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서경원ㆍ이세진 기자] #1. 서울에 사는 주부 양모(37) 씨는 지은지 9년 된 아파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지난주 윗층 주민이 갑자기 현관문을 두드려 열어줬더니 다짜고짜 욕을 한 바가지 하는 것이었다. 듣자하니 양씨의 베란다 에어컨 실외기에서 올라온 열기로 자신의 집이 더워져 못 살겠다는 이유였다. 양씨는 얼떨결에 ‘죄송하다. 사용을 자제하겠다’고 돌려보냈지만 잘못한 것 없이 봉변을 당한 것 같아 뒤늦게 화가 났다. 마땅히 하소연할 곳도 없어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연락을 해봤지만 ‘날씨가 더우니 서로 조심하며 살아야지 어쩌겠느냐’는 답변밖엔 들을 수 없었다. 양씨는 “윗집 애들이 뛰어도 참고 살아줬는데, 갑자기 우리집을 민폐 주민으로 몰아세웠다”고 말했다.
#2. 경기도 수원에 사는 임산부 이모(27) 씨는 아파트 윗집 에어컨 실외기 때문에 이번주 거의 잠을 설쳤다. 자정 넘은 시각까지 돌아가는 팬 소리가 오래된 연식 탓인지 적막한 밤에는 더욱 크게 들렸기 때문이다. 이씨는 “임신 24주차인데 자려고 침대에 누우면 ‘왕왕왕’하며 돌아가는 팬 소리가 돌아갔다 멈췄다를 반복하면서 신경을 곤두서게 만든다”며 “구청에 민원을 넣어서 실외기 위치 조정을 해달라고 연락해 놓은 상태”라고 말했다. 이씨는 윗집이 평소 늦은 시각까지 세탁기를 돌리고 베란다에서 매일 이불을 털어 먼지가 자신의 집에 들어오는 것까진 이해할 수 있었지만, 밤늦게까지 들려오는 실외기 소음은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올여름 최악의 폭염이 이어지면서 에어컨 실외기가 이웃 갈등의 새로운 복병으로 떠올랐다.
폭염에 열대야로 에어컨 사용량이 급증하면서 주로 아파트 베란다에 설치되는 실외기가 골칫덩이가 되고 있다.
여기서 발생되는 소음, 열기, 물방울이 층간소음 못지않은 다툼의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에 거주하는 정모(35) 씨는 “얼마 전 1층에 새로 집을 사서 들어온 사람이 있는데 1층이라 습해서 그런지 새벽 다섯 시부터 에어컨을 트는데 거의 공장 기계 돌아가는 수준”이라며 “층간소음으로 살인 난다고 하는데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알 것 같다”고 밝혔다.
소음이나 진동으로 인한 분쟁신청 건수는 매해 증가 추세에 있다.
환경부 중앙환경분쟁조정위원회에 따르면 진동·소음으로 인한 분쟁신청은 지난 2013년 152건을 기록한 뒤 작년엔 202건으로 늘었다.
그만큼 아무리 이웃이라도 시끄러운 소리를 더 이상 용인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가 형성되고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에어컨 실외기 갈등을 해결을 위해 강제력이 수반된 방안은 법률 소송 외엔 없는 상태이다.
구청 등 해당 지방자치단체에 민원을 넣을 수 있지만 이 역시 조정 권고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
분쟁조정위 관계자는 “실외기의 경우 더운 바람이나 떨어지는 물방울 자체에 유해물질이 섞여 있는 건 아니기 때문에 공식적인 분쟁조정 대상이 안 되고 있다”며 “관리사무소에 연락하고 조정이 안될 경우 지자체에 민원을 넣는 식으로 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앞으로 실외기뿐 아니라 이웃간 갈등 요인이 점차 다변화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에 따라 선진국처럼 갈등을 중재하거나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 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서울 YMCA 이웃분쟁조정센터의 주건일 팀장은 “싱가포르는 법체계에 따라 주민분쟁센터가 운영되고 있고, 미국은 총 400여개의 네이버후드 저스티스 센터(neighborhood justice center·이웃정의센터)가 있는데 우리나라엔 이런 제도가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우리도 센터를 방문하면 자신의 이야기를 터놓게 됨으로써 어떤 잠재적 두려움이 있는지 듣고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gil@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