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MBC ‘킬미 힐미’는 배우 지성의 ‘원맨쇼’라 해도 무리가 없을 만큼 남자 주인공이 돋보이는 드라마다. 남자 주인공이라고 해서 누구나 돋보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여곡절 끝에 찾게 된 연기파 배우의 진가가 ‘로코’의 탈을 쓴 이 드라마를 통해 빛을 발한다.
지성은 MBC 수목드라마 ‘킬미 힐미’에서 7개의 인격을 가진 극중 인물을 소화하고 있다. 1인 2역도 어려운 마당에 1인 7역이라니, 20대 한류배우들의 손을 탔던 ‘킬미 힐미’는 제작 단계에서 마땅한 남자 배우를 캐스팅하지 못해 난항을 겪었다.
뒤늦게 캐스팅된 지성은 젠틀한 재벌2세 차도현, 나쁜 남자 신세기, 능청스런 전라도 사나이 페리박, 자살 중독 고교생 안요섭 등 다채로운 캐릭터를 60분 내내 선보이고 있다. 지성 안의 지성은 너무도 많은데, 21일 방송분까지는 총 4개의 인격이 공개됐다.
다소 우스꽝스럽게 보여도 컴퓨터그래픽(CG)을 통해 눈빛이 달라지면 새로운 인격이 출몰한다. 드라마가 굳이 CG까지 활용해 여러 인격을 보여주는 것은 첫회 방송분에서 ‘나쁜 남자’ 신세기가 오리진(황정음 분)에게 “기억해. 2015년1월7일 오후 10시 정각, 내가 너한테 반한 시각”, “이 눈빛을 기억해”라는 대사에서도 유추할 수 있다.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지성은 배우답게 눈빛을 바꾸며 서로 다른 인격을 소화한다. 외롭게 자신을 지키려는 ‘착한 남자’ 차도현의 눈은 긴 대사가 없어도 슬픔이 비치고, 어떻게는 몸의 주인이 되려는 ‘나쁜 남자’ 신세기의 눈은 적개심과 분노가 가득하다. 잠깐이라도 자유를 갖는 것이 행복한 제3인격 페리박의 눈엔 장난기가 넘친다.
5회 방송분에선 지성의 3단 콤보 ‘인격 바꾸기’가 물 흐르듯 이어졌다. 신세기에서 차도현으로, 차도현은 페리박으로, 페리박은 다시 차도현으로 변해갔다. 놀랍게도 그 장면은 ‘멜로’ 안에서 그려졌다. 오리진을 향해 무조건 ‘직진’하는 신세기가 “차도현을 없애달라”며 ‘짝사랑 오리진’에게 입을 맞추는 순간 사랑에 서툰 신세기의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폭력 성향이 강한 제2인격 신세기는 자신의 ‘눈물’로 인해 사라지고 ‘몸의 주인’ 차도현이 다시 등장했다. 발랄한 정신과의사 오리진은 ‘나쁜 남자’ 신세기로 시작해 ‘착한 남자’ 차도현으로 입맞춤을 끝내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마주했다.
당혹스럽기는 차도현도 마찬가지다. 신세기와 오리진의 키스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오리진에게로 끌리는 마음을 부정하는 차도현의 몸은 제3인격 페리박이 가로챘다. 전라도 사나이 페리박은 현재형 인간이다. 구수한 사투리를 쏟아내며 잠시 찾아온 자유의 시간을 만끽하지만 그 시간은 지나치게 짧다. “염병! 시간이 너무 짧자네, 으메, 대갈빡이여. 나 죽네. 좀만 더 놀고 싶은디!”라며 제1인격 차도현에게 몸을 내줘야하는 페리박의 절규 역시 일품이었다. 제목 그대로, ‘죽여야 살 수 있는’ 외로운 싸움을 지성 혼자 꿋꿋하게 해내고 있다.
지성의 훨훨 나는 연기에 일각에서는 1인 7역이니 출연료 역시 일곱 명의 몫을 줘야하는게 아니냐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복잡다단한 캐릭터를 한 사람이 연기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것도 사실이지만, 지성의 ‘킬미힐미’로 인해 이제는 드라마 속 단일캐릭터는 심심할 지경이다.
2013년 KBS2 ‘비밀’로 그해 연기대상 최우수상을 가져갔던 지성은 ‘킬미 힐미’를 통해 한꺼번에 다채로운 모습을 쏟아내며 눈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다. 요즘 지성의 연기를 보면 수많은 브라운관 스타들과는 다른 점이 눈에 띈다. 연기를 하고 있는 연예인 혹은 스타가 아닌 연기를 업으로 삼은 직업인이라는 인상까지 준다. 한 드라마 관계자는 “지성씨는 자신을 스타가 아닌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며 “그런 만큼 주어진 캐릭터는 책임감을 가지고 연기하며 완성도를 높인다. 연예인이 아닌 배우로의 직업정신이 크다”고 말했다. 어떤 한 사람이 도드라지기 보단 조화를 이뤄야 하는 드라마 안에서 지성은 자신의 역할에 맞는 크기로 제 몫을 소화한다. “드라마에선 각자의 사이즈가 있다”는 이른바 ‘사이즈론’을 늘상 강조하는 배우 황정음에 따르자면 지성은 “욕심이 없다. 아니 욕심을 내기도 하는데, 상대 배우를 배려해가면서 한다는 걸 아니까 함께 하는 것이 늘 고맙고 즐거울 수밖에 없다”고 했다.
지성은 일곱 가지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 다른 작품보다 즐겁다고 한다. 20일 진행된 드라마 기자간담회에서 지성은 이런 이야기를 했다.
“모든 가족이 보는 드라마 시간대에 다중인격 캐릭터가 나와 주인공을 하고 있다는 부분이 안타깝죠. 어찌 보면 요즘 어딘가에 문제가 있으니까 일탈처럼 아름답게 이겨내고자 하는 작가님의 의도가 있다고 봅니다. 뉴스를 봐도 뉴스는 보지 않아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안 좋은 소식밖에 없고, 상식 이하의 소식들도 많다 보니 가치관의 혼란이 들 때도 있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연 어디에 발 붙이고 살아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예요. 제가 배우로서 할 수 있는게 과연 무엇이 있을까 생각합니다. 힘든 사람을 도와줄까, 그럼 나는 안 힘든가, 나도 이 나라의 국민일뿐이데…라는 생각도 합니다. 다만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을 했을 때 픽션의 세계에서 대리만족을 드리고 응원하는 것이 배우로서 힘을 드리는 가장 큰 일이라고 생각이 들었어요. 여러 인격이 나오는 이 같은 드라마들은 단순히 시청자들을 끌어들이기 위한 재미 위주의 아니라 책임감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을 보면 존경스럽다는 생각이 들어요. 드라마가 감독님의 가치관을 담고 있어요. 저희한테 그걸 설명해주시고 한 신 한 신 이야기할 때, 정말 재밌는 신을 말하면서도 우세요. 그런 부분이 저희한텐 또 다른 감동이예요. ‘그래, 일을 이렇게만 하면 얼마나 좋을까’라는 생각이 들죠. 드라마를 끝내고 나면 힘들게 사는 상황, 이 세상 속에 뭔가 한 가지는 한 것 같다는 보람이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촬영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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