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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여자’ 장혜진

  • ‘라디오스타’서 ‘가요계 디바’로 화려한 복귀…노래와 열정으로 이어온 20년 가수인생 그리고 ‘나가수’
  • 기사입력 2011-09-22 10: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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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명여대 체조선수로 날리던 어느날 들이닥친 부상

첫번째 인생의 전환기,내가 선택한 길은 다름아닌 노래.

MBC 합창단원에 들어간 해 운좋게 섰던 ‘서울 국제가요제’

큰 무대에서 얻은 자신감으로 그룹 ‘코코스’결성하기도.

깡통사장 독립시키려 결심한 솔로 데뷔, 그리고 성공적인 활동

그러나 50일된 아이가 악성폐렴에 걸려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꿈.

아이와 함께간 미국 유학생활에서 희망을 건지고 

오랜 시간뒤 ‘나가수’로 되찾은 명성

그것은 남편 없었다면 못찾았을 내 모습이자 삶의 이유.





무대로 걸어나갔다. 마이크를 잡는 순간, 무거운 정적이 가슴을 짓누르기 시작한다. 평소 무대에 올랐을 때와는 너무나 다르다. 수십초가 지나도 나오지 않는 반주,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침묵은 작고 여린 몸을 흔드는 느낌. ‘이게 뭘까.’ ‘나는 가수다’와의 첫 조우는 다른 가수의 고백처럼 오로지 ‘떨림’으로 기억에 남아 있다. 이젠 1등을 해봤으니 이력이 날 때도 됐건만 첫 무대에서의 긴장감은 녹화가 있는 월요일마다 ‘관성’처럼 다시 찾아온다. 가수 장혜진은 무대에 선 지 올해 꼭 20년이 됐다. 남들은 무대 뒤로 물러날 때지만 장혜진은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왔다. 얼마 전 무대에서 다시 만난 윤민수와 함께 부른 ‘그 남자 그 여자’의 ‘그 여자’ 목소리로만 기억했던 사람들도 과거 장혜진의 주옥같은 명곡들을 하나씩 찾아내 트위터와 인터넷에 동영상을 올리며 관심을 보이고 있다. ‘나는 가수다’ 청중은 장혜진이란 가수를 재발견했고, ‘라디오 스타’에 머물러 있던 장혜진은 꼴찌부터 1등까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듯 숨가쁜 평가를 받으면서도, 대중의 사랑과 기대를 새롭게 받아들이고 있다. 



# 꼴찌에게도 박수를 보내는 무대

장혜진과 만나기로 한 서울 성동구 한양여대를 찾았을 때는 강의를 마친 학생들이 교정을 대부분 빠져나간 저녁 무렵이었다. 사진 촬영을 하는 동안 지나가던 학생들이 스타가 된 교수님의 평소 보기 어려운 ‘포즈 취하는 모습’을 지켜보기 위해 걸음을 멈추곤 “파이팅!”을 외쳤다. 장혜진은 조용한 분위기에서 얘기를 나눌 수 있는 교수실로 안내했다. TV에서 보여줬던 열창이 어디서 나왔을지 의구심이 드는, 가냘픈 몸매가 무색하게 그녀는 엘리베이터를 뒤로하고 씩씩하게 교수회관 내 계단을 통해 4층을 올라갔다. ‘실용음악과 이남미(장혜진) 교수’라는 명패가 달린 방문을 열자마자 피아노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스케줄은 지난 봄학기에 비해 훨씬 빡빡해졌지만 주중 5일 내내 강의는 물론이고, 학생들 개인 레슨도 빠뜨린 적이 없다고 옆에서 매니저가 귀띔했다. 

