의 전례가 없어 난관에 부딪혔다. 결국 정 대표가 중간에서 실무를 다 챙겼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수십억원의 회사채를 발행해 회사의 자금 운용에 숨통을 틔운 결과를 만들어 냈다. 이후 회사의 입구에는 ‘외부인 출입금지, 단 동원증권 정일문 예외’라는 고지문이 붙어졌다. 정 대표는 “그 표지는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뿌듯해진다”고 했다.

자본시장에 대한 정 대표의 열정은 한 가족의 운명 또한 바꿔놓았다. 정 대표가 우리사주와 IPO(기업공개) 업무를 맡던 시절, 천안에 소재한 한 기업을 상장시킬 때 일이다. 당시 정 대표의 설명회를 들었던 회사의 한 직원이 상장 이후 연락을 해 왔다. 그는 정 대표와 인사도 나눈 적이 없는 사이였다. 그는 정 대표 덕에 우리사주로 차익을 남겨 20평에서 30평 아파트로 이사했다며 정 대표를 집들이에 초대까지 했다. 정 대표는 “기억도 나지 않는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을 때 당황스러웠지만, 집들이 선물로 진공청소기를 사서 여의도에서 천안까지 다녀왔다”며 “가고오는 길 내내 자본시장 업무를 일생의 업으로 삼은 게 행운이라는 생각에 잠겼다”고 회상했다.

▶ 위기가 곧 기회...회사채 점유율 1%에서 메이저 주간사로=그와의 인터뷰에서 33년 증권맨으로서의 경력 중 27년을 보냈던 IB(투자은행) 분야에 대한 얘기는 비중이 클 수 밖에 없었다. 그가 말하는 ‘인생의 기회’도 IB와 관련돼 있다.

그가 IB본부장 시절 당시 한국투자증권은 채권시장에서 차지하는 점유율이 1% 정도에 불과했다. 이후 2008년 세계금융 위기가 닥치고 국내 기업의 자금조달이 전무해지자 회사채 발행 업무를 맡은 증권사 커버리지 부서가 바로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수익성이 약화된 증권사마다 IB부문은 물론 모든 업무 영역에서 전사적인 인력 구조조정을 단행하기 시작했다

정 대표는 이 위기를 기회로 봤다. 그는 “글로벌 불황이 회복기로 돌아서면 가장 먼저 채권발행을 통한 자금조달로 이어질 것이라 생각해 오히려 커버리지 부서를 재정비했다”며 “곧 경기호황 시기가 오자 한국투자증권 채권자본시장(DCM) 파트가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회사채 주간사로 입지를 다지는 계기가 됐다”고 뿌듯해 했다.

▶자본시장 관심 역대 최고...금융의 선순환 효과 이끌어내야= 지난해부터 거세게 일고 있는 투자 열풍에 대한 그의 소신도 분명했다. 정 대표는 “그동안 지나치게 부동산에 자본이 치우쳐져 있었습니다. 금융시장을 통한 자본의 공급은 사업을 만들고 일자리를 창출하고 세금도 내는 선순환의 원동력입니다. 자본시장이 조금 더 확장될 필요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런 새로운 환경에서 고객이 원하는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 어렵게 형성된 자본시장에 대한 관심을 꾸준히 이어가는 것이 금융투자회사의 역할”이라며 “제대로 된 정보를 제공함으로써 이런 역할을 누가 한 발 앞서 하느냐가 경쟁력을 좌우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전세계 투자시장에 유례 없는 통화가 많이 공급된 만큼 통화가 회수될 때 발생할 리스크 관리도 금융투자회사의 또 다른 역할”이라고 덧붙였다.

아직 국내 금융시장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지 못한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정 대표는 “국내 증권사가 기업금융 활성화에 마중물 역할을 해야 한다”며 “기업 신용공여, 벤처투자, IPO, 회사채 발행 등 기업 생애주기에 맞춘 자금공급 솔루션 제공자로서 증권사의 역할을 정립하면, 국내 증권사도 이미 초일류인 국내 제조업 및 컨텐츠 관련 기업처럼 글로벌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제언했다.

그는 이어 “자본시장에 대한 관심이 역사상 최고 수준으로, 대단히 중요한 기로에 서 있다”며 “자본시장 민원이 10년이 더 됐던 것을 국회 정무위원회가 이렇게 단시간에 바꿔 준 적이 없다. 자본시장 내에서의 자금의 선순환이 자리잡을 수 있도록 정부와 정치권이 지원하고 있는 지금이 자본시장이 한단계 업그레이드되는 중요한 시기일 것”이라고 진단했다.

▶‘최고의 사람’이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 ‘최고의 보상’을 받는 증권사= 조직의 리더로서 MZ세대 직원들과의 소통은 정 대표가 최근 신경을 기울이는 부분이다.

정 대표는 “증권사는 최고의 사람이 모여서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 최고의 보상을 받는다는 매커니즘이 제일 맞는 기업”이라며 “MZ세대는 많은 보상을 요구하기에 앞서 투명한 보상을 요구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에 “숫자로 말하는 증권업 특성상 일한 만큼 보상하는 시스템을 갖춰 대주주나 대표 보다 직원이 더 많은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해 나가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에게 “리더란 무엇인가”를 물었다. 돌아 온 그의 대답은 명쾌했다. 정 대표는 공감대 형성과 솔선수범을 꼽았다. 그는 “소통하지 못하는 리더는 리더가 못 된다. 옛날의 리더는 많이 알고 경험이 많은 사람이었지만, 요즘은 간접 경험이 많고 정보는 더 많다”라며 “자신이 느꼈던 것을 전달해 주고 경청을 이끌어낼 수 있는 리더가 되기 위해서는 공감대 형성이 기본 전제”라고 힘주어 말했다.

거액의 돈이 오가는 자본시장의 현장에 선 이들에게 정 대표는 돈을 대하는 지혜와 철학 또한 빼놓지 않았다. 정 대표는 현장에서 영업을 할 때 벤처기업 사장이 한 말을 되뇌였다. 그는 “’내 눈 앞에 있는 돈은 내 것이 아니다‘, ’돈은 열심히 일하면 등에 와서 붙는다는 말을 잊지 않고 있다”라며 “요즘 주변을 보면 돈에 너무 민감한 것 같은데, 하고자 하는 일이 가진 의미를 깨닫고, 자신 만의 일을 굳건히 하면 돈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등에 붙어 있을 것”이라고 조언했다. 이태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