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금융위기 소방수 허경욱 태평양 고문…“모든 나라가 바이러스 통제할때까지 버틸 대책·체력 남겨둬야”

위기 때마다 소방수로 나섰던 국제금융맨이자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현역’인 허경욱 태평양 고문은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어찌됐든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느꼈다고 했다. 앞선 금융위기 이후 국제화라는 헤게모니가 다양한 비판에 마주했지만, 필요한 것은 이들 문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라고 강조했다. 이상섭 기자
위기 때마다 소방수로 나섰던 국제금융맨이자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현역’인 허경욱 태평양 고문은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어찌됐든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을 느꼈다고 했다. 앞선 금융위기 이후 국제화라는 헤게모니가 다양한 비판에 마주했지만, 필요한 것은 이들 문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라고 강조했다. 이상섭 기자

1997년 11월. 정부가 외환위기 극복을 위해 국제통화기금(IMF)에 구제금융 지원을 공식 요청한 이후, 재정경제원(현 기획재정부)은 IMF와의 효율적인 협의를 위해 특별 대책반을 설치했다. 반장을 맡은 것이 당시 허경욱 과장. 1988년 사무관 시절 세계은행(World Bank)의 간부 육성 프로그램 ‘영 프로페셔널’을 거치기도 했던 만큼, 국제 협상의 실무를 이끌 적임자로 그만한 이가 없었다.

금융 전문가로서의 역량은 그 뒤로도 차곡차곡 쌓였다. 1999년, 한국 공무원으로서는 1호로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을 취득했고, 이어 200~2004년 IMF로부터 선발돼 선임 이코노미스트로도 근무했다. 2009년에는 기재부 제1차관으로 발탁돼 당시 당면 과제인 금융위기 극복에 일조했다. 차관에서 물러난 뒤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대표부 대사로 근무하며 프랑스 파리에서 또 한 번 눈을 넓혔다.

공직에서 물러난 뒤로는 한국 기업과 금융인들이 보다 국제경쟁력을 갖추는 데 손을 보태고 있다. 기업 사외이사나 국제기구 자문위원, 혹은 법무법인 고문 역을 맡으며 여전히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날마다 새로워짐)의 철학을 지키겠다는 다짐이다.

위기 때마다 소방수로 나섰던 국제금융맨이자 아직도 할 일이 많은 ‘현역’. 그는 바이러스를 타고 또다시 찾아온 10년 만의 위기, 아니 1900년대 이후를 통틀어서도 손꼽힐 ‘대공황급’이라는 오늘날의 위기를 어떻게 진단하고 있을까. 어김없이 급락한 그날의 증시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금융시장이 난리입니다.

“분명 전에 없던, 전혀 예측이 안 되는 복합적 위기입니다. 1997년 외환위기나 2008년 금융위기는 밸런스가 무너진 금융시장이 원인이 되어 시작됐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코로나로 인해 실물과 금융이 함께 흔들리고, 사회적 신뢰까지 같이 무너지고 있어요. 안일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갑자기 ‘7~8월까지 간다’고 하는 등 리더십이 흔들리니까, 증시에 드러나듯 공포가 극대화되잖습니까.”

-어떤 식으로 해결할 수 있을까요.

“우리나라는 여러 부문에서 시스템이 잘 돼있으니 먼저 안정되긴 할 거예요. 하지만 우리만 통제된다고 해결되는 위기가 아니라는 점이 문제죠. 다른 모든 나라가 이겨낼 때까지 우리도 같이 버텨야 하는데, 그 시기에 대응할 대책과 체력을 남겨둬야 합니다. 화살통에 화살을 남겨둬야지.”

허 고문은 건전재정을 강조했다. 전례 없는 위기를 마주하고 있다는 위기 의식은 좋지만, 그 정책이 효과적인지, 그리고 장기전에서도 먹힐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불황이 길어지고, 각 나라별로 신용도에 대한 차별적 접근이 시작될 때에는 재정이 중요한 요소거든요. 물론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2차 추경 편성 등 공격적인 대응도 필요할 거예요. 그런데 실제 그런 대응이 필요할 때 여력이 바닥나 있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끝없이 ‘효율적인가’ 되뇌어야 합니다.”

