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편 160. 카르멘 고댕

& 툴루즈 로트레크

‘좋은 시절’ 벨 에포크,

숨겨진 그림자를 그리다

툴루즈 로트레크, 화장(일부 확대), 1896~1899, 보드에 유채, 67x54cm, 오르세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화장(일부 확대), 1896~1899, 보드에 유채, 67x54cm, 오르세 미술관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의 ‘원조 맛집’입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예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기사는 역사적 사실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고달픈 세탁부,

모델 제의를 받다

툴루즈 로트레크, 세탁부, 1885, 패널에 유채, 로트레크 박물관
툴루즈 로트레크, 세탁부, 1885, 패널에 유채, 로트레크 박물관

[헤럴드경제=이원율 기자] 카르멘 고댕세탁부였다.

프랑스 파리의 환락가, 몽마르트 언덕 일대에 집을 둔 노동자였다. 가진 게 없는 그녀는 날마다 애쓰며 살았다. 얼룩진, 가끔은 토사물에 흠뻑 젖은 옷을 계속 받았다. 팔이 뻐근해질 때까지 쥐고 흔들며 땟국을 뺐다. 그것을 가마 불에 삶고, 줄에 널어 물이 빠지기를 기다렸다.

그 고생을 해 떨어지는 건 빛바랜 돈 몇 푼.

카르멘은 이를 쥔 채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언제까지. 이런 혼잣말도 했다.

가끔 그녀는 꼬깃꼬깃한 품삯을 대충 챙기곤 골목길로 빠졌다.

노란 가스등이 불안하게 깜빡이는, 가장 어두운 샛길까지 파고들었다.

그녀는 하얀 맨살이 곳곳 보이는 옷을 입었다. 그 모습으로 등 아래, 벤치 근처에서 주위를 둘러보며 서성였다.

그러다 보면 틀림없이 남자들이 꼬였다. 취한 채 딸꾹질을 하는 사람, 비틀대며 어깨동무를 하려는 인간…. 그중 한 명과 말을 맞추고 아무 방에 들어갔다. 사내를 끌어안은 채 몇 시간을 함께 있었다. 빛바랜 돈에 빛바랜 돈이 더해졌다. 이 또한 살기 위해, 있는 힘껏 살아가고자 하는 일이었다.

툴루즈 로트레크, 카르멘 고댕, 1884년경, 캔버스에 유채, 65x54cm, 클라크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카르멘 고댕, 1884년경, 캔버스에 유채, 65x54cm, 클라크 미술관

당신을 그리고 싶어요.” 그렇게 또 하루를 살아간 어느 날. 한 화가가 말을 걸었다. 그는 본인 이름을 길게 읊었다. 그러다 갑자기 민망해진 양 이 말을 덧붙였다. “그냥… 로트레크라고, 편하게 불러요.”

카르멘에게 그림 모델 제안은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카르멘은 얼마 전에도 이름 모를 몇몇 화가의 화폭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몸을 가만히 둔 채 무언가를 연기하는 건 물론 쉽지 않았다. 그래도 빨래를 하는 일보다는 분명 수월했다. 그런 카르멘을 당황하게 한 건 로트레크의 주문이었다. 로트레크가 그녀에게 요구한 건… 딱히 ‘없었다’.

“당신의 있는 그대로를 담고 싶어요.”

이 말이 다였다. 지금껏 만난 화가는 그녀에게 머리칼 손질부터 짙은 화장, 화려하거나 요염한 옷을 은근히 권했다. 조명 밝은 카페에 데려가고, 시끌벅적한 광장이나 시가지에 세워두기도 했다. 끝없는 긍정과 낙관, 넘쳐흐르는 호화와 사치스러움. 이들은 이런 식으로 당시 벨 에포크(Belle poque)를 맞은 파리의 들뜬 풍경을 띄우곤 했다.

툴루즈 로트레크, 세탁부, 1886~1887(1889), 캔버스에 유채, 93x75cm, 개인소장
툴루즈 로트레크, 세탁부, 1886~1887(1889), 캔버스에 유채, 93x75cm, 개인소장

이처럼 모두가 화려함만 좇던 파리의 눈부셨던 시절. 로트레크는 카르멘을 세워두고 그린 그림은 대단히 소박했다.

