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무대에도 객석에도 30년의 시간이 흘렀다. 세월의 길이를 뛰어넘은 연주자들은 소리로 조화를 이뤘다. 때때로 서로에게 미소를 보내며 함께 하는 순간을 지지했다. 중년의 여성팬들이 들어찬 객석 사이 사이엔 ‘미래의 최희선’을 꿈 꾸는 앳된 소년들이 자리했다.
이날 공연을 관람한 30대 초반의 한 여성 관객은 “연령대를 불문하고 관객 모두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공연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었다”며 “음악을 시작하는 아티스트들과 함께 무대를 꾸몄다는 점도 감동적이었다”고 말했다.
연주음악 불모지인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최희선은 어느덧 세 장의 연주 앨범을 발매했다.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을 통해 해마다 전국 투어를 진행하고, 그의 고향인 상주에선 매년 7월 말 ‘최희선과 함께하는 한여름밤의 축제’를 연다. 매해 쉬지 않고 촘촘히 채워진 공연 스케줄을 소화하지만, ‘기타리스트 최희선’으로 서는 단독 공연은 이번이 세 번째다. 지난 39년간 최정상의 자리를 지킨 프로 뮤지션에게도 국내 음악환경은 여전히 메마른 겨울이다.
지난 26일 서울 삼성동 백암아트홀에서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리더 최희선(55)의 단독 콘서트 ‘매니악(MANIAC)’이 열렸다. 25, 26일 양일간 900석을 가득 채운 관객들은 야광봉을 흔들며, “기타 황제”라고 연호했다. 아이돌그룹의 팬덤 못지 않은 열광이 가득찬 기이한 현장. 이 곳엔 ‘존경’과 ‘팬심’, 존재만으로 가치가 충분한 거장 기타리스트를 향한 ‘헌사’가 넘쳐났다.
이번 공연에서 최희선은 자신의 제자인 김영균에게 베이스(29)를, 홍대 인디밴드 ‘이상의 날개’로 활동하는 이충훈(30)에게 드럼을 맡겼다. 건반은 H2O의 원년멤버 장화영(62)이 함께 했다. 신구세대를 아우르는 무대는 최희선이 걸어오고, 걸어가고자 하는 길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누구나 한 시절의 꿈나무였다. 미래의 뮤지션을 꿈꾸는 어린 친구들이 가야할 길에 해주는 몇 마디가 한 걸음 내딛을 것을 열 걸음 가게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이다.
함께 무대에 오른 김영균은 고교 시절 최희선을 찾아와 제자가 됐다. 두 사람이 함께 한 시간은 어느덧 10년이다. 김영균은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 35주년 공연을 보고 최희선 선생님을 알게 됐다. 이후 매일같이 영상을 찾아보며 선생님처럼 멋지게 연주하고 같은 무대에 서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했다. 1년 넘게 수소문해 무작정 찾아가니, 최희선은 고등학생이던 김영균을 제자로 맞았다. ‘매니악’ 앨범에선 최희선이 직접 베이스를 연주했지만, 공연에선 제자에게 믿고 맡겼다.
총 여섯 꼭지로 구성된 공연은 각각의 곡에 어울리는 영상이 더해지며 기타리스트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기타로만 채워진 연주공연은 다소 지루할 수 있다는 지레짐작은 여지없이 깨졌다.
다채로운 공연 구성이 빛을 발했다. 최희선이 수십년 쌓아온 노하우였다.
최희선은 “공연을 관람한 이후에도 한 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감동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에게나 ‘내 인생의 영화’가 있는 것처럼 ‘내 인생의 공연’이 남아야 한다”며 “공연엔 흥분, 감동, 공감, 추억이 있어야 한다. 기타 연주의 정교함보다 공연의 구성과 스토리가 더 중요하다”고 말했다. 매 공연마다 구성에 각별히 신경쓰는 이유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진 알찬 구성과 관객과의 ‘밀당’은 객석을 뜨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공연은 ‘매니악’에 수록된 화려한 테크니션이 돋보이는 네 곡(댄싱 핑거, 나비, 하이웨이 스프린트, 매니악)을 숨 돌릴 틈도 없이 몰아부치며 시작됐다. ‘거장’ 기타리스트의 현란한 연주가 지나가니, 달아오른 객석의 열기는 감성으로 물들었다. 누구나 하나씩은 있을지 모를 그리운 시간의 기억을 공유(Remember)했고, 모두의 고단한 삶을 위로(희망가)했다.