인터뷰 약속이 있던 날도 새벽까지 ‘나는 가수다’ 녹화를 마치고 학교에 출근했다고 한다. 바로 녹화 전날엔 전국 투어 ‘그 여자’ 콘서트까지 있었으니, 남편이자 소속사 캔엔터테인먼트 대표인 ‘깡통’ 강승호 사장이 걱정할 만도 했다. 깡통 사장은 장혜진이 예뻐졌다고 칭찬하니 “42㎏밖에 안 됐던 체중이 3~4㎏ 더 빠지면서 카메라에는 갸름하게 나오기 때문”이라며, 그를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화를 내는 건지, 듣기 좋아 그러는 건지 헷갈리는 특유의 고성으로 아내에 대한 안쓰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일산 집과 한양여대 캠퍼스를 오가는 게 일상이었던 장혜진에게 ‘나는 가수다’ 출연을 처음 권유한 사람은 ‘쌀집아저씨’ 김영희 PD였다. 고민도 해보기 전에 김 PD가 남미로 연수를 떠나버리고, 임재범이 한창 화제에 올랐을 즈음 이 프로의 바통을 이어받은 신정수 PD로부터 다시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신 PD와 만나기 전 ‘다시보기’로 프로그램을 꼼꼼히 모니터했어요. 처음엔 정중히 사양할 목적이었는데, 모니터를 하다 보니 내가 일고 있는 기존 방송과는 완전히 달랐어요. 최고 수준의 음향에 기타리스트 홍승호, 건반 길은경 같은 정상급 세션, 조명 등에 내심 놀랐어요. 신 PD의 설득과 독려에 평가를 받아보겠다고 대답하고 말았죠.”(웃음)

1990년대 흔치 않았던 실력파 여가수 장혜진도 ‘나는 가수다’ 첫 무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떨렸다고 털어놨다. 92~98년 소극장 무대에서 1000회에 이르는 공연을 한 여가수로서 ‘대학로의 디바’로 통했다. 그러나 큰 무대부터 작은 무대까지 쌓아놓은 경험도 청중평가단 앞에서는 무력했다.

“첫 출연하던 날, 잊지 못하죠. 무대를 걸어나갈 때까지만 해도 편안한 마음이었어요. 하지만 마이크를 딱 잡는 순간, 박수 소리가 그치면서 장내가 조용해지더니 뭔지 모를 중압감이 느껴졌어요. 콘서트와는 완전히 다른 느낌이었죠. 콘서트는 내 음악을 이미 알고, 좋아하는 팬들이 와주시지만 청중평가단은 출연 가수들의 운명이 엇갈리는 투표에 대한 책임감을 무겁게 느끼고 진지하게 무대에 집중하기 때문에 긴장감이 극대화된다고나 할까요. 다른 가수도 같은 느낌을 받는다고 해요. 사회를 보는 윤종신도 방송 첫날 긴장했을 정도니.”

‘나는 가수다’ 출연은 장혜진의 단조로웠던 일상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평소 언니와 자주 다니던 동네 커피전문점에서 만난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언니”라고 불러주는 기쁨을 누리며 방송의 힘을 실감하는 한편, 선후배 가수들과 격의 없이 친해질 기회를 갖게 돼 가장 기쁘다고 한다. 같은 소속사 가수를 제외하고 친분 있는 동료를 들라면 손무현, 윤상, 김동률 정도였던 그녀에게는 큰 변화다. 처음 만났지만 금세 친해진 BMK는 무대에 서기 전 그녀가 긴장할 때마다 “장혜진인데!”라며 격려해줬고, 친동생처럼 따랐던 옥주현이 무대를 내려갈 때에는 아쉬움이 너무 커 눈물이 맺히기도 했다. 아무리 늦게 녹화가 끝나도 회식으로 뒤풀이를 하며 동료애를 다지는 게 이 프로의 매력이다.

방송이 나가는 날에는 지인들로부터 일제히 문자가 쏟아진다. 1등을 한 날 총장님으로부터 축하를 받았고, 꼴찌인 7위에 이름이 오를 때는 문자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데 그 와중에도 제자들이 ‘카카오톡’으로 보내주는 “언제나 제 맘 속엔 1등이세요” 같은 위로메시지를 읽을 때 힘을 얻곤 한다. 첫 꼴찌를 안겨준 카라의 ‘미스터’를 선곡한 것에 대해서도 후회하지 않는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딸보다도 신곡을 먼저 흥얼거릴 만큼 음악만큼은 얼리어댑터에 속하는 장혜진은 요즘 빅뱅, 소녀시대, 2NE1의 노래를 즐겨듣는다.

