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김주리 기자] 한국전력공사가 19조원에 달하는 사채 발행 한도 초과 위기에 직면했다. 대기업에 향후 5년 치 전기요금을 미리 납부해 달라고 요청할 만큼 자금 확보에 어려움을 겪는 가운데, 내년 말 채권 발행 한도를 확대한 특례까지 종료된다. 반도체와 인공지능(AI) 산업에 필요한 전력망 구축에는 70조원 이상이 투입될 예정이어서 전기요금 인상 압력이 커지고 있다.
24일 한국전력과 국회예산정책처에 따르면 한전이 현재의 사채 발행 규모를 유지할 경우 2027년 말 발행 잔액이 76조원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됐다. 이듬해부터 적용되는 법정 한도를 19조원 이상 웃도는 수준이다.
한전은 수익성 악화와 대규모 설비 투자에 따른 자금 부족을 해소하기 위해 전기요금 인상과 추가 차입, 재무구조 개선 등을 검토하고 있다.
사채 한도 5배에서 2배로…2028년 19조원 초과 전망
한전의 자금 조달에 가장 큰 부담은 사채 발행 한도를 일시적으로 늘려준 특례가 2027년 말 종료된다는 점이다.
정부는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국제 에너지 가격이 급등하자 한국전력공사법을 개정해 사채 발행 한도를 확대했다. 당시 한전은 연료비 상승분을 전기요금에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면서 막대한 적자를 기록했다.
이에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액의 2배였던 사채 발행 한도를 최대 5배까지 높여 자금 조달 여력을 확보하도록 했다.
그러나 한시적으로 확대된 한도가 2028년부터 다시 2배로 축소되면서 문제가 불거졌다.
국회예산정책처가 한전의 ‘2026~2030년 중장기재무관리계획’을 분석한 결과, 내년 말 한전의 자본금과 적립금 합계액은 28조4177억원으로 추산됐다.
기존 한도인 2배를 적용하면 사채 발행 가능 금액은 56조8354억원이다. 같은 시점 예상되는 사채 발행 잔액은 76조489억원으로, 법정 한도보다 19조2135억원 많다.
올해 상반기 기준 한전의 사채 발행 잔액은 이미 71조5000억원에 달한다.
특례 종료에 대비하려면 채무를 상환하거나 이익을 쌓아 자본 규모를 늘려야 한다. 발행 한도를 초과한 상태에서는 신규 사채를 통한 자금 조달에도 제약이 발생할 수 있다.
전기요금 조정 없이 차입에 의존해 적자를 메워온 구조가 특례 종료를 앞두고 한계에 직면했다는 분석이다.
영업이익 52% 급감 전망…삼성·SK ‘25조 선납’도 무산
한전의 실적 전망도 밝지 않다. 중동 지역 분쟁으로 액화천연가스(LNG) 등 국제 연료 가격이 상승하면서 발전 비용 부담이 커지고 있다.
연합인포맥스가 최근 증권사들의 실적 전망을 집계한 결과, 한전의 올해 3분기 영업이익은 2조6966억원으로 전년 동기보다 52.29% 감소할 것으로 예상됐다.
같은 기간 매출은 27조6057억원으로 0.12% 증가하는 데 그칠 전망이다.
4분기에는 수익성이 더욱 악화할 것으로 관측됐다. 예상 영업이익은 823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95.78% 감소하고, 당기순손실은 4930억원에 이를 것으로 추정됐다.
영업활동에서 이익을 거두더라도 누적된 채무에 따른 이자 비용이 순이익을 잠식하는 상황이다.
전기요금 정책도 변수로 떠올랐다. 정부가 추진 중인 지역별 차등요금제에 따라 비수도권 일부 지역의 산업용 전기요금이 내려가면 한전의 전력 판매 수입이 감소할 수 있다.
자금 확보를 위해 추진한 대기업 전기요금 선납 방안도 성사되지 않았다.
한전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에 2027년부터 2031년까지 5년간 사용할 전기요금 약 25조원을 미리 납부해 달라고 요청했다. 향후 발생할 전력 판매 수입을 앞당겨 확보해 전력망 건설 등에 필요한 투자 재원으로 활용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두 기업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계획은 무산됐다.
김동철 한전 사장은 지난 19일 국회 기후에너지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해당 요청에 대해 “재원 조달 다각화 차원”이었다고 설명했다.
한전은 추가 차입과 비용 절감 등 자구책도 검토하고 있지만, 채무 부담을 낮추면서 신규 투자 재원까지 확보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AI·반도체 전력망에 73조원…한전 사장 “전기요금 인상 논의해야”
재무 부담이 가중되는 상황에서도 전력망 구축에 필요한 투자 규모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한전이 마련한 제11차 장기 송·변전설비계획에 따르면 2038년까지 전력망 확충에 투입되는 금액은 72조8000억원에 달한다. 2년 전 계획보다 16조3000억원 늘어난 규모다.
대규모 반도체 산업단지와 AI 데이터센터 등이 잇따라 조성되면서 전력 수요가 집중되는 지역에 새로운 송전선로와 변전시설을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반도체 메가클러스터를 비롯한 첨단산업 시설은 막대한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받을 수 있는 인프라가 필수적이다. 전력망 건설 일정이 늦어지면 관련 산업시설의 가동에도 영향을 줄 수 있다.
한전은 급증하는 투자 수요를 감당하기 위해 전기요금 조정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김 사장은 지난 19일 국정감사에서 “기본적으로 필요한 전력망 투자가 계속해서 급격하게 증가를 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와 최소한의 전기요금 인상은 논의를 해야 된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전력망 확충을 한전의 외부 차입에만 의존하기 어려운 만큼 필요한 비용의 일부를 전기요금에 반영해야 한다는 취지다.
다만 김 사장은 당시 정부와 구체적인 인상 방안을 협의하지는 않았다고 설명했다.
전기요금 인상 외에 사채 발행 한도 특례를 추가로 연장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김상인·차주희 신한투자증권 연구원은 내년 말 예상 사채 잔액 가운데 약 19조2000억원을 상환하거나 그에 상응하는 자본을 확충해야 하지만 현재 뚜렷한 방안이 마련되지 않았다고 분석했다.
이들은 정부가 물가 부담 등을 고려해 전기요금 인상에 나서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사채 발행 한도 정상화 시점을 추가로 유예하는 방안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봤다.
한전은 앞으로 1년여 동안 채무 부담을 줄이는 동시에 대규모 전력망 투자 재원도 마련해야 한다. 정부가 전기요금을 조정할지, 사채 발행 특례를 다시 연장할지에 따라 한전의 자금 조달 계획과 첨단산업 전력망 구축 일정에도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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