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년 전 ‘2% 물가’ 위해 대규모 금융완화 시작
금리 1%에도 엔화 164엔선 육박…40년 최저 수준
엔저·고유가 겹치며 기업 가격전가 속도도 빨라져
시장, 10월까지 추가 금리인상 가능성 72% 반영
[헤럴드경제=서지연 기자] “물가를 2%까지 올려라.”
13년 전 일본은행(BOJ)에 떨어진 최대 과제였다. 장기 디플레이션(물가하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중에 막대한 돈을 풀고, 그래도 물가가 오르지 않자 마이너스 금리까지 도입했다. 일본 경제에서 ‘물가가 오르는 세상’을 만드는 데 10년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이제 BOJ의 고민이 정반대로 바뀌고 있다. 엔화 가치가 40년 만의 최저 수준까지 떨어진 데다 중동발 고유가까지 겹치면서 수입물가가 다시 뛸 위험이 커졌기 때문이다. 기업들이 높아진 비용을 소비자가격에 전가하는 속도마저 과거보다 빨라지면서 BOJ 내부에서는 이제 물가를 끌어올리는 것보다 2% 부근에서 안정시키는 것이 중요해졌다는 인식이 확산하고 있다.
오는 30~31일 열리는 BOJ 금융정책결정회의에서는 기준금리를 현행 1%로 동결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 시장의 관심은 이미 ‘다음 0.25%포인트’로 옮겨갔다. 엔저발 물가 압력이 지속될 경우 당초 12월께로 예상됐던 추가 금리 인상이 10월 이전으로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전망이 커지고 있다.
2년이면 된다던 ‘2% 물가’…13년 걸려 뒤집힌 BOJ 고민
BOJ가 2% 물가안정 목표를 공식적으로 도입한 것은 2013년 1월이다. 당시 일본은 오랜 기간 지속된 디플레이션과 저성장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취임한 구로다 하루히코 당시 BOJ 총재는 ‘이차원 금융완화’로 불린 양적·질적 금융완화(QQE)를 시작했다. 2% 물가 목표를 약 2년 안에 달성한다는 목표 아래 국채 등을 대규모로 사들이고 본원통화를 연간 60조~70조엔씩 늘리는 전례 없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2년 안에 끝내겠다던 디플레이션과의 싸움은 10년 넘게 이어졌다.
BOJ는 2016년 기준금리를 마이너스(-) 0.1%까지 낮췄다. 같은 해에는 10년물 국채금리를 사실상 통제하는 수익률곡선통제(YCC)까지 도입했다. 기업과 가계가 돈을 쓰도록 유도해 임금과 물가가 함께 오르는 선순환을 만들어내기 위해서였다.
전환점은 코로나19 이후 찾아왔다. 글로벌 공급망 혼란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원자재 가격이 급등했고 일본에서도 물가가 오르기 시작했다. 이후 임금 상승까지 확산하면서 BOJ는 지난해부터 본격적인 통화정책 정상화에 들어갔다.
지난달에는 기준금리를 0.75%에서 1%로 올렸다. 1995년 이후 31년 만의 최고 수준이다. 그런데 금리를 올렸는데도 엔화는 반대로 움직였다.
엔화는 지난 24일 달러당 163.98엔까지 밀리며 1986년 11월 이후 약 40년 만의 최저 수준을 기록했다. 25일 오후 3시40분에도 달러당 163.94엔을 나타내며 164엔선에 바짝 다가섰다.
BOJ가 걱정하는 것은 엔·달러 환율 숫자 자체보다 엔저가 물가로 번지는 경로다.
일본은 원유와 천연가스 등 에너지의 대부분을 수입한다. 엔화 가치가 떨어질수록 같은 양의 원유를 들여와도 일본 기업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은 늘어난다.
여기에 이란 분쟁으로 국제유가까지 뛰었다. 일본 입장에서는 달러로 표시되는 원유가격 상승과 엔화 가치 하락을 동시에 맞는 셈이다.
실제로 6월 일본의 원유 수입량은 전년 동월보다 13.7% 감소했지만 원유 수입액은 59.3% 급증했다. 전체 수입액도 11조3000억엔으로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일본이 원유를 더 많이 사서가 아니라 가격 상승과 엔저가 수입 청구서를 키운 것이다.