그가 말한대로, 정말 ‘있는 그대로’의 그림이었다.

대충 묶은 머리칼, 편하게 걸치고 걷어 올린 블라우스, 작업대 위에 아무렇게나 놓인 빨랫감…. 제목도 그저 <세탁부>.

이름은 물론 소재도, 분위기도 당장의 호사스러운 시대에 역행하는 작품이었다. 카르멘부터 놀랐을 것이다.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인, 이토록 누추한 결과물이 나온 데 대해 당혹감도 느꼈을 터였다. “이렇게 초라한 그림도 작품이 될 수 있을까요?” 대놓고 물어봤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로트레크는, 여기에 대고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 그 틈에서 가장 처연한 예술을 향해 나아간 남녀 이야기다.

‘좋은 시절’ 벨 에포크,

빛 뒤 그림자에 눌린 이들

툴루즈 로트레크,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89, 캔버스에 유채, 88.9x101.3cm, 시카고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물랭 드 라 갈레트의 무도회, 1889, 캔버스에 유채, 88.9x101.3cm, 시카고 미술관

먼저 그때의 시대상부터 보자.

벨 에포크. 프랑스어로 ‘좋은(아름다운) 시절’.

전 유럽이 평화로운, 그 덕에 사회 각 분야가 펄떡이며 발전하던 시대를 뜻한다. 대개는 19세기 중말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전까지의 시대를 가리킨다. 때마침 큰 전쟁도 없고, 18세기 영국발(發) 산업혁명이 무르익은 덕에 사회 각 분야가 거침없이 발전할 수 있던 순간이었다.

개발과 생산에 취한 유럽은 이 무렵 매일 더 육중한 희망을 내놓았다.

특히 파리가 그랬다. 파리는 1889년 만국박람회를 전후로 역사의 급류에 올랐다. 도시의 상징, 건립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탑이었던 300m짜리 에펠탑 또한 이 시기에 나온 건축물이었다. 아울러 기차와 자동차, 여객선, 엘리베이터와 수세식 화장실 등의 초기 형태도 모습을 보였다.

장밋빛 미래에 젖어든 파리의 귀족과 부르주아는 밤이면 환락가를 찾아다니며 호쾌하게 술잔을 때렸다. 그렇게 사람이 몰리고, 돈이 돌고, 온갖 이야기가 오가니 유희 산업도 커질 수밖에 없었다.

낮에는 굴뚝 연기와 기계들의 세상, 밤에는 발레 공연과 캉캉 춤 무대의 폭발적 흥행….

이처럼 겉보기에는 성장과 오락이 선순환을 이루는, 아름다운 나날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모두가 그 빛을 받지는 못했다. 그림자에 깔린 이들 또한 분명히 있었다. 로트레크의 <세탁부> 속 모델, 카르멘 같은 사람이 그랬다.

툴루즈 로트레크, 발레 장면, 1886, 캔버스에 유채, 102x152cm, 티엘 갤러리
툴루즈 로트레크, 발레 장면, 1886, 캔버스에 유채, 102x152cm, 티엘 갤러리

되짚어보자.

누가 밤낮없이 기계의 굉음을 일깨워야 하는가. 또, 누가 대놓고 외설(猥褻)스럽기까지 한 유흥업을 장식해야 하는가.

답은 쉬웠다. 가려진 존재, 서민의 몫이었다. 기계와 등 생산 수단을 쥔 이들이 부와 즐거움을 쌓는 동안, 이를 쟁취하지 못한 서민 상당수는 열악한 환경에 처했다.

자본이 쏠리는 만큼 빈부격차 또한 벌어졌다. 그렇기에 서민이 서민은커녕 하룻밤새 빈곤층으로 전락하는 일도 적지 않았다.

종일 일한들 저임금은 기본이었다. 남성은 호흡기 질환과 신체 절단에 처하고도 보상받지 못할 때가 많았다. 카르멘 같은 여성 또한 남성만큼 노동력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지만,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건 마찬가지였다.

