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BS ‘닥터 X:하얀 마피아의 시대’ 파장
5·18 피해자와 전두환 추정 전 대통령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모든 게 다 내 잘못이다. 죽는 건 편한 것 같으니 이렇게 아프게 사는 걸로 값을 치르고 싶다.” (‘닥터 X:하얀 마피아의 시대’ 6화 대사 중)
1980년 5월 광주에서 머리에 총상을 입은 오상범(하성광 분)은 46년째 총알 파편을 머릿속에 지닌 채 살아간다. 경련과 발작, 두통이 끊이지 않았고 환상과 환청도 따라붙었다. 그날 함께 있던 형의 시신은 끝내 찾지 못했다. 형을 잃은 죄책감에 오상범은 세상과 담을 쌓았고, 치료마저 거부해 왔다.
SBS 금토드라마 ‘닥터X : 하얀 마피아의 시대’(이하 ‘닥터X’)가 지난 24일 방송된 6회에서 꺼내 든 이야기다. 천재 외과의의 통쾌한 수술극을 내세워 온 의학드라마가 5·18민주화운동을 정면으로 불러내자 시청자 반응이 크게 엇갈렸다. 방송 당일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방영 중단을 요구하는 청원이 올라왔고, 이튿날에는 작품 팬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제작진의 설명을 요구하는 성명문이 게시됐다.
‘닥터X’는 일본 TV아사히의 인기 시리즈 ‘닥터X~외과의 다이몬 미치코~’를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의사 용역 소개소에서 파견된 외과의 계수정(김지원 분)이 오직 수술 실력으로 대학병원의 부조리를 깨부수는 이야기다. 첫 회 11.4%(닐슨코리아 전국 기준)로 출발해 5·18 서사를 다룬 6회에서 19.5%까지 시청률을 끌어올렸다.
머릿속 총알, 그리고 ‘전 대통령’
6회의 중심에는 구서대병원 분원을 찾아온 ‘목련회’ 임원들의 부탁을 가장한 강제 주문이 놓였다. 5·18 피해자인 오상범의 머릿속 총알을 병원에서 제거하라는 요청이었다. 수술이 잘못되면 환자가 숨지거나 식물인간이 될 수 있었고, 제대로 된 검사 자료조차 없었다. 모든 의사들이 몸을 사리는 사이 계수정은 집도를 자청했다. 극 중 오상범의 머릿속 총탄은 1980년 5월 광주에서 헬기 사격이 있었다는 증거이자 사료로 거론됐다.
수술을 앞두고 변수가 생겼다. 오상범이 세상을 떠난 형의 환영을 보며 지내 왔던 것이다. 계수정은 수술을 받으면 환각과 발작이 줄면서 형의 모습을 볼 가능성도 함께 줄어든다고 알렸다. 오상범은 형을 잃고 싶지 않다며 수술을 포기했다. 계수정은 결정을 재촉하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닥터X’는 그간 첫 장면을 계수정의 과거를 비췄던 것처럼 이날 역시 그의 과거사를 비췄다. 반군 치료의로 해외 의료 현장에 있을 당시를 회상하는 장면이다. 외국 군인에게 목이 졸려 죽을 고비를 맞았을 때, 한 아이가 다가와 “당신이 닥터X냐. 당신만이 내 형제를 구해 줄 수 있다고 들었다”며 매달렸던 기억이다. 형제를 살려 달라던 아이의 절박함은 형을 잃은 오상범의 사연과 겹쳐지도록 짜였다.
두 갈래 이야기는 엔딩에서 한 병원으로 모였다. 오상범이 병원 옥상 난간에 올라선 그 시각, 지두석 전 대통령이 의식을 잃은 채 헬기에 실려 구서대병원으로 들어왔다. 지두석은 민머리 외모에 1980년 5월과 얽힌 과거를 지닌 가상의 인물로, 극 전개상 전두환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 5·18 피해자와 그 비극의 책임자로 그려진 인물이 같은 병원에 놓인 것이다. 계수정은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내달렸다.
방영 중단 청원과 팬들의 성명
반응은 방송 직후부터 쏟아졌다. 일부 시청자는 의학드라마가 갑자기 역사·정치 서사로 무게중심을 옮겼다며 당혹감을 드러냈다. 극 중 오상범을 찾아가는 장면에 나온 버스 번호가 ‘518’이었다는 글이 커뮤니티에 퍼졌고, 1~5회의 빠른 전개와 달리 한 회의 대부분을 5·18 이야기에 할애했다는 지적도 잇따랐다. 일본 원작에는 없는 설정이라는 점을 문제 삼는 목소리도 컸다.
