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원호연 기자]12월 은행권을 시작으로 비대면 계좌 개설이 가능해지면서 직접 은행을 가지 않고도 금융상품에 가입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사실상 은행 없이 은행 업무를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 순이자마진으로 허덕이고 있는 시중은행 입장에선 점포수와 직원 수를 늘리지 않고도 신규 고객층을 확보할 수 있어 수익성에도 도움이 될 전망이다.

하지만 ‘비대면 실명확인’은 지난 1993년 전격 도입된 ‘금융실명제’의 근간을 흔들 뿐 아니라, 대포통장 관리가 어려워져 금융사기를 오히려 늘릴 수 있다는 점에서 이에 대한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비대면 실명확인’ 반기는 은행, 속내는?=금융위원회는 지난 18일 ▷신분증 사본 제시 ▷영상통화 ▷현금카드 전달시 신분 확인 ▷기존 계좌 이용 등 4가지 방식 가운데 2가지를 의무적으로 선택하고 다른 방식을 추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비대면 실명 확인 방안을 제시했다. 1993년 ‘금융실명제’ 도입 당시 실명 확인은 대면으로 해야 한다는 유권해석을 22년 만에 바꾼 것이다.

이같은 금융위 방안에 시중은행들은 반색하는 분위기다. 앞서 시중은행장들은 지난달 임종룡 금융위원장과의 간담회에서 비대면 계좌개설을 허용해 줄 것을 건의한 바 있다.

그 이면에는 은행권의 수익성 악화가 있다. 최근 기준금리 1%대의 초저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은행의 예대마진 폭이 줄어들었고 이는 은행 순이자마진(NIM) 하락으로 이어졌다. 지난 1분기 국내은행의 NIM은 1.63%까지 내려앉았다.

시중은행 관계자는 “은행 입장에선 수익성을 회복하려면 신규 고객층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 때 점포수와 직원 수를 유지 혹은 늘려야 한다는 것이 걸림돌이었다”며 “비대면 실명확인이 가능해지면서 이같은 고민이 덜어진 것“이라며 금융위의 결정을 반겼다.

특히 지방은행의 경우엔 전국은행으로 갈 수 있는 날개를 달았다는 분석도 나오고 있다. 비대면 실명확인이 영업권 외 지역에 거주하는 잠재고객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신규 채널이 될 수 있다는 것.

지방은행 관계자는 “그동안 다이렉트 뱅킹 등 금융상품 가입의 문턱을 낮추는 작업을 계속해 왔지만 기본적으로 지점을 기반으로 해 한계가 있었다”면서 “비대면 실명확인이 가능해지면서 사실상 온라인을 통해 전국영업이 가능해진 것”이라고 기대감을 내비쳤다.

▶비대면 실명확인의 그늘…대포통장 발급에 금융사기 어쩌나=비대면 실명확인에 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포통장 발급 가능성이 높아진 점은 대표적인 그림자다.

보안성을 높이기 위해 2개의 실명확인 방법을 중복 시행토록 했지만 그동안 신분증으로 실명확인을 해온 관행상 ‘신분증 사본 전송+α’가 대세가 될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신분증 사본이 진짜 해당 고객의 신분증이냐는 점. 현재 은행은 행정자치부, 경찰청의 관련 DB를 통해 주민등록증과 운전면허증의 발행일자를 확인하는 방법으로 신분증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고 있다. 금융사기범이 훔치거나 분실 신분증을 습득한 뒤 신분증의 원래 주인이 재발급을 신청하기 전에 사진만 바꿔친 위조 신분증을 제작하고 이를 은행에 보내 통장 개설을 시도하면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이 은행 관계자의 설명이다.

타 금융사에서 이미 개설된 계좌에서 소액을 이체하는 방법으로 거래 권한을 확인 하는 방법의 경우 적용이 간단하지만 노숙자의 휴면계좌를 이용해 명의를 도용하거나 한개의 대포통장으로 복수의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대포통장은 보이스피싱이나 파밍 등 신종 금융사기에 악용될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지난 1월부터 통장 명의자가 사기범과 직접 창구를 방문해 통장을 개설하고 이를 사기범에게 파는 수법이 횡행하고 있다는 점도 문제. 시중 은행들은 이를 막기 위해 자신의 통장 개설 내용을 동행인과 상의하는 등 수상한 행동을 보이는 고객에 대해서 추가적인 서류 제출을 요구하거나 기존 거래 이력을 확인하는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지만, 비대면 통장 거래가 허용될 경우 이같은 대응이 전혀 불가능해진다.

금융위는 이에 대해 “대포통장은 주로 명의자가 계좌를 개설해 대가를 받고 양도하는 경우가 많아 비대면 방식으로 실명확인을 한다고 늘어나진 않을 것으로 본다”면서도 “자체 또는 외부 검증 테스트 과정을 충분히 거쳐 금융 사기 가능성이 최소화 되도록 유관기관이 합동으로 사전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이라고 밝혔다.

대포통장 등 금융사기가 활개를 칠 수 있다는 우려감에 금융당국은 짧은 시간 안에 여러 통장을 개설하거나 대부업자 같은 의심 직업군 고객에 대해선 신분확인 절차를 강화한다는 방침이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이와 관련 “비대면 실명확인을 허용한 뒤 명의도용이나 대포통장 개설 같은 부작용을 막기 위해 고위험 고객군에는 한층 강화된 실명확인 기준을 적용하는 등의 대책을 마련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대부업자나 외국인, 법인 등 자금세탁 고위험 고객군에는 사정이 여의치 않을 경우 창구를 직접 방문해 실명을 확인토록 강제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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