장혜진은 ‘나는 가수다’가 방송가요계에 영향을 미친 수많은 긍정적인 변화 중에서도 특히 라이브 무대의 활성화를 높게 평가했다. 악기전문점이 밀집돼 있는 서울 낙원상가에서 마음에 드는 기타를 사려면 한참 기다려야 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지만, 예전에는 텅텅 비어 있던 시내 연습실, 홍대 앞 합주실까지 만원을 이루며 최고의 연주자들조차 밀려날 정도라고 했다. 가수뿐 아니라 무대 뒤에서 음악을 완성해내는 연주자, 편곡자, 코러스까지 존경받는 시대가 온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고 했다.



# 평균대서 내려와 무대 위로

“백핸드스프링이라는 동작에서 회전을 하던 중 양손으로 잡아야 할 평균대의 바가 옆에서 보였어요. 허공이었던 거죠. 병원에 갔더니 목, 다리 인대 부상으로 한동안 쉬어야 한다고 해서 내친김에 휴학계를 냈어요. 마침 친구가 MBC에서 무용단과 합창단원 모집에 지원한다기에 여의도 MBC까지 따라갔어요. 합창단이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아름다운 하모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어요.”

평소에는 눈물 많고 여린 소녀 같은 장혜진이지만 가끔 당찬 결단력으로 위기를 역전시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곤 하는데, 학교를 그만두고 MBC 합창단원 모집에 지원한 것도 그중 하나다. 직접 밝힌 대로 상명여대 재학 시절에 체조 선수로 활약하다 부상을 입어 평균대에 설 수 없는 불운을 겪고, 마냥 쉴 수만은 없다는 판단을 내린 뒤 스스로 소질과 잠재력을 찾아냈다. MBC에서 무용단과 합창단을 모집한다며 지원서를 내는 친구를 따라나섰다가 합격한 것이다.

장혜진은 “위로 언니가 셋이라 일찍 팝송을 접할 기회가 많았고, 아는 노래도 언니들 수준이었어요.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옆집에 기타를 무척 잘 치는 멋있는 오빠가 살았는데, 하루는 ‘이 노래를 아느냐’며 악보를 건네줬어요. ‘밤배’라는 곡이었는데 내가 끝까지 부르자 비틀스의 ‘예스터데이’, 아바 곡도 내놓는 거예요. 거침없이 부르는 내게 얘 좀 보라며 이 노래, 저 노래를 시켰어요. 동네 사람이 모이는 평상이 상설 무대였을 만큼 매일 노래를 부르는 게 즐거웠어요. 나중에는 동네 분들이 이름 대신 ‘꼬마 가수’라고 불렀어요”라며 어릴 적 살았던 ‘신길동의 전설’을 들려줬다. 어릴 적부터 일찍 익힌 팝송 실력은 훗날 미국 버클리음대 유학 시절 ‘서바이벌 잉글리시’와 미국 생활 적응에 큰 도움이 됐다고 덧붙였다.



# 깡통이 키워준 사랑·희망

MBC에 입사한 88년은 서울 올림픽이 열린 해라 큰 무대에 서는 행운이 따랐다. 입사하자마자 오른 올림픽 공식 행사였던 ‘서울 국제가요제’에선 우상이었던 ‘페임’의 가수 겸 배우 아이린 카라를 만났다. ‘위 아 더 월드’를 합창할 때에는 ‘신디 로퍼’의 솔로 파트를 맡아, 함께 무대에 올랐던 대단한 가수들의 눈을 그녀에게로 향하게 했다. 최고의 아이돌 스타였던 ‘소방차’의 매니저로 일했던 깡통 사장을 만난 것도 이 즈음이었다.

“합창에 완전히 매료돼 ‘코코스(코리아코러스)’라는 그룹을 결성해 활동했어요. 조용필, 최성수, 변진섭 등 큰 무대에 초청되는 팀으로 성장했고요. 가수 제의를 여러 번 받았지만, 당시만 해도 가수는 다른 세상에서 태어난 사람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가수를 빛내주는 아름다운 하모니가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에요.”

가수 데뷔를 결심한 건 깡통 사장의 독립을 돕기 위해서였다.

