냉장고·에어컨 ‘두뇌역할’ PBA 공정 24시간 무인체제 구현… 이철 삼성전자 ‘제조기술’ 명장의 혁신·협업론
“생산라인 설비를 자동으로 제어하고 품질 수준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는 PBA 종합관제센터를 구축하는 등 삼성전자의 국내외 PBA 제조 경쟁력 제고에 기여했다. 또, 사람의 손으로 직접 조립하던 냉장고와 에어컨 PBA 공정 등을 자동화해 24시간 무인 생산체제를 구현함으로써, 글로벌 수준의 스마트 공장 구축에 앞장선 명실상부한 제조기술 명장이다.”
올해 ‘명장 제도’를 신설한 삼성전자가 제조기술ㆍ금형ㆍ계측ㆍ설비 분야에서 4명의 명장을 선정하고, ‘제조기술’ 부문에서 명장으로 선정된 생활가전사업부 제조팀 PBA그룹장 이철(54) 명장을 소개한 내용이다.
이공계 출신이 아닌 기자에게는 용어 자체가 생소하다. 더욱이 전기ㆍ전자 분야를 담당한 지 한달도 안 된 기자는 사실상 일반인의 이해 수준과 다를 바 없었다. PBA라는 용어도 낯설고, ‘스마트 공장’이라는 개념도 쉽게 와닿지 않았다. 비전공자로서 이해의 폭이 제한돼 있음에도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쉽게 풀어 설명해 줄 것부터 요청했다.
이 명장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전문용어를 설명해야 한다는 것에 당혹스런 기색이 역력했다. 우선 PBA(Printed Board Assembly)라는 용어부터 설명했다.
가전제품 내부에 회로선이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녹색 기판’으로 알고 있는 PCB(Printed Circuit Board)에 저항이나 집적회로(IC) 등 전자부품을 삽입하거나 장착해 PCB가 가전의 기능을 실제 실행하도록 하는 부품을 말한다. 제품의 기능을 제어하는 핵심부품으로, 사람으로 치면 일종의 두뇌역할을 한다.
이 명장은 개발된 PBA의 품질과 생산적합성을 검토하고, 각종 기계장치를 활용해 이를 제조하는 업무를 맡고 있다.
▶부친의 영향 받아 대학 진학과 삼성 입사까지= 1989년 입사해 30년이 지난 이 명장은 이 분야에서만 24년간 근무하며 PBA 제조 전문가로 회사에서 인정받았다.
30년이나 한 직장에서, 그것도 대부분의 시간을 한 업무에서 일하게 된 계기가 궁금했다.
한국 산업 발전과 기술 개발의 사명감 때문이라는 다소 거창한 대답이 나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이 명장의 대답은 오히려 간단했다.
“직장이란게 특정 부서에 가고 싶다고 다 갈 순 없잖아요. 자리가 있으면 가는 건데, 마침 제조기술 분야에 자리가 있어 갈 수 있었습니다.”
물론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것도 회로와 관련한 업무를 하게 된 이유라고 부연했다.
이 명장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봤다.
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한 그는 “83학번으로 대학에 들어갈 때는 당시 서울대 전자공학과가 의대보다 학력고사 성적이 더 높았다”며 “반도체산업이 각광받으면서 전자공학도는 취직도 쉬웠다”고 전했다.
그럼 전공이 적성에 맞았던 걸까. 딱히 그런 것도 아니다. 3학년 1학기에 ‘권총 차고’(낙제점인 F학점의 ‘F’가 권총과 비슷하게 생겼다 해서 나온 당시 은어) 바로 군에 입대했다. 제대를 앞두고 복학해서 다시 공부할 생각을 하니 갑갑했다. 그래서 요리사가 될까도 생각했다고 한다.
이 명장은 “먹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남들이 내가 해주는 라면 같은 간단한 음식을 맛있게 먹는 걸 보면 그 방면으로 소질이 있는 건 아닌가 혼자 생각했다”며 웃어보였다.
3학년 2학기 복학해 학사경고로 인한 제한학점에 걸려 15학점만 듣다 4학년때 1, 2학기 모두 최대 학점을 수강하는 것도 녹록치 않았다.
그런데 삼성과의 인연은 홀연히 찾아왔다. 이 명장은 “1학기때 삼성이 요즘으로 치면 캠퍼스리크루팅 같은 걸 해서 지원했는데, 운 좋게 졸업 전인 1989년 입사가 결정됐다”고 겸연쩍어했다.
