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황혜진ㆍ김우영 기자] “2005년이나 지금이나 보면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다. 엊그제만 해도 여신규모에서 1위를 달릴 정도로 잘 나가고 있었는데 하루 아침에 매각해야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선진금융기법을 도입해야 한다는 당위성 아래 ‘제일은행’은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꼭 10년이 지났지만, 지금 과연 선진금융기법이 한국 금융산업을 바꿔 놓았나 보면 아직도 의구심이 든다. 지금도 한국엔 ‘금융’이 없다”

한 제일은행 출신 금융권 관계자의 말에는 ‘금융이 없어 금융이 망한’ 한국금융의 슬픈 역사의 흔적이 남아 있다. 10여년전만 해도 어느 누구도 토를 달지 못했던 ‘조상제한서’(조흥ㆍ상업ㆍ제일ㆍ한일ㆍ서울)가 ‘신우하국’(신한ㆍ우리ㆍ하나ㆍ국민)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정치권의 눈치를 보고, 정치권의 말 한마디에 일사분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금융권의 처지는 바뀌지 않았다는 것이다.

1997년 당시 27개였던 은행 가운데 14개가 사라졌다. 연배를 존중하듯 영원히 지켜질 것 같았던 ‘조상제한서’도 이젠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1992년 평화은행 이후 새로 문을 연 은행은 단 한 곳도 없다. 퇴출 혹은 합종연횡만 있었다. 은행권에 ‘메기’는 한 마리도 없었다는 애기다. 증권가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유수의 증권사가 문을 닫거나 간판을 바꿔 달았다. 동양증권을 시작해 삼보증권과 합병해 탄생한 대우증권은 우여곡절 끝에 KDB대우증권으로 이름을 바꾼 뒤 또 다시 주인을 찾고 있다. 1983년 럭키증권으로 시작한 LG그룹의 증권사(史)는 우리증권과 합병을 거쳐 올해 NH농협증권으로 인수되며 이름을 세 번이나 바꾸기도 했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이에 대해 “망한 금융사엔 공통점이 있다”며 “금융이란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1998년 6월 이헌재 당시 금융감독위원장이 대동ㆍ동남ㆍ동화ㆍ경기ㆍ충청은행 등 5개 은행을 퇴출시키겠다고 발표할 당시만 해도 시장이 아연실색했다”면서도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이는 금융이 없어 망하는 한국금융사 인수합병의 신호탄일 뿐이었다”고 회고했다.

금융이란 본연의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관치금융에 휘둘려 제대로된 평가없이 부실 대기업에 막대한 자금을 퍼 준 게 화근이었다. 적절한 포트폴리오와 한도구성으로 자금을 지원해야 했지만 대기업에 편중된 자금지원으로 익스포저가 한쪽으로 몰리면서 외부 충격 한방에 무너졌다. 뇌물 등 각종 비리에 연루된 은행장들까지 구속되는 등 내부통제에도 심각한 문제를 드러냈다. 안정성을 제 1덕목으로 한다는 금융사지만 풍전등화처럼 흔들렸다.

문제는 지금도 이런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정부의 간섭은 방식을 바꾸었을 뿐 계속되고 있다“며 “ ‘자율성주겠다’ ‘여신관리 철저히 하라’면서 ‘비우는데 우산 뺏지 말라’는 식의 말을 하는 건 그 전과 달라진 게 없다는 얘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다른 금융권 고위 관계자는 “기술금융은 그렇다 치고, 금융권이 일자리 창출에 일조한게 없다는 정치권의 목소리에 금융지주 회장들이 연봉을 반납하고 그 돈으로 일자리를 만들겠다고 하는 지금의 상황은 10년전이나 똑같다”며 “이렇게 해선 금융 선진국은 커녕 또 다시 먹고 먹히는 일이 무한반복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된다”고 토로했다.

갈수록 치열해지는 금융사간 경쟁도 은행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 또 다른 금융권 관계자는 “이제 연조나 서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수익성과 고객서비스, 주식가치가 1등을 평가하는 지표다. 무한 경쟁시대인만큼 앞으로도 금융기관의 흥망성쇠는 계속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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