“소방차 콘서트가 열린 부산 KBS홀에서 남편을 처음 봤어요. 정신없이 시끄러운 목소리를 내며 무서운 사람이 내 앞에서 왔다갔다하기에 ‘저 사람 깡패인가 봐’라고 생각했죠. 며칠 후 88체육관에 갔는데 그가 씩씩대며 다가오더니 자기는 강승호라는 사람인데, 다음주 일요일 만나자고 약속을 마음대로 정하고는 ‘안 나오면 안 되는 거 알죠’라며 협박인지, 데이트를 하자는 건지 알 수 없는 말만 건네곤 사라졌어요. 만나기로 한 날, 약속장소에 갔더니 사귀자는 거예요.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젠틀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소지섭 닮은 ‘옆집 오빠’였는데 당연히 ‘노’라고 대답했죠. 친구 사이라도 좋다는 그를 1년 넘게 만나다 보니 마음이 기울었죠. 포장마차에서 만나 제작을 직접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물었던 적이 있는데 가수를 찾기가 어렵다고 하더군요. 그 김에 먼 데서 찾을 게 뭐 있냐. 내가 하겠다. 망하지 않을 자신 있다고 말했고, 진짜 데뷔하게 됐어요. 기획사 이름도 바로 정했는데, 자신의 별명인 깡통기획으로 하자는 거예요. 그럼 캔기획으로 하자고 설득했죠. ‘캔(CAN)’은 깡통이라는 명사 말고도 ‘할 수 있다’는 의미도 있지 않냐고 했더니, 바로 승복할 수밖에요.” 장혜진은 ‘웬즈데이 차일드’에서 착안한 ‘먼데이키즈’ ‘보이스원’ 등 작명 실력을 여러 번 발휘했다.

데뷔곡 ‘키 작은 하늘’이 성공하면서 남편과의 약속을 지키고 결혼식을 올린 장혜진은 90년대 발라드를 대표하는 여가수로서 꾸준히 앨범을 냈다. 캔기획도 장혜진에 이어 김종서, 박상민을 히트시키며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듯했다. 93년 12월에 태어나 50일밖에 안 된 딸아이가 폐렴 악화로 백일해 증후군을 보이며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을 때까지는 모든 게 순탄했다. 중환자실에서 기침 때문에 산소호흡기를 한 채 아기 손을 잡고 있을 때 또랑또랑하고 맑은 눈으로 엄마를 쳐다보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짠하다’고 한다. 한두 시간 눈을 붙이기 위해 집으로 돌아가도 휑한 아기 방은 들어가기조차 싫었다. ‘94년 어느 늦은 밤’은 장혜진의 당시 심경이 그대로 담긴 노래다. 김현철 곡을 받아들고 ‘바로 내 맘이네~’라며 연습 삼아 부른 곡이 그대로 원테이크(One Take)로 리코딩됐다. 딸아이는 기사회생해서 지금은 펜싱 선수로 펄펄 날 만큼 건강해졌다. 95년부터 마음먹었지만, 펄쩍 뛰는 남편의 마음을 움직여준 건 장기호 교수 덕이었다. 서울재즈아카데미를 통해 버클리음대 장학생으로 선발되자마자 딸, 언니와 함께 보스턴행 비행기를 탔다. 덕분에 깡통 사장과 형부는 한집에서 기러기아빠로 살았다. 학교에서는 보컬을 전공했는데, 어릴 적부터 다진 팝송 실력에 교수들이 가수를 해도 되겠다며 노래시킬 만큼 미국 생활에 빠르게 적응했다. NYU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논문을 준비하던 중 한양여대에 재직 중이었던 손무현의 추천으로 2006년 겸임 교수로 강단에 서기 시작해 3년 만에 전임이 됐다.

장혜진은 “꿈조차 꾸지 않았던 가수가 되고 앨범을 꾸준히 낼 수 있었던 건 남편을 만났기 때문이니, 제가 복이 많은가 봐요”라며 지금 누리고 있는 행복과 자신의 음악에 대한 열정까지 모두 ‘깡통 사장’에게 돌렸다.

이경희 선임기자/ice@heraldcorp.com
사진=안훈 기자/rosedal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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