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 제2 도시, 나주식 쪽빛염색·안동식 가면극
대성당 유럽 풍경사이 ‘양배추시장’ 친근한 미소
길놀이 퍼레이드·전통공연·오페라 동양적 색채
감자탕 소뼈 ‘메로우’, 육회·마늘빵 조합 ‘타타르’
체코 제2도시 브르노는 고색창연한 유럽 헤리티지 건축물 사이로 싱싱한 야채 광장시장이 있고, 시민들 표정에서 동양적인 인정이 묻어나는 곳이다. 체코는 크게 보면 서부 보헤미아와 동부 모라비아로 나뉘는데, 보헤미아의 중심이 프라하라면 모라비아의 중심은 바로 브르노다.
모라비아는 겉으로 보기에는 전형적인 유럽 풍경처럼 보이지만, 그 속에는 나주식 쪽빛 염색 공예와 안동 식 가면극 등 동양적 색채가 가미돼 이채롭다. 브르노 근교 블치노프 등지에선 길놀이 퍼레이드도 열린다. 주말이 되면 청소년들은 브르노 시내 한복판에서 전통 공연을 한다. 마치 진도의 ‘토요민속여행’ 처럼....
성당이 오전 11시에 종을 치는 이유
브르노는 체코 출신 3대 음악가 중 한 명인 레오시 야나체크가 동양적 색채를 띤 모라비아 민속을 기반으로 오페라를 만들어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곳이다. 또 수도사이자 유전학자였던 그레고어 멘델이 성 토마스 수도원에 완두콩을 심어 유전학의 큰 족적을 이룬 곳이기도 하다.
프라하, 체스키크룸로프 등 보헤미아 여행에 익숙한 여행자라면 브르노 등 동부 모라비아는 전혀 다른 국가를 여행하는 듯한 기분이 들 정도로 서부 지역과 분위기가 다르다.
물론 브르노의 도시 풍경은 시내 곳곳에 있는 중세에서 근대까지 세워진 유럽 건축물 덕에 고즈넉하다. 대표적인 랜드마크는 두 개의 첨답을 가진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대성당이다. 17세기 스웨덴의 침공을 받았을 때 피를 흘리지 않고 돌려보낸 모라비아인의 지혜를 품고 있다.
스웨덴군은 브르노를 포위한 뒤 “지금부터 3개월 2주 뒤, 정오에 성당의 종이 울릴 때까지 점령할 수 없다면 떠나겠다”고 통첩한다. 스웨덴군의 총공세가 극에 달하며 브르노가 함락 위기에 직면하자 브르노 민관군은 꾀를 낸다. 성당의 종을 1시간 앞당겨 오전 11시에 울린 것이다. 스웨덴군은 브르노를 점령하기 직전이었지만 종이 울리자 약속대로 떠났다. 지금도 이 성당의 종은 정오가 아니라 오전 11시에 울린다.
성스러운 시간인 오전 11시 정각이 되면 시내 한복판 총알 모양의 천문시계 주변이 분주해진다. 손을 겨우 넣을 수 있는 작은 공간에 행운을 상징하는 유리구슬 하나가 나오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이 구슬을 잡으러 사람들이 몰려 1시간 이상 대기를 할 정도라서, 웬만해서는 그 시간에 천문시계 근처에 접근하기는 쉽지 않다.
사연 많은 빌라 투겐다트·슈필베르크 성...
유럽의 남북과 아시아·유럽적 요소를 잇는 브르노는 늘 많은 제국이 탐내던 곳이었고, 그만큼 희생자도 많았다.
성 야곱 성당은 마늘처럼 생긴 슬라브식 지붕 아치 위에 92m의 첨탑을 갖고 있을 갖고 있어 브르노시내 어디에서든 볼 수 있다. 이곳에는 유골 5만구의 납골당이 있어, 브르노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빌라 투겐다트에서는 모라비아 사람의 우직한 지혜가 엿보인다. 체코 건축가 루드비히 미스 반 데어 로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기둥에 강철을 사용했고, 현대식 에어컨, 난방장치 시스템, 전기로 개폐를 조정하는 창문 등 획기적인 기술을 적용했다.
바로크·로코코식 멋부리기에 그치지 않고 멋과 ‘기능주의’를 모두 추구하는 이 건축 철학은 빌라 스티아스니, 카페 에라 등에도 적용됐다.
이밖에 브르노 랜드마크로는 ▷유럽에서 가장 악명 높은 감옥이었다가 지금은 전시, 음악 축제의 장으로 탈바꿈한 슈필베르크 성 ▷냉전시대 핵전쟁 유력 후보지로 브르노가 떠오를 때 건설한 지하 원폭대피 방공호 ▷수호신을 상징하는 용(龍)을 악어 모양으로 만들어 천장에 매달아 놓은 구시청사(현 여행자 종합 안내소) 등이 있다.
