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이른 더위가 난데없던 날이었다. 예고없이 방문해 칼날같이 찌르는 슬픔처럼 뜨거운 공기가 거리를 파고 들었다. 루시아(Lucia, 심규선)는 끈질기게 열기를 토하는 아스팔트 위를 사뿐히 걸었다. 걸음 걸음이 악보 위를 떠다니듯 가벼웠다. “7월생이라 더위는 잘 견디는 편이에요.”

무거운 더위는 계절의 변화 앞에 힘을 잃는다. 지구의 법칙이다. 폐허는 끝끝내 다시 서고, 상처는 결국엔 아문다. 시간의 힘으로 모든 것은 지나간다. 한여름에 태어난 루시아의 탄생화는 ‘비단향꽃나무’다.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는 꽃말을 가졌다. 꽃말에는 “고뇌로 계속된 나날에서 해방돼 거짓말처럼 마음이 맑아졌을 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의미가 담겼다.

흔히들 루시아를 ‘위로의 여신’이라고 부른다. 시간에 기대지 않고, 누군가의 ‘지금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구원자. ‘위로’는 루시아의 음악세계를 관통하는 키워드다.

“여신은 아니지만 ‘위로’라는 말이 제게 중요해진 것 같아요.”

최근 발매한 라이브 앨범 ‘부드러운 힘(라이브 Vol.1)’에 수록된 신곡 ‘이너(INNER)’엔 루시아의 삶에 가장 ‘강력한 위로’가 됐던 말이 가사로 담겼다. “아버지가 해주셨던 말이에요. 그 말이 저를 상처입히지 않았고, 스스로 자존감을 가지고 힘든 일들을 견디는 버팀이 돼줬어요. ”

넉넉치 않았고, 기댈 수 없었던 유년시절은 짙은 흔적들을 남겼다. 연고를 덧바르며 자신의 ‘허공을 노려보는 것도 지칠 때’엔 ‘구원자를 보내주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형벌 같은’ 삶은 ‘스스로를 다치게 할 것 같은’ 불안 속으로 밀어넣었는 지도 모른다. ‘믿었던 꿈들이, 사랑했던 사람들이 등지고 깊은 생채기만 남겼‘(‘이너’ 가사 중)다고 절망할 때, 위로가 됐던 그 말은 아버지가 들려줬다. “그렇게 애쓰지마. 너에게 필요한 것들은 너의 안에 다 있어.”

“위로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슬픔만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자기가 가진 괴로움의 깊이만큼 위로도 물처럼 차오르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요.”

고통의 시간을 혼자 견디는 것에 익숙했지만, 누군가 필요했던 시간들도 있었다. “원하지 않았지만 겪어야 했던 일을 겪으며 살아온 이유는 같은 일을 겪은 사람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고 밖에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그럴 때에 함께 해온 음악이 있었고, 자신을 지탱하게 해주는 이들의 존재가 보였다.

팬들은 종종 루시아에게 자신의 절박함을 담은 편지를 보낸다. 루시아는 “제 음악에 특별한 의미를 두고 메시지를 보내주시는 분들을 보면 음악을 놓을 수가 없다”고 한다. 극도로 예민해진 정서들이 자신을 향해 겨눠도,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달고 지내고 일 년에 1.5장의 앨범을 내며 ‘다작’을 하는 이유다.

“이 사람의 얼굴도, 이름도 모르지만 저의 음악활동이 누군가의 마음 한 켠에 버팀목으로 작용하고 있구나. 이 사람은 지금 힘들고, 이들에겐 음악이 필요하구나, 그렇게 음악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 스스로 느껴왔어요. 음악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시도할 수 있고, 외롭고 힘든 사람도 공감할 수 있고, 이해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 괴로운 시간을 보내는 누군가에겐 음악이 필요해요. 슬픔을 가진 사람은 반드시 위로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요. 그게 제 음악적 모토예요.”

음악에서 치유받았던 자신처럼 루시아는 누군가에게 자신이 “선물받은 재능”을 통해 치유받고 나누기 위해 “열정을 태운다”. 때로는 폭발하는 감정으로, 때로는 관조적인 시선으로 “듣는 사람마다 다양한 해석”이 나오는 노래들을 내놓는다.