힘도, 영향력도 없는 하층민 여성에게 주어진 그 시절 일거리는 식모나 하녀, 비좁은 공간 속 세탁부 등이었다. 물론 그것만으로는 먹고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카르멘처럼 이른바 ‘투잡’ 삼아 몸을 파는 일도 적지 않았다.

툴루즈 로트레크, 춤추는 소녀, 1888, 캔버스에 유채, 80.5x59.5cm, 개인소장
툴루즈 로트레크, 춤추는 소녀, 1888, 캔버스에 유채, 80.5x59.5cm, 개인소장

그러니까, 벨 에포크라고 해봤자 따지고 보면 이들만의 벨 에포크였다.

빛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을 뿐, 이들에 속하지 않는 그들이 있었다. 기계음에 묻혀 잘 들리지 않을 뿐, 이들의 탄성 뒤 그들의 허덕임이 있었다. 그렇다면 로트레크는 어쩌다 ‘그들’의 그늘진 세상에 주목할 수 있었을까.

이제부터는 로트레크의 이야기다.

●로트레크의 이야기 :

반짝이는 ‘작은 보석’은 왜?

르네 프린스토, 툴루즈 로트레크, 1883, 캔버스에 유채, 로트레크 미술관
르네 프린스토, 툴루즈 로트레크, 1883, 캔버스에 유채, 로트레크 미술관

앙리 마리 레이몽 드 툴루즈 로트레크 몽파.

1864년 남프랑스 알비에 태어난 로트레크는 긴 명찰을 가슴팍에 붙였다. 그의 집안은 12세기부터 영향력을 이어온 유력 귀족 가문이었다. 길고 긴 이름. 이는 귀한 몸으로서 드러내야 할 게 많기에 길어진 격이었다.

잘 웃고, 명랑하고, 유머 감각도 있던 로트레크의 어릴 적 별명은 ‘작은 보석’이었다. 백작 작위의 아버지는 사냥과 승마를 좋아했다. 그는 자기를 쏙 빼닮은 이 보석이 얼른 커 같이 사슴도 잡고, 함께 말 경주도 할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런 한편 어머니는 아이에게 글과 그림, 음악 등 교양용 예술을 가르쳤다. 로트레크는 이처럼 태어나자마자 돈과 지성, 명예와 창창한 미래까지 쥔 듯 보였다.

툴루즈 로트레크, 1894
툴루즈 로트레크, 1894

분명 그랬다.

분명 그랬는데….

반짝이는 보석은 커가면서 부모에게 염려를 안겼다. 로트레크는, 무엇보다도 뼈가 너무 약했다. 툭하면 몸 곳곳에 금이 갔다. 열네 살과 열다섯 살때는 어쩌다 잘못 넘어져 좌우 허벅지 뼈가 부러졌다.

이를 다시 붙이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고통스러운데, 진짜 후유증은 따로 있었다. 그때부터 다리 성장이 없었다! 멈춘 키는 152㎝가량. 키는 그렇다고 해도, 상반신과 견줘 과도하게 짧은 하반신은 어색함과 불편함을 함께 안겼다. 결국 몸을 지팡이에 대고 걸어야 할 상황에 몰렸다.

사실, 이처럼 종잇장처럼 허약한 그의 몸은 유전병에 따른 일이었다.

알고 보면 그는 태어날 때부터 평범한 출생아가 되기 힘들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따지고 보면 사촌이었다. 그러니까, 둘은 근친혼을 한 사이였다. 혈통의 희소성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택을 한 것이었다. 로트레크는 이 때문에 피가 고루 섞이지 못한 사례였다. 태생적 허약함은 이에 따른 대가였다.

툴루즈 로트레크, 빨간 말, 1873, 종이에 수채, 로트레크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빨간 말, 1873, 종이에 수채, 로트레크 미술관

아버지는 남들과 다른 로트레크를 인정하지 않았다.

