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민주화운동 정신의 헌법전문 명기는 단순히 사건사뿐 아니라 그 정신을 헌법의 기둥으로 삼는 절차로서 의미가 크다. 1980년 5월 18일부터 27일까지 광주에서 일반시민과 청년 학생들이 신군부 내란에 결사 항전한 힘은 동지애와 연대의 공화주의 정신이었다.
1980년 5월 광주에서는 계엄군의 박달나무 몽둥이 폭행과 무차별 발포가 난무했다. 이에 굴하지 않은 시위대와 무장 시민군의 목숨 건 투쟁이 이어졌다. 계엄군의 비인간적 잔혹 행위 속에서도 시위대 구성원의 인간적 동지애와 연대 의식이 피어났다. 그 바탕 위에 어느 다른 나라 시민혁명에서 볼 수 없는 자치공동체가 운영됐다. 항쟁지도부와 시민군은 관공서, 경찰서, 은행 등 주요 시설물에 경비조를 배치했으며 차량 통행증과 유류보급증을 발부해 시민들의 통행을 보호했다.
죽음을 앞에 둔 항쟁에서 “죽음의 행진”으로 기록된 동료 구성원 간 상호신뢰와 살신성인의 실천 또한 5·18 정신의 주요 내용이다. 5월 26일 새벽 5시 반, 탱크를 앞세운 20사단 병력이 광주 시내로 진격해 왔다. 전남도청에 항쟁 사수대가 꾸려졌고 수습 대책위 긴급회의가 열렸다. “우리 어른들이 방패가 됩시다. 전차 앞에 나서도 죽고 여기 있어도 죽을 것입니다.” 재야의 원로 수습 위원 17명 전원이 찬동해서 탱크 앞에 서기로 했다. 탱크 앞까지 4㎞ 이상 걷는 “죽음의 행진”이 결행됐고 그 뒤를 시민 수백명이 따랐다. 공동체적 동지애로 뭉친 연대감 없이는 불가능한 죽음의 동행이었다. 탱크부대 지휘부와 마주 선 수습 위원들은 협상하기 위해 탱크를 전날 밤의 위치로 후퇴시키라고 요구했다. 고위장성의 명령으로 탱크는 물러났다. 시민군의 발포 사과 요구와 계엄군의 무기 환수 문제로 협상은 결국 결렬됐지만 재야 원로들의 살신성인이 돋보이는 항쟁 정신이었다.
5월 27일 새벽, 3공수여단의 진압 작전이 본격화한 가운데 항쟁의 ‘마지막 불꽃’이라 불리는 도청 사수의 시간에 한 청년이 외쳤다. “고등학생들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민주주의와 민족 통일의 미래를 위해서 고등학생들은 살아 남아야 한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외침이었다. 상호 우애와 연대 의식의 5·18 정신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헌법 정신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민주 공화주의라 할 수 있다. 주권의 소재가 군주나 귀족이 아니라 국민에게 있다는 공화주의와 주권의 행사 방식을 대의제와 3권분립 등으로 한다는 민주주의가 결합한 헌법이다. 그 뿌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장이다. 여기서 특히 공화주의는 나라를 일본에 넘긴 왕실과 사대부가 아니라 3·1운동의 시위군중에 내재한 동지애와 연대 의식으로 형성됐다. 무자비한 일본 군경이 휘두르는 총검 앞에서도 만세 시위가 꺾이지 않은 것은 시위대 구성원 간 상호신뢰와 동지애가 큰 동력이었다.
바로 5·18 정신의 공화주의가 그 동일 선상에 있는 것이다. 5·18 정신은 또한 민주 헌정을 수호하기 위해 내란 세력에 항거한 것으로 4·19혁명과 동질적이다. 3.1운동 및 4·19혁명과 정신사적 동일 선상에 있는 5·18 정신을 헌법전문에 함께 명기함으로써 민주 헌정사에 부응하는 한편 미래세대에 전수하여 지속 가능한 국가공동체 발전의 밑돌을 견고히 하는 길이 열릴 것이다.
김재홍 서울미디어대학원대 석좌교수 ESG실천국민연대 상임의장 (전 서울디지털대 총장)
pooh@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