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한ㆍ일 외교당국의 담판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일본 정부는 “강제 동원한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며 법적 책임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의 생생한 증언은 부정할 수 없는, 살아있는 ‘역사의 증거’다. 이들의 증언은 이후 쿠마라스와미 유엔 여성폭력 특별보고관과 게이 맥두걸 유엔 인권소위 특별보고관 보고서가 일본 정부에게 법적 책임을 인정하고 배상을 권고한 기반이 됐다.
▶최초의 증언, 김학순 할머니=“당신들 조선인 스파이지, 이쪽으로 와라.” 북경 한 식당에서 양아버지를 불러세운 일본인 장교의 한 마디가 고(故) 김학순(73세 별세) 할머니의 일본군 위안부 생활의 시작을 알렸다.
중국 북경에 돈을 벌러 갔던 김 할머니는 언니와 함께 군 트럭에 실려 만주의 한 일본인 부대 근처 위안소로 끌려갔다. 첫날밤 양아버지를 끌고갔던 장교를 시작으로 일본군인을 하루에 7~8명씩 상대해야 했다.
“한번 들어와서 30분 정도 사람을 곤죽으로 만들기도 했지.” 어떤 때는 비위가 틀려 반항이라도 하면 늘어지게 맞았다. 생리를 할 때 쯤이면 솜을 말아 피가 밖으로 새어 나오지 않게 깊이 넣고 군인들을 받아야 했다. 나중에 솜이 나오지 않아 고생할 때는 짐승만도 못한 삶에 설움이 복받쳤다. 할머니는 4개월 만에야 조선인 남자를 만나 위안소를 탈출했다.
김 할머니는 1991년 일본정부가 “위안부 제도는 ‘없는 일’”이라고 부정하는데 분개해 처음으로 증언을 했다. 김 할머니가 최초로 증언을 하면서 뒤이어 많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자신이 겪은 일을 생생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의 ‘살아있는 증거’들이 제시되자 일본 정부는 실태 조사에 착수했고 이를 토대로 1993년 이른바 ‘고노담화’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학교 보내준다 해서 얼마나 좋았는데” 이옥선 할머니=“학교를 보내달라”며 보채던 이옥선(88) 할머니가 15살이 되던 해 어느 날. 어머니는 이 할머니를 부산의 한 집에 수양보냈다. 그러나 이 할머니를 입양한 곳은 부산의 우동집. 그곳에서 식모로 일하던 이 할머니는 울산의 한 술집에서 트럭에 실려 중국 만주 투먼의 한 비행장에 내려졌다.
전기가 흐르는 철조망에 둘러싸여 비행장을 닦던 이 할머니는 인근 위안소로 끌려갔다. 몸이 아파도, 성병에 걸려도 군인들을 상대하는 일은 멈추지 않았다. 일본군은 이 할머니의 성병이 낫지 않자 수은 증기를 쐬게 했다. 결국 이 할머니는 영영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됐다. 1945년 8월 해방 때까지 이 할머니의 위안소 생활은 계속됐다.
▶“길원옥 할머니, 오래오래 사세요”=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서는 길원옥(87) 할머니의 한국 나이 88세 생일을 기념한 ‘미수연(米壽宴)’이 열렸다. 길 할머니는 열 세살과 열 다섯살, 두번이나 위안소로 끌려갔던 기구한 삶을 살았다.
길 할머니는 고물상을 하다 장물 거래를 한 혐의로 감옥에 간 아버지의 벌금은 내겠다고 나섰다가 중국 하얼빈의 한 위안소로 끌려갔다. 열 세살 길 할머니의 가녀린 몸은 제대로 걷지도 못하게 망가져 평양 고향집으로 돌아왔다.
일본 군수공장에서 일하던 길 할머니는 돈을 많이 벌수 있다는 얘기에 다시 중국으로 갔다. 그러나 도착한 곳은 도키와라고 불리는 위안소였다. “사람이 죽거나 말거나 제 욕심 채우기로 하니까 힘이 들지. 얼른 끝내지도 않고 애를 먹이는 게 제일 큰 욕이었지.”
하루에도 수많은 군인들을 받는 것이 힘들어 반항을 하자 한 군인이 칼집으로 길 할머니의 정수리를 내리쳤다. 1944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받았지만 길 할머니는 해방이 되고서야 조국 땅을 밟을 수 있었다.
이처럼 위안부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으로 일본군의 만행이 드러나자 일본 정부는 관련 기록이 유네스코(UNESCO) 기록문화 유산으로 등재되는 것을 막기 위해 10%에 달하는 유네스코 분담금을 중단하겠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지난 10월 중국 정부가 한국 정부와 공조해 위안부 관련 기록물을 등재하려 했지만 유네스코 측은 “다른 피해국과 공동 제출해 달라”며 등재를 보류한 바 있다.
why37@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