가문의 악습은 외면한 채, 어디보다도 ‘엘레강스’해야 할 우리 집안에 문제아가 있다는 점에만 주목했다. 그런 그의 결정은 절연이었다. 고귀하신, 지체 높은 친척과 주변인들 또한 갑자기 생겨난 문제아 앞에서 혀를 찰 뿐이었다.

로트레크는 그때부터 그림에 매달렸다.

이제 사냥도, 승마도 할 수 없었지만 그림만큼은 계속 그릴 수 있었다. 저택에서도 빠져나온 그가 향한 땅은 몽마르트 언덕이었다. 본인 생의 굴곡을 따라 하듯, 삶의 터전 또한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낮은 곳으로 바꿨다. 그곳은 값싸고, 험하고, 외진 장소였다. 벌어지는 빈부격차 속 내몰리고, 떠밀리고, 소외당한 이들이 버틸 수 있는 마지막 구역이었다.

그 또한 상처투성이 삶을 살아서였을 것이다.

몽마르트 언덕 위 자신과 닮은, 본인과 비슷한 처지의 ‘낮은’ 이들에게 계속 눈길이 간 것은. 그렇기에 그는 숱한 다른 이들과 달리 벨 에포크가 뿜는 빛에 마냥 홀리지 않은 채, 자기만의 예술을 할 수 있었으리라.

이쯤에서, 다시 카르멘의 이야기다.

●카르멘의 이야기 :

선해서 더 애달픈 그녀

툴루즈 로트레크, 붉은 로사, 1886~1888, 캔버스에 유채, 72.3x46cm, 반스 파운데이션
툴루즈 로트레크, 붉은 로사, 1886~1888, 캔버스에 유채, 72.3x46cm, 반스 파운데이션

카르멘로트레크를 처음 본 곳은 허름한 식당이었다.

평소 알고 지낸 화가 앙리 라슈와 밥을 먹던 중 로트레크가 슬쩍 다가온 것이었다. 라슈와 같은 화실을 쓰는 동료라며 제 이름을 길게 읊곤, 갑자기 사랑 고백하듯 모델 제의를 한 것이었다. 1884년의 어느 날에 있던 일이었다. 당시 카르멘은 스물셋, 로트레크는 스무 살이었다.

로트레크는 유머를 잃지 않은 둥글둥글한 청년으로 컸다.

상처야 많았지만, 젊을 적 그에게는 자기 삶을 동정하지 않는 강인함이 있었다. “예의가 바르고, 약속을 잘 지키고, 신중하고, 남을 기쁘게 하려는 열정이 있는 사람.” 카르멘 또한 주변 이들에게 이런 평을 받을 만큼 모나지 않은 여인이었다. 둘이 잘 맞은 건 그래서였을지도 모른다. 아울러 카르멘 또한 나중에 안 얘기지만, 로트레크는 그녀의 붉은 기가 도는 금색 머리칼에 집착하고 있기도 했다.

카르멘 고댕, 1886
카르멘 고댕, 1886

그 강렬한 색이

그녀를 더 처연하게,

보다 퇴폐적으로 보이게 해.

로트레크는 언젠가 지인에게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이제 다시 <세탁부>를 다 그린 시점으로 가보자.

처연한, 순해서 더 애달픈 카르멘을 <세탁부>로 그리고, 정말 그녀가 “이런 초라한 그림도 작품이 될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면 로트레크는 이렇게 답했을 것이다.

변변찮은 지점에도

아름다움은 있어요.

그리고,

아무도 눈길 주지

않는 곳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면

무척 짜릿해요.

이는 실제 그의 어록 중 한 부분이기도 하다.

툴루즈 로트레크, 세탁부, 1886~1887(1889), 캔버스에 유채, 93x75cm, 개인소장
툴루즈 로트레크, 세탁부, 1886~1887(1889), 캔버스에 유채, 93x75cm, 개인소장

정말 그럴까.

우리는 <세탁부>를 어떻게 볼 수 있는가. 보자마자 와닿는 감정은 있다. 확신의 아름다움보다는, 일단은 잔잔한 서글픔이 먼저 다가온다.