이 명장이 지금의 자리까지 오게 된 이유가 여전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시간을 좀 더 거슬러 오르면 실마리가 잡힐까해서 학창시절에 대해 물었다. 고등학교 당시 이과를 선택하게 된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아버지가 자원공학과를 전공하고 광산쪽 일을 하면서 이 명장도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기계를 접할 기회가 많았다. 아버지는 입버릇처럼 “먹고 살 거 걱정할 때는 공대가 괜찮다”고 하셨고, 공대를 가려면 이과를 선택해야 했다. 공작 도구를 만지는 것에서 재미를 느꼈고, 겨울철에는 대패질도 하고 톱질도 하면서 썰매를 직접 만들어 타기도 했다. 그렇게 고등학교에서 이과를 선택하고 대학 전공을 거쳐 삼성에 입사, 회로 관련 업무에 종사하면서 지금의 명장이 있게됐다. 지난 시간들에 대한 궁금증이 한꺼풀씩 벗겨졌다.
▶본격적인 명장의 길을 걷다= 198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서 그의 진로에서 결정적인 전환점은 1993년 삼성전자에서 분사한 광주전자에 자리를 옮긴 시점이다.
장남이었던 이 명장은 직장으로 부모님과 한번 떨어지면 계속 떨어지내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수원에서 근무하던 중 모집 공고가 난 것을 보고 광주전자에 지원했다. 광주전자가 법인만 다르지 처우는 삼성전자와 똑같았다. 내려가서 처음 한 일은 자판기 부품 구매였다. 원래 개발 파트로 가도록 돼 있었는데, 기술이나 지식이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고 해서 우선 배당받은 업무다.
그러다가 지금의 분야인 제조로 이동했다. 자판기 라인 뿐이었지만 1995년부터 냉장고, 에어컨, 세탁기 라인이 광주로 내려왔다. 지금은 광주 첨단산업단지와 하남산업단지에 약 3000명의 삼성전자 직원이 있지만, 그 때만해도 250명 남짓에 불과하던 때다. 사실상 이때부터 이 명장이 제조기술 분야에서의 경력이 시작된 셈이다. 2011년 광주전자가 삼성전자와 다시 합병하면서 PBA와의 본격적인 인연도 시작됐다. 지금 GTC(글로벌기술센터) 부사장인 장시호 실장이 부서장으로 인사가 났다.
“그 때부터 본격적으로 혁신에 드라이브가 걸렸습니다. 회사생활하면서 가장 정신을 바짝 차리는 계기였죠. 기술적인 백그라운드가 있고, 실무적인 것도 워낙 많이 아시다보니까 직원들이 그 수준을 따라갈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에 대한 생생한 기억이다.
조직 내에서 혁신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처음 3년 정도는 매주 공장 점검이 있었고, 직원들을 독려하면서 나중에는 오기까지 생겼다고 한다. 부족한 부분, 개선이 필요한 부분을 하나씩 제거해 가면서 실제 성과물이 나오면서 자신이 시나브로 성장하는 계기가 됐다.
▶동료는 힘…목표는 높게= 이 명장도 항상 장족의 발전을 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일 자체가 힘들 때도 있었지만 재미있다고 생각하고 진행한 경우가 더 많았다”면서도 “회사를 다니다보면 어느 순간 계속 이 일을 해야하나 싶은 순간이 찾아온다. 다른 걸 찾아야할 때인가보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고 속내를 털어놨다. 그 때도 옆을 지켜 준 동료들이 힘이 됐다. ‘혁신’이라는 광풍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주위에 있는 선후배와 동료들가 함께 과제를 하나씩 해결하는 것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기쁨이었다.
그래서 이 명장은 자신과 같은 명장의 길을 걷고 있는 후배들에게 조언한다.
“우리가 못 찾는 것이지 어딘가에 솔루션(해법)은 항상 있습니다. 사실 2013년부터 지금까지 해결하려는 과제가 있는데 아직 풀지 못하고 있죠.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같이 머리를 맞대면 언젠가는 풀릴 것이라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명장은 “내가 모르는 분야는 그 분야에 정통한 다른 동료와 얘기하다 보면 새로운 정보를 얻고 실마리가 잡히는 경우가 많다”며 “포기하지 말고 여러 소스를 찾아보고 관심을 계속 유지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이 명장은 또 “목표를 잡으면 내일모레 달성할 수준이 아니라 그보다 높게 잡는 게 중요하다”면서 “물론 중간에 포기할 수도 있고, 실제로 7~8년이 지나도 결론이 안 나기도 하지만 결국 다 해결이 된다”고 강조했다.
가족에 대해서도 물었다. 직장생활을 하는 아들과 대학생 딸은 둔 그는 우선 미안함이 앞선다고 했다. 생산 라인에 있다보니 비교적 근무시간이 규칙적이긴 했지만, 주중에 동료들과 주 5일 저녁자리를 갖는 게 다반사였다. 약속이 없는 날이나 주말에는 혼자 운동을 하면서 보냈다. 아들과 가끔 자전거를 타는 게 고작이었다고 한다.
명장이 됐을 때 가장 기뻐했던 아내가 최근 그에게 말했다. “당신이 참 열심히 살긴 했는데, 앞으론 우리를 위해서 살자”라고. 그런 아내에게 그는 꼭 말하고 싶다고 했다. “‘못 간게 아니라 안 갔던’ 여행을 이제부터라도 같이 갑시다.”
이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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