사람 냄새 나는 ‘양배추시장’에서 맞는 아침
브르노역 인근의 넓은 광장의 ‘양배추시장’은 거의 매일 아침 일찍 싱싱한 야채·꽃, 막 요리한 길거리 음식, 모라비아 전통식 등을 파는 야외 시장이다.
부모들은 아침 일찍 나와, 아이들이 학교 가기 전에 속을 든든하게 채워 줄 식재료를 챙긴다. 물건을 건네는 상인들의 미소 속에서는 ‘깍쟁이 유럽’을 찾아볼 수 없다.
장이 성황을 이루자 채소, 와인, 식재료 등을 보관하기 위해 상인들이 집집마다 지하시설을 만들고, 이웃끼리 서로 연결하기도 했다. 이 중세의 지하 미로는 현재 브르노 여행객의 필수 코스가 됐다.
양배추시장과 그 주변에서 와인바를 겸하는 레스토랑에서 감자탕 부산물 같은 ‘메로우(소뼈의 속)’를 얹어먹는 버섯과 근대 줄기로 만든 퓨레 혹은 치즈 파스타 모양의 뇨끼, 중·동부 유럽 최고로 치는 모라비아 와인 등이 어우러진 전통 식단을 꼭 맛봐야 한다. 동방에서 유래된 육회와 마늘빵의 조합 ‘타타르’도 있다.
브르노 근교에 있는 블치노프 쪽으로 가면 보랏빛 들판과 청보리가 어우러진다. 또 팔라바와 미쿨로프의 드넓은 포도밭은 유럽 최고 품질의 와인을 빚어낸다.
모라비아 지역 최남단에서는 세계유산 레드니체 성의 특별한 아름다움을 만나고, 모라비안 카르스트에 가면 삼척 환선굴 같은 종유석 동굴도 구경할 수 있다.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쪽빛 염색·길놀이
특히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으로 등재된 모라비아 풍속과 손재주는 꽤나 동양적이라 친근감이 든다. 모라비아의 블라우드루크에선 한국 나주에서 볼 수 있는 쪽빛 염색공예로 유명하다. 방염 풀을 패턴이 있는 틀에 묻혀 천에 인쇄한 후 쪽빛으로 염색하는 방법이다. 방염 풀이 인쇄된 부분은 염료가 스며들지 않아 본래 직물의 색을 유지하거나 흰색이 유지돼 패턴 디자인을 살린다. 무형유산 전승자들은 약 300년 전 제작한 틀을 사용해 오늘날까지도 소규모 가내수공업 형태로 공방을 유지한다.
블치노프의 ‘왕의 행렬’인 길놀이와 흘리네츠코의 가면놀이는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에 등재됐다. 흘리네츠코 지역은 지난 몇 세기 동안 겨울의 끝을 알리는 사순절 직전, 사흘간 가면을 쓰고 골목 퍼레이드를 벌이다가 집집마다 방문해 춤을 추는 축제를 열고 있다. 가면 쓴 손님을 맞은 가가호호에서는 음식이나 거마비를 내어준다. 동지 혹은 섣달 그믐에 얼굴에 뭔가를 칠하고 팥죽이나 오곡밥을 얻어먹었던 우리의 세시풍속의 모습과 닮았다.
야나체크·쿤데라...브르노서 영감받은 예술가
베드르지흐 스메타나, 안토닌 드보르자크와 함께 체코 3대 음악가인 야나체크는 브르노에서 성장해 큰 성공을 거둔다.
야나체크는 모라비아 지방의 동양 색체의 민속음악을 기반으로 오페라 ‘예누파’를 만들어, ‘민중 오페라’라는 클래식 혁명을 일군다. 그를 기념하는 야나체크 극장은 프라하의 유명 문화회관 다음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11월에는 야나체크를 기리기 위한 음악 축제 ‘야나체크 브르노 페스티벌’이 열린다. 또 드보르자크의 걸작 오페라 ‘루살카(체코식 인어이야기)’ 공연은 9월 7일, 10월 28일, 12월6일에 각각 열린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으로 세계적인 문학가·극작가가 된 밀란 쿤데라도 브르노에서 영감을 얻고 꿈을 키웠다.
프라하에서 브르노로 가는 길목 모라비아 지역 초입의 모라브스키 크룸로프에서는 화가 알폰스 무하의 ‘슬라브 서사시(Slav Epic)’ 전시가 열리고 있다. 필부필부의 고난 극복 역사를 살아있는 눈빛과 표정으로 표현한 걸작들이다.
동서양 융합형 민속, 순수한 심성, 고난의 극복 과정에서 얻은 지혜, 유럽 동서남북의 십자로에 위치한 고풍이 창연한 건축물, 청정 자연 생태과 건강한 먹거리가 있는 브르노는 생활·문화 면에서 신성로마제국의 중심도시 프라하 못지 않다.
브르노(체코)=함영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