-과거 위기 때와 달리, 사회적관계망(SNS)으로 인해 심리가 더 위축되는 것 같습니다.

“이코노미스트들이 얘기하는 중요한 위기 극복 요소 중 하나가 ‘트러스트’거든요. 신뢰의 위기는 가짜뉴스로 시작될 수도 있고, 국가 리더십이 원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최근 상황을 보면 공적 기관을 향해 있던 사회적 신뢰가 SNS로 넘어간 모습이예요. 근데 신뢰라는 건 결국 빌드업이 중요하거든. ‘자, 신뢰가 문제니까 이제부터 쌓자’ 이렇게 쌓이는게 아니잖습니까. 이번 위기를 기회로 신뢰 회복을 위한 우리 사회의 많은 고민이 이뤄져야 합니다.”

-과거 위기 극복 과정에 대한 부정적 시각이 있습니다. 론스타의 외환은행 헐값매각 논란을 다룬 영화 ‘블랙머니’나, 외환위기 당시 관료들의 비위 음모론을 다룬 ‘국가부도의 날’ 등이 있었죠. 어떻게 보셨나요.

“영화적 상상은 얼마든지 가능하지만, 실제 위기를 겪어보지 못한 다음 세대들이 그 내용을 사실로 믿을 수 있다는 점은 걱정이 되죠. 위기가 다가오면 심리적으로 속죄양을 찾게 됩니다. 누군가 나쁜 놈이 있어야 심리적 균형을 찾게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에만 머무르면, 우리가 위기를 어떻게 맞게 됐는지 또 어떻게 극복했는지 제대로 배우지 못해요. 그 다음 위기 때 똑같은 고통을 겪는 거죠. 이번에 또 한 번의 위기가 왔고, 이번에는 후대를 위한 자산을 남겨야 합니다.”

이번 코로나 위기에서 허 고문이 느낀 점은 “어찌됐든 우리는 국제사회의 일원”이라는 점이다. 앞선 금융위기 이후 국제화라는 헤게모니가 다양한 비판을 마주했지만, 필요한 것은 이들 문제를 극복하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태도이지 이를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게 허 고문의 생각이다.

로펌이라는 비(非)전공 영역에 고문으로 합류한 것도 결국 한국의 국제적 경쟁력을 높이는 데 손을 보태기 위함이다. 우리나라 기업이 해외로 진출하거나, 혹은 해외 기업이 국내 투자를 검토하는 과정에 빠질 수 없는 것이 로펌이다.

-로펌에서 어떤 일을 도와주고 계신가요.

“기업들은 투자할 때 굉장히 복잡하고 다면적인 문제를 마주하거든요. 그들에게 종합적 솔루션을 만들어주는 로펌의 일에 제가 익숙하게 해온 일이 도움이 됐으면 합니다. 해외 기업이 국내 기업을 인수한다고 가정합시다. 인수할 기업이 자리한 그 국가의 정책결정 과정이 어떠한가, 국내 경제는 어떻게 전망하고 있는가,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해결되는 과정은 어떠한가 궁금하겠지요. 이번 위기랑 연관지어서도, 정부가 위기에 대응하는 한국만의 특징은 무엇인가 등이 중요할 거예요.”

한국이 동남아국 등 경제 후발주자들의 발전에 기여하는 과정에도 허 고문의 손길이 닿는다. 허 고문은 지난 2014년부터 약 4년간 암로(AMRO)의 자문위원을 맡았다. 암로는 아세안(ASEAN·동남아시아국가연합)과 한중일 3국의 경제동향을 점검하기 위해 지난 2011년 싱가포르에 설립된 경제조사기구다. 아시아의 IMF를 표방하고 설립된 지역금융안전망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다자화(CMIM)’의 운용을 지원하고 있다.

“아세안 경제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습니다. 아세안 국가들과 협력하는 과정에서, 기술경쟁력이 높은 일본이나 ‘일대일로(육·해상 실크로드)’를 내세운 중국과는 다른 우리나라만의 강점이 있어야 하잖아요. 그게 한국의 개발 경험입니다. 기재부나 KDI, 수출입은행 등을 통해 다양한 정책컨설팅이 이뤄지고 있어요. 그동안의 제 경험이 이같은 움직임에 도움이 될 수 있으면 합니다.”

김상수·최준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