그림 속 카르멘의 얼굴은 창밖을 향한다. 걷어 올린 소매 밑 손으로는 낡은 다림판을 잡는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허리는 이 덕에 그나마 구부러지지 않는다. 카르멘은 그저 일하다 말고 잠시 밖 풍경을 감상하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멍하니 선 채 본인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는 때. 딱 그 순간에 가까울 것이다.

꼿꼿한 턱과 앙다문 입술, 다부진 옆모습에서는 고된 생에 대한 항변(抗辯) 의지도 느낄 수 있다.

어떤 아름다움은 뒤늦게 찾아온다.

멀리서 절뚝대며 찾아오는 녀석은 늦을지언정 정진을 멈추지는 않는다. <세탁부>는 그런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벨 에포크를 연극 무대로 치면 거기서 단역 중 단역을 맡을 게 뻔한 여성 노동자, 카르멘. 그녀로 대변되는 하층민의 일상을 화려하지도, 자극적이지도 않게 담은 이 그림은 뒤늦게 감상자에게 울림을 줬다. 그것은 즉흥적인 겉멋 아닌 끈끈한 진심, 당장의 유행 편승 아닌 그리고 싶은 걸 그리려는 의지가 있어 담을 수 있는 기운이었다.

로트레크는 카르멘을 최소 12점 이상 그렸다.

툴루즈 로트레크, 흰 블라우스를 입은 붉은 로사, 1889, 캔버스에 유채, 60.5x50.3cm,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흰 블라우스를 입은 붉은 로사, 1889, 캔버스에 유채, 60.5x50.3cm, 티센 보르네미사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화가의 작업실에 있는 카르멘 고댕, 1888, 캔버스에 유채, 55.9x46.7cm, 보스톤 파인아트 박물관
툴루즈 로트레크, 화가의 작업실에 있는 카르멘 고댕, 1888, 캔버스에 유채, 55.9x46.7cm, 보스톤 파인아트 박물관

지친 듯 자리에 앉아 고개를 숙인 <흰 블라우스를 입은 붉은 로자>, 침울한 표정과 투박한 두 손이 돋보이는 <화가의 작업실에 있는 카르멘 고댕> 등이 대표작이다.

로트레크는 가혹하리만큼 사실적으로 그리기를 이어갔다. 작업 전 꾸밈도, 작업 후 보정도 없었다. 동지 의식 또한 계속 무르익어서일까. 여운은 더 길고, 더 깊어졌다. 원래는 이토록 솔직한 그림에 어색했을 그녀 또한, 언젠가부터는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이게… 가장 솔직한 제 모습이군요.”

또 다른 벨 에포크 그림자들

따로, 또 함께 그려나가다

툴루즈 로트레크, At the Salon of the rue des Moulins, 1894, 카드보드에 유채, 111.5x132.5cm, 로트레크 박물관
툴루즈 로트레크, At the Salon of the rue des Moulins, 1894, 카드보드에 유채, 111.5x132.5cm, 로트레크 박물관

본인은 ‘작달막한 커피포트’라며 자학적 농담을 할 만큼 몸이 성치 않은 로트레크, 손이 불어 터질 만큼 일하고도 형편이 나아지지 않는 카르멘 모두 그 시절 벨 에포크의 주변인이었다.

불행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을 귀신처럼 알아본다.

그 시절 사회 주변부를 겉돌던 사람들이 하나둘 인연의 실을 쥐기 시작했다. 다리 짧은 화가와 세탁부는 물론, 밤무대 댄서와 발레리나, 떠돌이 서커스 단원, 거기다 전업 성노동자까지 한 서클(circle)로 모였다. 자연스럽게 모임 아닌 모임이 꾸려졌다.

툴루즈 로트레크, 침대, 1893, 카드보드에 유채, 54x70.5cm, 오르세 미술관
툴루즈 로트레크, 침대, 1893, 카드보드에 유채, 54x70.5cm, 오르세 미술관

로트레크는 이들을 통해서도 벨 에포크의 그림자를 재차 조명했다.

가령 <침대>를 보라.

