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8년 헝가리 가격표에 ‘최고 몸값’
당시 달러 추정...현재 약 5400만원
파데레프스키와 공동 1위 오른 스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클래식 음악계에도 슈퍼스타는 존재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작곡가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자랑인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1873~1943)의 출연료는 얼마였을까. 그는 지금도 과거에도 스타였다.
미국 아주사 퍼시픽 대학의 지휘과 교수인 크리스토퍼 러셀이 발굴하고 영국 클래식 전문 매체 슬립디스크가 공개한 1928년 헝가리 콘서트 시즌의 아티스트 개런티 목록이 공개됐다.
이 자료에서 공개한 작곡가, 연주자는 총 --명.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를 필두로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 바이올리니스트 야샤 하이페츠,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벨라 바르토크 등이 이름을 올렸다.
해당 목록에 기록된 숫자 중 가장 높은 액수는 ‘2000’. 러시아 후기 낭만주의의 거목 라흐마니노프와 폴란드 총리를 지낸 피아니스트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가 나란히 2,000을 기록하며 최고 몸값을 자랑했다.
야샤 하이페츠와 파블로 카잘스가 1500으로 그 뒤를 이었고, 당대 최고의 명지휘자로 꼽히던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는 500에 머물렀다. 20세기 위대한 작곡가로 꼽히는 벨라 버르토크는 최고액의 8분의 1에 불과한 250에 그쳤다.
문서에 적힌 숫자의 통화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원문에선 이를 미국 달러일 가능성을 전제로 공개한다. 여기에 2026년 미국 소비자물가지수를 적용하면, 1928년 1달러의 구매력은 약 19.53달러로 계산된다.
라흐마니노프와 파데레프스키가 받은 2000달러는 현재 약 3만9060달러로, 한화 기준으로는 약 5380만원이다. 라흐마니노프의 1회 연주료는 5380만원 수준이었다는 것이다. 1500달러는 약 4040만원, 500달러는 약 1350만원, 250은 약 670만원에 해당한다.
클래식 음악계에 따르면 현재 국내외 최고 연주자들의 출연료는 이미 1억원을 넘어섰다. 라흐마니노프가 받은 출연료 5000만원은 현대 공연계의 실제 개런티와 직접 비교는 다소 어렵다. 당시의 공연 제작비, 티켓 가격, 세금, 매니지먼트 비용 등이 지금과는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1928년 클래식 음악 시장에서 정상급 연주자는 ‘스타 산업’으로 분류돼 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1928년 3월 ‘타임’(TIME)은 당시 음악산업을 다룬 기사에서 파데레프스키, 라흐마니노프, 요제프 레빈, 하이페츠 등을 ‘A급 흥행 카드’로 분류했다. 당시 미국에서 음악에 쓰이는 돈이 연간 2000만 달러에 달한다는 추산도 소개했다. 이 가운데 개인 연주자와 여름 음악회 등에 배정되는 돈만 상당한 규모였다. 특히 파데레프스키의 경우 2년간 콘서트 수입을 100만 달러로 추산한 보고서까지 소개됐다.
헝가리 콘서트 출연료가 1928년 기준이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 시기 라흐마니노프는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명성이 높았다.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사실상 러시아를 떠나 서방에서 활동했고, 1920년대에는 피아니스트로서의 활동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927~28년 시즌에서 라흐마니노프는 북미와 유럽을 오가며 공연했고, 1928년에는 뉴욕 카네기홀, 런던 퀸스홀, 코펜하겐, 베를린 등에서 연주했다. 1928년 3월 31일 카네기홀 독주회가 있었고, 4월 22일에는 러시아 전쟁 부상자들을 위한 자선공연으로 다시 카네기홀 무대에 섰다. 후자의 공연은 4635달러~6000달러 이상을 모금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미 당대의 스타 음악가였던 것이다.
라흐마니노프와 같은 2000달러를 받은 이그나치 얀 파데레프스키(1860~1941)의 경우는 더 독특하다.
그는 단순한 피아니스트가 아니었다. 폴란드의 정치가이자 훗날 총리를 지낸 인물로, 음악가와 정치적 상징이라는 두 개의 이미지를 동시에 갖고 있었다.
‘타임’은 그를 미국 음악시장의 최상급 흥행 카드로 꼽았고, 같은 해 ‘뉴요커’(The New Yorker)는 그의 미국 투어를 따라다니며 그가 50회 공연 투어를 진행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당시 그의 공연은 단순한 음악 행사가 아니라 대중적 관심을 끄는 ‘사회적 이벤트’였다.
1928년 스위스 로잔 공연에서도 그의 스타성과 위상이 드러난다. 당시 공연 프로그램에는 관객에게 그가 입장할 때 자리에서 일어나 존경과 감사를 표해달라는 안내가 들어갔다. 박물관 측은 이를 당시 그가 받은 엄청난 존경의 증거라고 설명한다.
야사 하이페츠(1901~1987)는 이 기록이 증명하는 최연소 슈퍼스타였다. 그의 몸값을 설명하는 핵심에는 음반 산업이 있다. 하이페츠는 1917년 고작 16세에 빅터(Victor)와 녹음을 시작했고, 그의 음반은 무대에 등장하기 전부터 전 세계 청중에게 이름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영국에선 1920년 런던 데뷔 공연이 열리기 전에 이미 그의 음반이 약 7만 장 팔려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활동 범위도 압도적이었다. 1926년에는 네덜란드·독일·헝가리·오스트리아·프랑스·스페인·이탈리아·이집트·팔레스타인·스칸디나비아 등을 도는 세계 투어를 진행했고, 1927년에는 인도·싱가포르·중국·필리핀·호주·미국·멕시코까지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28년에도 스위스·터키·루마니아·그리스에서 첫 공연을 열었다.
파블로 카잘스(1876~1973)는 ‘첼로의 표준’을 만든 거장이었다. 그는 첼로의 현대적 연주법과 해석을 혁신한 인물이었고, 1920년대에는 독주자이면서 지휘자, 오케스트라 창립자, 실내악 연주자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27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베토벤 서거 100주년을 기념하는 음악제도 조직했다. 같은 시기 코르토-티보-카잘스 트리오로 투어를 이어갔다. 1928년 2월 26일에는 뉴욕 타운홀에서 미국 독주자로서 마지막 공연을 열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최고의 지휘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푸르트벵글러(1886~1954)가 500달러의 출연료에 그쳤다는 점이다.
그는 1922년 아르투어 니키시의 뒤를 이어 베를린 필하모닉의 수석지휘자가 됐고, 이미 당시 독일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평가받고 있었다. 1925~27년에는 뉴욕 필하모닉에서도 객원 지휘를 했으며, 1928년에는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와의 협업을 정리하고 빈 필하모닉과의 활동을 강화했다.
당시 음악계가 단독 투어가 가능한 솔리스트에게 거액의 개런티가 집중됐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으로 추정된다.
가장 놀라운 이름은 역시 버르토크(1881~1945)다. 20세기 음악사를 대표하는 작곡가인 그의 출연료는 250달러로, 라흐마니노프와 파데레프스키의 8분의 1이다. 헝가리 출신인 버르토크는 1920년대 후반 고국에서보다 국제적인 연주 활동을 적극적으로 확대 중이었다. 옥스퍼드대학 자료에 따르면 1920년대 그의 콘서트 활동이 국제적 규모로 확대, 1927년 말부터 1928년 초까지 미국을 횡단하는 투어를 성공적으로 진행했고, 뉴욕·필라델피아·샌프란시스코·로스앤젤레스·시애틀·시카고 등에서 연주했다. 그럼에도 정작 고국에서의 출연료는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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