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깊고 진했다. 절절하기까지 했다. 시한부 삶을 사는 60대 남자의 사랑. “멜로가 나온다길래 믿지 않았어요.” ‘춘향전’의 ‘로맨틱한 변학도’ 정도로 생각했다고 한다. 서른 다섯 이상 차이나는 상대와의 진한 멜로 연기로 ‘할배 파탈’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아주 재밌고 신기해요.”

최근 MBC 50부작 드라마 ‘화려한 유혹’을 마쳤다. 드라마는 방영 중이지만, 정진영(52)은 흔치 않은 중년의 멜로를 보여준 뒤 드라마를 먼저 떠났다. “연애하고 사랑하고 결혼하고 죽음을 맞은 거죠.”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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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여행을 다녀왔다. “혼자 빠져나온 서운함”을 정리하고 털어버리려 떠난 여행이었다. 드라마를 끝내고 인터뷰를 시작하니, 강석현의 감정이 되살아나고 있었다. “영화는 시작 전 홍보를 위해 인터뷰를 하는데, 드라마는 끝나고 하더라고요. 끝났는데 무슨 홍보를 하나 그런 생각도 했죠.”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정진영(52)을 만났다.

“배우는 언제나 멜로를 꿈꿔요. 순백의 감정이죠. 상대방을 사랑하고 폭 빠지면 되니까.”

정진영에게 멜로 연기를 할 기회는 많지 않았다. KBS 2TV 드라마 ‘사랑비’ 정도. 숱한 영화에서 선 굵은 연기를 선보였던 그에게도 이번 드라마는 “놀랍고 재밌는” 경험이었다.

“달달한 장면은 전혀 예상치 못했어요. 서른 다섯 이상 차이나는 여성과의 사랑이 오히려 부담스러웠어요. 결혼까지 가는 것이 가능할까 생각했죠. 객관적으로 볼 때 그 정도 나이 차이에 연정을 갖고 결혼을 하는 건 90% 이상이 거부감이 들 거예요. 그래도 배우의 의무이니 열심히 사랑을 했어요.”

피도 눈물도 없던 악인이 사랑을 시작하자 드라마는 그림이 달라졌다. 처음엔 의심이 먼저였다. 어린 여자에게서 과거 연인의 모습을 봤고, 그 여자를 끊임없이 의심하며 감시했다. “사랑은 상대에 대한 관심에서 시작하죠. 의심만큼 진한 관심이 어디 있겠어요. 시청자들은 그 의심을 멜로로 보더라고요.”

드라마를 마치고 나서야 정진영은 강석현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뒤늦게 곱씹고 해석했다고 한다. “배우는 감정으로 자신을 정리하는 사람이에요. 말이 안 되는 감정도 배우의 임무이고, 배우의 일이죠. 캐릭터에 대한 논리적인 추론은 할 필요도 없고 해서도 안 돼요.”

연기를 마친 뒤 돌아보니 정진영이 연기한 강석현에게 어린 여자 은수(최강희)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을 비추는 거울”이었다고 한다. 인간 정진영에게도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나고 보는 모든 사람들이 거울이고 교사”라고 한다. “그 거울을 통해 자신을 객관화해야죠. 자신을 닫아버리는 것이 병이에요. 난 무엇이라고 고정시키는 순간 고집쟁이가 되거나 오만해지거든요. 꼰대가 되지 않는게 제 목표죠.”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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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 초반에 만난 ‘화려한 유혹’과 그 안에서의 진한 멜로 연기는 정진영에게도 잊지 못할 기억이었다.

지난 2~3년 사이 그에겐 50대 사춘기, ‘갱년기’가 찾아왔다 “허무하고 외롭고 따돌림을 당하는 듯한 느낌이랄까요.” 두 편의 영화를 찍었고, 드라마도 했지만 “그 연령대의 생명체가 갖는 그런 동일한 상태”가 지속됐다. 그 덕에 자신을 돌아보던 시간을 가졌다.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겠다는 여유가 생길 무렵 만난 첫 작품이에요.”

1988년 스물셋에 연극 ‘대결’로 데뷔해 30년 가까이 연기를 했다. 한 해 한 해 배우로서의 연기도 감정도 달라지고 있다. “배우는 감정을 느끼는 존재이기에 사람에 대한 관심이 필요한 직업이에요. 풍부한 세상경험, 인간과의 만남이 배우에겐 많은 도움이 돼요. 30대보단 더 넓어졌을 거예요. 기쁨을 이해하기 보단 더 많은 아픔을 이해하게 된 것 같아요. 20년 동안 더 많은 아픔을 만나고 봐왔으니까요.”

사실 정진영은 논리적인 연기 방식과 분석, 추적을 좋아하는 배우였다고 한다. 대학시절부터 그런 훈련과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갱년기를 겪은 변화의 과정을 겪었다. “지난해부터 연기는 감정이다. 감정을 어떻게 느끼느냐가 가장 중요하다는 걸 알았다”고 그는 이야기했다.

사진=윤병찬 기자/yoon4698@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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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다 아는 걸 이제야 알게됐죠. ‘화려한 유혹’으로 생각지도 못한 별명을 얻었어요. 이 고마움이 영원하다는 생각은 하지 않으려고 해요. 전 화려하게 주목받던 배우도 아니었고, 지금도 그래요. 그것을 향해 연기할 생각은 없어요. 제게 배우라는 직업이 가장으로서 경제생활을 하는 데 재화를 버는 일로만 생각했다면, 재밌게 할 수 없었을 것 같아요. 배우를 할 수 없었다면 닿지 않았던 세계를 알아가고 있어요. 재능은 부족하지만, 조금씩 넓혀가는 것, 그렇게 살고 있어요. 그런 배우가 되고 싶고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