지난달 발매한 라이브 앨범은 사실 시대역행적이다. 디지털 음원 시대에 두 장 짜리 CD를 빼곡히 채웠다. 두 개의 신곡(이너, 나의 색깔)도 함께 했다. 애초 올 가을 발매를 염두하고 준비한 곡들이었다. “콘서트를 전담해서 맡아주시는 주병조 음향감독님이 콘서트 때 녹음을 하셨더라고요. 공연에 와주신 분들께 믹싱을 해서 메일로 보내드리면 좋은 선물이 되지 않겠냐고 제안하시더라고요. 그게 시작이 돼서 음반까지 내게 됐어요. 가수로서 라이브 앨범을 내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해요. 모든 가수가 가질 수 있는 음반은 아니니까요.”

계획하지 않았던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기왕이면 “이 계절을 겪으며 만난 감정을 담은 노래를 생생하게 들려주고 싶은 마음”에 ‘이너’와 ‘나의 색깔’이 라이브 앨범에 함께 수록됐다. 앨범의 타이틀은 ‘부드러운 힘(Live Vol.1)’이라고 지었다.

“평소 되새기는 말 중의 하나예요. 저는 자극이 센 음악을 들으면 귀가 상처입는다고 느껴요. 짜릿하고 강한 자극, 상처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힘이 아닌 강물처럼 파도처럼 밀려오는지도 모르고 밀려들어와 내면의 것을 재정돈하거나 끌어내는 부드러운 힘에 대해 음악에 싣고 싶었어요.”

5분 30초에 달하는 ‘나의 색깔’은 해금 사운드가 도드라진다. 루시아는 이 노래를 앨범 타이틀에 가장 부합한 곡으로 꼽았다. “서서히 밀어올리는 부드러운 힘이 있어야 와닿는 것이 있지 않을까 싶어요.” 이례적으로 눈물을 토해내며 부른 곡이었다. 음악적 구성이 다양한 변화 없이 5분 30초를 끌고가고, 반복되는 슬픔으로 고조가 일어나니 보컬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녹음을 할 때 에너지가 담기는 만큼 전달된다고 믿어요. 힘을 쏟고 기를 넣으려다 보니 어려웠던 것 같아요. 인생노래라고 하는 분들도 있더라고요. 흔하고 깊이 없는 위로곡이 아니길 바랐던 제 염원이 잘 녹아난 것 같아요.”

‘괜찮아’, ‘다 잘 될거야’라는 상투적인 말로는 “해결되지 않는 무게와 괴로움을 안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에, 루시아에게 위로는 “우리를 괴롭히는 어떤 일들만큼 강력한 동시에 부드러운 힘을 가져야 하는” 것이었다.

“겪어보지 않은 것에 대해 아는 척하며 쓰지 못해요. 제가 부르는 것에 한해선 거짓말로 만들지 않고요. 어떤 노래를 쓰면서 제가 위안을 얻었다면 듣는 사람도 반드시 위안을 얻을 거라는 확신이 있어요. 가장 강력한 힘은 공감의 힘이니까요.”

2005년 대학가요제 금상 출신, 에피톤 프로젝트의 정규 1집 ‘선인장’과 ‘오늘’을 통해 ‘심규선’이라는 이름 석 자를 알렸다. 세례명 루시아로 이름을 바꾸고, 어느덧 데뷔 6년차를 맞았다. 여성 싱어송라이터로 불리며 선배들의 계보를 이어가고 있다. ‘불륨(Vol).1’이 붙은 라이브 앨범은 오는 11, 12일 공연 이후면 ‘부드러운 힘 Vol.2’로 나올 예정이다. 이번엔 계획된 앨범이기에 이전 공연에선 부르지 않았던 곡들로 셋리스트를 짰다.

루시아의 공연은 내내 절제했던 그가 아닌 모든 에너지를 토해내는 새로운 보컬리스트를 만나는 시간이다. “쏟는 만큼 다가간다고 믿기에”, “진심으로 노래하면 그 만큼의 파장이 오기에” 루시아는 더 많이 내놓는다. 묵직한 박수소리에 관객들의 울음이 섞이곤 한다. 그것 역시 루시아가 보내는 위로다. 그의 이름은 ‘헤아릴 규(揆)’에 ‘먼저 선(先)’을 쓴다. 이름부터 ‘위로의 여신’이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