그런가 하면 수십 년이 흘러도 몸과 기억의 상처에서 벗어나지 못한 피해자의 삶을 의학드라마의 틀 안에서 비춘 시도에 의미를 두는 반응이 나왔다. 일부 게시판엔 작가의 출신 지역을 추측하는 글까지 올라왔다.
국회 국민동의청원 게시판에는 ‘SBS 닥터X 드라마 방영중단에 관한 청원’이 올라왔다. 청원인은 “5.18이 우리의 아픈 역사라는 점을 잘 알고 있고 이를 부정할 생각도 없다”면서도 “세부적인 부분에서 정치적 논쟁이 있는 5.18을 뜬금없이 드라마에 활용하는 것을 납득하기 어렵다”고 적었다. 이어 “닥터X는 정치와 전혀 연관성이 없는 의사 드라마”라며 “원작인 일본 드라마에선 의사의 개인적인 능력을 중점으로 두고 관련 내용은 전혀 나오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청원은 하루 만에 공개 전 찬성 요건인 100명을 넘겨 국회의 공개 여부 검토 단계에 들어갔다. 검토에는 최대 7일이 걸린다. 공개되더라도 30일 안에 5만 명의 동의를 얻어야 소관 상임위원회로 넘어간다. 5·18민주화운동은 1997년 국가기념일로 지정됐고, 2021년부터는 개정된 5·18민주화운동 특별법에 따라 관련 허위사실 유포가 처벌 대상이 됐다.
제작진 쪽에서는 짧은 문구 하나가 나왔다. 제작사 스튜디오S의 이옥규 책임프로듀서(CP)는 6회 방송 당일 자신의 SNS에 드라마 포스터와 함께 ‘노 피어(no fear)’(두려움 없다)라는 글을 올렸다. 이옥규 CP는 이 문구에 별도의 설명을 붙이지 않았다.
디시인사이드 ‘닥터X-하얀 마피아의 시대’ 마이너 갤러리엔 25일 ‘SBS ‘닥터X’ 제작진은 6화 5·18 민주화운동 소재의 각색·연출 경위를 명확히 설명하라’는 제목의 성명문이 올라왔다. 갤러리에 모인 시청자 반응과 문제 제기를 취합해 작성했다고 밝힌 이 글은 ‘닥터X-하얀 마피아의 시대 갤러리 일동’ 명의로 게시됐다.
성명문은 “5·18의 역사적 의미와 피해자·유족의 존엄을 존중한다”며 “문제는 이 역사적 소재를 의료드라마에 결합한 방식이 충분히 설득력 있었느냐는 것”이라고 짚었다. 1~5회 내내 환자 치료와 수술을 축으로 병원 권력에 맞서던 이야기가 6회에서 총탄과 헬기 사격, 지두석의 등장으로 무게중심을 크게 옮겼다는 지적이다. 건조하고 직설적이던 계수정이 감정적 갈등의 한복판에 서는 과정이 자연스러웠는지도 물었다. 총상과 가족의 상실, 헬기 사격 장면이 생존자와 유족에게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게 할 수 있다는 우려도 담았다.
갤러리 이용자들은 SBS와 제작진에 세 가지 설명을 요구했다. 5·18 소재와 가상의 전직 대통령을 등장시킨 이유와 이 설정이 의료 서사에서 맡는 역할, 6회에서 달라진 계수정의 감정 표현과 행동이 기존 성격과 어떻게 이어지는지, 역사적 사실을 재현하며 5·18 생존자와 유족에게 미칠 영향을 어떻게 검토했는지다. ‘no fear’ 게시물을 두고는 “6화에 대한 비판을 겨냥한 것인지는 확인되지 않았다”면서도 각색 경위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우리는 역사적 소재의 사용 자체를 반대하거나 제작진의 정치적 의도를 단정하지 않는다. 작품을 아끼는 시청자로서 제기하는 질문에 구체적이고 책임 있게 답할 것을 요청한다”고 했다.
SBS와 제작진은 25일 오후까지 6회를 둘러싼 논란에 공식 입장을 내지 않았다.
shee@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