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펜서 국가 역할, 21세기 새롭게 조명
국가 기능 개인의 자유,권리에 국한해야
강압적 힘 통한 목적 달성은 역사퇴보
사회발전도 생명체의 진화과정과 같아
정부주도보다 민간화가 사회에 이익
민간 부문 자발적 경쟁으로 균형맞춰
공공부문은 관료화, 비효율, 결함 초래
과잉 입법 신랄 비판, 혼란만 가중시켜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사상가들의 입장은 크게 국가주의와 자유주의로 대별되며, 국가와 개인 중 어느 쪽에 우선하느냐로 크게 나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비견되며, 찰스 다윈조차 “나보다 몇 배는 나은 위대한 철학자”라고 칭송했던 영국 사회학의 창시자, 허버트 스펜서(1820~1903)는 국가보다는 개인을, 강제보다는 자율을 강조, 국가 권위에 도전한 사회개혁가로 최근 새롭게 조명받고 있다.
그는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국가 권력은 올바르지 못하다고 봤다. 더욱이 잘못된 과다 입법으로 개인의 자유와 삶을 제약하고 있음에도 전혀 책임지지 않는 입법자들에게 죄를 물었다. 이런 생각은 그의 일련의 저술과 종합철학체계 전반에 걸쳐 이어졌으며, 말년에 출간한, 그의 가장 중요한 저작으로 꼽히는 ‘윤리학 원리’의 핵심이기도 하다.
이상률 씨가 번역한 ‘국가 의무의 한계’(이른비)는 스펜서의 ‘윤리학 원리’ 중 ‘국가론’ 부분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스펜서는 이 책에서 국가의 성질, 정체, 국가의 의무와 한계, 정부의 기능, 개인의 자유, 제도 개혁, 사회 개선 등 다양한 논의를 펼쳐나간다.
그는 국가의 관념이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자신이 아는 사회들로부터 이끌어낸 일반적인 국가관이 오늘날에도 유효한 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그리스에서 신분 관계에 따라 조직된 사회에 적합한 관념이 계약 관계에 따라 조직된 사회에는 적합하지 않으며, 강제적인 협동 체계에 맞는 정치 윤리가 자발적인 협동 체계에 적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호전형, 군사형 사회에서 산업형으로 넘어가면 다른 국가의 정체가 필요하다.
스펜서는 정부의 역할이란 우선 외부로부터 내부 구성원들을 지키고, 이어 사회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구성원들간의 대립과 충돌을 막는 것이라고 봤다. 바로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는 게 국가의 정의란 것이다. 스펜서는 특히 ‘제한된 국가’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말 그대로 정부의 활동 범위를 제한해야 한다는 의미다. 오늘날 작은 정부, 공기업의 민영화, 규제 완화 등과 맥을 같이한다.
비본질적 기능이 커지면 국가의 본질적 기능 수행을 방해하기 때문에 본질적 기능이 잘 수행되도록 하려면 제한이 답이라는 것이다.
스펜서는 국가의 제한이 필요한 이유를 개인의 자유와 권리 보호에 두었다. 국가가 많은 역할을 도맡다 보면 운영에서 비효율적이 될 뿐 아니라 그 본연의 역할 마저 해치게 되기 때문이다. 그는 “모든 것을 포괄하는 국가 기능은 낮은 유형의 사회이고, 높은 사회 유형으로의 진보는 기능의 포기로 특징지어진다”고 말한다, 국가가 호전형 사회에서 산업형 사회로 전환하는 시기에는 신분 체계보다 계약 체계가, 강제성보다 자발성이, 협업보다 분업이, 정부 주도보다 비정부 주도가 발달하므로 전문화와 제한이 사회구조에 이익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시장 개입을 최소화하고 국방과 외교 치안 등의 질서유지만 하는 최소 국가를 지지한 건 아니다. 그의 ‘제한된 국가’는 행정의 전문화를 통해 정부가 효율적으로 기능하는 사회다.
스펜서는 정부의 기능을 제한해야 할 또 다른 강력한 이유로, 정부의 간섭이 늘어나면 개인들이 자율성을 잃어버려 결국 자신들의 행동에 대한 책임감과 자립심도 없어진다고 봤다. 그럴 경우 개인들은 수동적이 돼 각자가 바라는 것을 자유로운 계약이나 자발적 협동을 통해서가 아니라 정부 기관을 통해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 즉 원하는 목적을 정부의 강압적 힘을 통해 달성하려는 성향이 생겨나고 결국 개인의 무력화는 역사의 퇴보로 본다.
스펜서에 따르면, 문명의 가장 위대한 진보는 정부 활동의 산물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행활애서 이뤄지는 진화의 산물이다. 진보는 입법이나 강제에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사적인 이익이나 생계유지 욕구에 부추겨진 사람들의 자발적 협동에서 생겨난다. 그리고 사회가 진화할수록 그 사회는 도덕적으로 우월해지고 도덕적으로 향상되면 악이 사라질 것으로 봤다. 그가 정부의 명령이나 강압에 의한 개선보다 개인들의 자발성에 의한 개혁을 주장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진화론자로서 스펜서는 국가와 사회발전론이 생명의 진화과정과 같다고 본다. 진화는 다른 사회적 개선과 함께 자연스런 원인에서 서서히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는 “생명체의 번성은 각각의 부분에 각각의 의무를 적절히 할당하는 데 달려있으며, 부분들 간의 필요한 세력 균형은 영양분을 얻으려는 지속적인 경쟁에 의해 이뤄질 뿐 만 아니라, 각 부분에 그것이 일한 만큼 소모된 영양분의 양이 흘러 들어가는 것에 의해서도 이뤄진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사회의 산업 부분 도처에서의 경쟁도 이같은 방식으로 균형을 얻는다고 말한다. 모든 비정부 주도의 협동체에서는 이런 균형 맞추기가 자발적으로 행해진다. 반면, 세금으로 유지되는 정부의 공공 조직은 낭비, 부주의, 폐쇄성 등 관료주의와 비경쟁, 비효율로 온갖 결함이 생겨난다는 지적이다. 과잉입법에 대한 폐해를 지적한 부분은 신랄하다.
120여 년 전에 출간된 책은 여성의 선거권과 권력의 보편성에 다소 부정적 시선과 20세기에 그랬듯이 인종주의와 우생학의 근거가 될 만한 부분이 있음에도, 사회와 국가 발전의 미래상을 내다본 통찰력 뿐 아니라 진화론에 입각한 단순명쾌한 논리는 현대 사회에 실용적 지침을 제공한다.
이윤미 기자/meelee@heraldcor.com
국가 의무의 한계/허버트 스펜서 지음, 이상률 옮김/이른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