더 큰 변화는 기업들의 대응이다. 일본 정부가 지난 24일 발표한 경제백서에 따르면 최근 중동 분쟁 이후 일본 기업들이 원가 상승분을 소비자가격에 전가하는 속도는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당시보다 빨라진 것으로 나타났다.
오랫동안 디플레이션에 시달린 일본에서는 기업들이 원가가 오르더라도 소비자 이탈을 우려해 가격을 올리지 않는 경향이 강했다. 원자재 가격이 상승해도 기업이 비용을 떠안으면서 최종 소비자물가까지 전달되는 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최근에는 이 공식이 깨지고 있다. 수년간 물가와 임금이 함께 오르면서 기업들이 가격을 인상하는 데 대한 심리적 장벽이 낮아졌다. 원가가 오르면 판매가격을 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제로 일본이 바뀌고 있다는 의미다.
BOJ에는 양날의 검이다. 오랫동안 원했던 ‘물가가 오르는 경제’가 만들어졌지만 이제 엔저나 유가 급등 같은 외부 충격까지 소비자가격으로 빠르게 전달될 수 있기 때문이다.
엔저→수입물가→소비자가격…‘1.25%’ 시계 빨라지나
현재 소비자물가만 놓고 보면 일본에 심각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일본의 6월 신선식품을 제외한 근원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1.6% 상승했다. BOJ의 2% 목표를 5개월 연속 밑돌았다.
하지만 생산 단계에서는 다른 신호가 나오고 있다. 같은 달 기업 간 거래가격을 보여주는 도매물가는 전년 동월 대비 7.1% 올라 2023년 3월 이후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BOJ로서는 지금의 1.6%보다 앞으로의 물가를 봐야 하는 상황이다. 엔저와 고유가로 생산 단계에서 쌓인 비용이 기업들의 빨라진 가격 전가를 통해 소비자가격으로 넘어오면 물가 흐름이 빠르게 달라질 수 있어서다.
일부 BOJ 관계자들이 기조적인 물가상승률이 2%에 접근하면서 중앙은행의 역할도 바뀌어야 한다고 보는 이유다.
과거 BOJ의 최대 위험은 물가가 다시 떨어지는 것이었다. 금리를 아무리 낮춰도 기업이 투자하지 않고, 임금이 오르지 않으며, 소비자들이 오늘보다 내일 물건이 더 싸질 것이라고 생각해 소비를 미루는 디플레이션 악순환을 끊어야 했다.
이제는 반대편 위험도 관리해야 한다. 엔화 약세와 국제유가 상승이 겹친 상황에서 기업들의 가격 전가까지 빨라지면 물가가 BOJ의 예상보다 빠르게 상승할 수 있다.
금융시장도 BOJ의 이런 변화를 선반영하기 시작했다. 시장에서는 당초 BOJ가 약 6개월 간격으로 금리를 인상할 것으로 예상했다. 블룸버그가 지난달 금리 인상에 앞서 실시한 조사에서도 경제학자의 약 70%가 이 같은 경로를 전망했다. 이에 따르면 다음 금리 인상 시점은 12월께다.
하지만 엔화가 164엔선에 육박하면서 계산이 달라졌다. 오버나이트 인덱스 스와프(OIS) 시장은 BOJ가 10월까지 추가 금리 인상에 나설 가능성을 약 72% 반영하고 있다. 1.25% 금리가 예상보다 빨리 올 수 있다는 것이다.
미국도 BOJ의 통화정책 정상화에 힘을 싣고 있다.
미 재무부는 지난 23일 발표한 반기 환율보고서에서 일본을 환율 관찰대상국으로 유지하면서 엔화 약세를 상세히 지적했다. 엔화는 2011년 말부터 올해 4월 말까지 실질실효환율과 달러 대비 기준으로 모두 51% 절하됐다.
특히 미 재무부는 “미·일 금리 차이가 좁혀졌음에도 엔화 약세가 지속됐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BOJ의 통화정책 정상화가 기대 인플레이션을 안정시키고 과도한 환율 변동성을 완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sjy@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