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장 해오름극장서 초연…6일까지 공연
‘수궁가’ 비틀어 전한 우리 삶의 이야기
기발한 상상력·패러디·새로운 음악·안무 조화 탁월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토끼의 간’을 찾아 육지로 올라온 자라(유태평양)도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미처 몰랐으나’ 마음고생도 심했다. “간을 빼놓고 왔으니 다시 찾으러 가야 한다”는 기지를 발휘한 토부(兎父, 토끼 아버지)를 놓쳐 속이 탄다. ‘부귀영화’를 꿈꿨건만 일장춘몽이 될 판이다. 다시 ‘토끼의 간’을 찾으려다 보니 육지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다. 바닷속은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내인 ‘암자라’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 자라 친척쯤 되는 남생이와 함께.
“둘은 나의 것이었고/둘은 누구의 것인가”
순간 귀를 의심했다. 난데없이 인용한 ‘처용가’로 시작된 자라의 한탄. 탁월한 리듬감이 더해지니 요즘 트렌드라는 ‘싱잉랩’이 따로 없다. 유수정 국립창극단 예술감독과 작곡, 음악감독을 맡은 한승석 중앙대 교수가 작창한 소리들은 창극의 새로운 음악세계를 보여줬다. 앙증맞아 보이기까지 한 안무는 화룡점정. 초반부에 등장하는 이 장면은 ‘귀토’의 방향성과 특징적 모습을 보여준다. 소외됐던 등장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만들었고, 액자식 구성을 활용해 극에 풍성함을 더했으며, 판소리 다섯 마당을 비롯해 대중가요까지 패러디했고 그에 어울리는 안무까지 곁들여 보고 듣고 감상하는 모든 감각을 충족시켰다.
자라는 자라대로, 토부는 토부대로 각자의 삶이 이어진다. 토부가 집으로 돌아가면 ‘귀토’의 본격적인 이야기는 막을 오른다. ‘수궁가’의 끝이 나는 지점에 시작되는 새로운 이야기가 바로 ‘귀토-토끼의 팔란’(6일까지.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이다.
‘귀토’ 속 토끼의 삶은 영 고달프다. 살아 돌아온 아버지는 독수리에게, 어머니(토모·兎母)는 포수에게 목숨을 잃는다. 아비와 어미를 잃고 천애고아가 된 아들 토자(兎子). 먹고 사는게 너무도 버겁고, 도처에 목숨의 위협이 도사리는 ‘삼재팔란’으로 꽉 찬 이 땅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토끼 생이 만만치가 않지만, 그래도 견뎌야 한다”며 “부디 소망의 끄나풀을 놓지말라”고 토끼 친인척들은 하지만, MZ세대쯤 될 법한 어린 토자는 굳건하다. “난 이제부터 토끼 안할라요.” 유토피아를 찾아 제 발로 수궁으로 간 토자. 이쯤에서 등장하는 질문 하나. “수궁은 진정 유토피아였을까.”
‘수궁가’의 ‘스핀오프’ 격인 이 작품은 기발하고 독특하며, 주제의식이 강하다. 익숙한 ‘수궁가’를 해체하고 변주해 다양한 에피소드를 넣었다. 여백이 많은 다섯마당에서 출발하니 그럴 법한 상상력이 무궁무진하게 펼쳐졌다.
원전 ‘수궁가’에선 볼 수 없던 동물들이 등장해 저마다의 이야기를 쏟아낸다. 토끼를 잡기 위한 자라의 탐험 중엔 육지 동물들의 왕을 뽑는 대목이 나온다. 여우가 호랑이의 위세를 빌려 호기를 부리는 ‘호가호위’(狐假虎威)를 차용했다. 이 장면에선 이날치 밴드를 통해서도 잘 알려진 ‘범 내려온다’가 등장해 익숙한 재미를 준다. 육지 생활이 길어진 자라를 기다리던 용왕의 의심이 깊어지는 대목에선 대뜸 그리스 신화가 등장한다. 뱀에 물려 죽은 에우리디케를 찾기 위해 저승으로 향한 오르페우스의 이야기를 담은 액자식 구성이다. 여기에 ‘처용가’, ‘춘향가’,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까지 등장하는 의도적 패러디가 색다른 묘미이자 웃음 포인트다.
수궁 속 캐릭터도 다채롭다. 용왕을 살리고 싶지 않은 반골 기질의 병마사 주꾸미, 형 집행관 전기뱀장어, ‘짱뚱’ ‘짱뚱’ 소리를 내며 존재감을 알리는 짱뚱어 등 과도하지 않게 물속 생명체의 특징을 살린 점도 흥미롭다. 이 무수한 생명들 앞에서 죽을 위기에 놓인 토자와 토자를 따라 수궁까지 온 ‘여자친구’ 토녀는 ‘간의 기능’을 설파하다 제철음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1월부터 제철생선과 조리법을 줄줄이 읊기 시작한다. 장단의 합이 딱딱 맞아 떨어지는 군더더기 없는 연주와 속사포로 쏟아내는 소리에 몸은 절로 들썩인다. 15인조 연주단이 만들어내는 중모리·자진모리·엇모리·휘모리 등 다양한 장단은 이야기에 흐름에 맞는 깔끔한 구성으로 관객의 흥을 돋운다.
‘귀토’는 새단장 해오름극장의 시범운영 기간 중 첫 작품으로 무대에 올랐다. 48년 만에 달라진 해오름극장은 창극 공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귀토’는 1200여석 규모로 커진 대극장에서 다채로운 영상과 54명의 출연진으로 꽉 채운 무대를 보여줬다. 무대 구성과 분장은 화려함 대신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 대신 바닥엔 가로 8m, 세로 8m인 대형 발광다이오드(LED) 스크린을 설치해 수중과 육지를 상징하는 배경을 보여줬다. 무대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1500여개 각목으로 경사로를 설치한 것도 볼거리였다. 소리꾼들의 소리와 악단의 연주는 132대의 스피커를 타고 객석 어느 자리에서나 생생하게 들을 수 있었다.
‘귀토’는 거북과 토끼(龜兎)를 뜻하는 동시에 ‘살던 땅으로 돌아온다’(歸土)는 중의적 의미를 담았다. 또 한 번 새로운 창극의 세계를 보여준 이 작품은 국립창극단이 올 한 해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토끼의 고단한 삶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과 다르지 않다는 것, 그럼에도 지금 이곳의 소중함을 발견하고 견디고 살아가자는 주제의식을 담고 있다. 재기발랄한 상상력과 그 안에 담긴 해학, 이야기의 흐름에 맞아떨어지는 음악, 공옥진의 움직임에서 영감을 얻은 안무, 창극단 배우들의 한몸같은 연기와 호흡은 어느 하나 튀지 않고 조화로웠다.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 작품은 너무도 친절하다. 잊을 만하면 등장하는 주제의식과 의도적인 메시지 전달은 충고와 조언하기 좋아하는 윗세대 같았다. 여기저기 산재해 툭툭 튀어나오는 에피소드는 흥미로웠지만, 다소 산만하다는 느낌을 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