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년 전 신춘문예 단편소설 수상작으로 ‘그날 저녁, 그는 어디로 갔을까?’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었다. 소설 주인공이 운전 도중 버스에서 급하게 내려 근처 건물의 화장실에 들르게 되는데, 돌아왔을 때 자신이 몰던 버스가 사라져버리고 없는 것이다. 배설하는 짧은 순간동안 벌어진 사건인데, 더욱 황당한 것은 버스뿐만 아니라 직장과 가족을 차례로 잃게 되는 것이다.
폴란드 여행 중에 여러 번 버스를 타게 되었다. 다른 유럽국가에서는 보지 못하던 풍경으로, 우리나라 젊은이들처럼 폴란드에서도 젊은이들이 노인들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나이 드신 분들도 더 연로한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모습이 심심찮게 눈에 들어왔다. 더 인상 깊은 것은 유모차를 끌고 버스를 타는 모습이었다. 아무런 제재나 불편함 없이 유모차와 함께 버스에 오른 아기 엄마들은 정해진 위치에 유모차를 묶어세우고 안전하고 자연스럽게 이동해갔다.
하루는 휠체어를 탄 장애인이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유모차는 아기 엄마가 끌어올린다지만, 휠체어가 버스에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지 걱정스러웠다. 휠체어는 노란 선에 대기하고 있었다. 여러 버스들 중에 그가 타려는 버스가 정확하게 그 앞에 멈춰 섰다.(기사와 주고받는 사인이 있는 것일까?) 그때 운전기사가 버스에서 내려서는 것이었다. 버스 출입문 아래에서 발판이 움직이더니 그것이 확장되어 땅에 걸쳐져 길이 만들어졌고, 기사가 휠체어를 밀어 버스에 태우는 것이었다. 기사의 태도는 진중하고 배려가 스며 있었다. 승객들은 조용히 곁에서 기다렸다. 장애인은 “진 쿠예(감사합니다)”라고 말했고, 버스기사는 “니에 마 자 초(천만에요!)”라고 답했다. 휠체어는 유모차가 서 있던 그 위치에 가서 자리를 잡아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되지 않았다.
신춘문예 단편소설이 생각난 것은 장애인을 위해 버스에서 내려서는 폴란드 버스기사를 보고 난 뒤였다. 단편소설의 내용은 환상에 근거하여 가족과 일을 제거하면 ‘나’를 증명해주는 것이 아무 것도 남지 않는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소설 끝부분에서 주인공 환영은 ‘나’가 누군지 몰라 하며 환영(幻影)처럼 멍하니 서 있다. 소설을 읽을 당시에는 가족과 일의 시스템 속에서 ‘나’라는 존재를 잃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읽었던 것 같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폴란드 기사를 보면서, 감동스런 것은 도움을 주는 쪽이나 도움을 받는 쪽이나 당당했다는 점이다. 순간 단편소설이 다른 의미로 다가섰다. 소설에서 던진 화두처럼 ‘나’가 누군지 알기 위해서는 ‘나’가 더 깊숙하게 타인과 관계를 맺을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가족과 일과 관련된 일뿐만 아니라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말이다. 물론 폴란드 버스기사에게는 장애인을 태우는 것까지가 그의 일이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버스의 구조와 폴란드인들의 배려는 ‘나’만을 위해 일하는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은 결코 아니었다. 약한 사람들을 염두에 둔 문화적인 행동과 실천이 생활 깊숙이 뿌리내려 있었다.
순간 소설의 속뜻처럼 가족과 자신의 일만을 위해 먹고 배설하는 인간이 되어서는 안 될 것 같다는 감정이 몰려왔다. 새해에는 타인을 위해서 기꺼이 자신의 자리에서 잠시 내려설 수 있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