23년을 함께 한 가왕 조용필의 생일에 만든 ‘사운드 오브 문(Sound of moon 3.21)’에 이어 ‘이젠 그랬으면 좋겠네’와 ‘꿈’이 시작되자, 객석에선 ‘떼창’이 흐르고, 중간박수가 터졌다. 또 다른 ‘희망가’였다. 여운을 이어간 건 세월호 참사로 바다에 잠든 학생들을 생각하며 쓴 ‘프레이 포 코리아(Pray for Korea)’였다. 눈시울을 붉히는 관객들이 적지 않았다.
유명가수는 등장하지 않았지만, 깜짝 공연은 있었다. 기타리스트 최희선은 직접 마이크를 잡았다. “팬들의 요청이 많은 데다, 혹시라도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채우고자 싶은 마음에 그는 존경하는 기타리스트 게리 무어의 곡(Moving on, Cold day in hell)을 소화했다.
‘면도날 하나의 오차도 없는’ 정교한 연주를 자랑하는 최희선의 공연 후반부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곡들이 이어졌다. 공연은 ‘스위티스트 러브(Sweetest love)’에 이어 앵콜곡 ‘스토리 오브 블루스(Story of blues)’로 끝이 났다.
최희선의 공연은 관객들의 만족도가 높기로 유명하다. 한 번도 안 본사람은 있어도 한 번만 본 사람은 없다. “연주만으로도 공연 내내 관객들과 호흡하고 열정을 전달할 수 있다는 점이 매우 놀라웠다”(32세, 윤OO)는 반응은 연령대를 초월한 공통된 소감이었다.
50대 중반의 한 여성관객은 “연주만으로 구성된 공연을 그동안 많이 접하지 못했다. 이번 공연은 신선한 경험이었다”며 “에너지가 넘치는 연주를 듣다보니 공연이 끝나고도 감동과 에너지가 한동안 가시지 않을 정도였다”고 말했다.
공연을 마친 이후 무수히 많은 ‘꿈나무’들은 자신의 기타에 ‘롤모델’의 싸인을 받기에 분주했다. 이들에게 누구도 가지 않은 길을 가는 최희선은 선구자였고, 꿈이었으며, 그들이 가고자 하는 길이었다.
공연을 찾은 SM엔터테인먼트 소속 트랙스 정모는 “어린시절 한국에서 제일 좋아하는 기타리스트가 누구냐는 질문을 받으면 항상 최희선이라는 이름을 먼저 이야기했다”며 “중학교 2학년이던 열다섯에 조용필과 위대한 탄생의 공연실황을 보고 선배님께 반하게 됐다”며 최희선의 열혈팬을 자처했다.
이날 공연에 대해서도 “한 곡 한 곡 애정을 가득 담아 연주를 하시는 모습이 인상깊었고, 밴드와의 호흡도 훌륭했다”며 “세월이 흘러도 음악에 대한 열정과 투자를 아끼지 않는 모습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선배님처럼 늘 초심을 잃지 않고 음악에 대한 열정을 잃지 말아야겠다고 생각을 하게 됐다. 커리어를 쌓은 후 선배님처럼 연주음반을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무대를 마친 김영균은 “선생님께서 매번 공연을 할 때마다 이루고 싶은 꿈이 있고, 가야만 하는 길이 있지만 그러지 못하는 후배들에게 많은 용기와 희망을 주고있다고 생각한다”며 “동료들도 이번 공연을 보고나서 많은 영감을 받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려는 용기를 가지는 모습을 보게 됐다. 이런 공연을 함께 한다는 것, 나아가 한국 대중음악의 다양성을 제시하고 발전하는 역할에 조금이나마 함께 하고 있다는 점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다.
공연을 위해 준비해온 5개월 간의 합주기간은 이틀 간의 공연으로 끝이 났다. 최희선은 “공연을 끝냈으니 이제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쫑파티 자리에서 바로 다음 공연을 생각했다”고 말했다. 이미 39년째 정상을 지킨 거장, 멈추지 않는 기타리스트 최희선의 전성기는 지금부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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