둘은 성노동자다. 머리칼이 짧다는 건 몸을 파는 동시에 그것마저 팔 수밖에 없었다는 걸 의미한다. 그런 절박한 사정의 두 여인은 서로를 향해 몸을 돌렸다. 따뜻한 표정, 다정한 분위기다. 이들은 내일, 또다시 전쟁터로 나가기 전 ‘뜨거운’ 휴식 시간을 갖는 중일 터였다.

툴루즈 로트레크, 의료 방문, 1894, 카드보드에 유채, 83.5x61.4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툴루즈 로트레크, 의료 방문, 1894, 카드보드에 유채, 83.5x61.4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이밖에 웃음을 파는 공연 뒤 씁쓸한 표정으로 퇴근하는 댄서, 속옷까지 위로 든 채 성병 검진을 기다리는 사람들, 암묵적으로 세상에서 가장 낮은 위치로 취급받고 있는 모든 이들….

로트레크는 그 처지를 알기에, 공감하고 절감할 수 있기에 이들의 가려진 모습을 담을 수 있었다. 그런 로트레크의 노력 아닌 노력 덕에, 그 시절 뒷골목 풍경에 대한 참고 자료가 풍부해진 점 또한 의미 있는 일이다.

●로트레크와 카르멘의 이야기 :

갈라진 두 사람, 끝은 어땠을까

툴루즈 로트레크, 거울 앞 자화상, 1882, 카드보드에 유채, 40.5x32.5cm, 로트레크 박물관
툴루즈 로트레크, 거울 앞 자화상, 1882, 카드보드에 유채, 40.5x32.5cm, 로트레크 박물관

끝으로, 카르멘 로트레크의 관계는 어떻게 끝을 맺었을까.

1884년에 처음 마주한 것으로 알려진 둘은 4~5년가량 꾸준히 손발을 맞췄다. 그렇게 붙어 다니고도 로맨스에 대한 소문 내지 추측은 돌지 않았다. 물론 현대에 이르러서는 둘 사이 미묘한 사랑의 감정선이 있었으리라는 분석도 나오곤 한다.

다만 전해지는 설에 따르면, 로트레크는 카르멘이 머리칼을 붉은색에서 갈색으로 바꾸자 더는 모델 제의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이하리만큼 강렬했던 그녀의 빨간 머리카락에 꽂혔던 그는, 변한 머리칼을 일종의 변절 내지 정체성 상실로 본 것일까. 이후 로트레크는 다른 가수나 배우, 댄서 등을 전속 뮤즈로 삼았다. 그렇게 꿋꿋이 자기만의 회화관을 고집한 그는 폭음과 성병(카르멘이 영향을 줬다는 말도 있다) 등으로 건강을 잃었다. 결국 1901년 9월, 로트레크는 향년 서른여섯 살 나이로 사망했다.

툴루즈 로트레크, 카르멘 고댕, 1885, 패널에 유채, 23.8x14.9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툴루즈 로트레크, 카르멘 고댕, 1885, 패널에 유채, 23.8x14.9cm, 내셔널 갤러리 오브 아트

카르멘의 마지막은 어땠을까.

애석하게도 반전은 없었다. 그녀는 끝까지 애달픈 삶을 살았다. 언젠가부터는 남자 친구, 어쩌면 포주일 수도 있는 사내에게 폭행을 당하곤 했지만, 그와 쉽사리 헤어지지는 못했다고 한다. 이후로는 확실한 행적을 찾을 수 없었다.

카르멘로트레크.

둘의 만남은 짧았지만, 둘이 빚어낸 예술은 영원의 문 앞에 설 수 있었다. 이들로 인해 벨 에포크는 더 완성도 높은 역사의 한 조각이 될 수 있었다. 두 사람 다 하늘에선 진정한 ‘좋은 시절’을 맞아 각자의 ‘아름다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지. 한편 걸작으로 인정받은 <세탁부>는 200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240만달러(당시 약 2240억원)에 낙찰됐다.

참고자료

벨 에포크, 아름다운 시대 1871-1900, 메리 매콜리프, 현암사

벨 에포크, 인간이 아름다웠던 시대, 심우찬, 시공사


yul@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