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기는 연주자의 정체성이자 목소리

“악기의 종류, 연주자 성장에 큰 영향”

삼성문화재단 명품 현악기 7대 지원

김봄소리ㆍ박수예ㆍ구스비ㆍ한재민

금호문화재단, 바이올린ㆍ피아노 10대

김동현ㆍ이수빈ㆍ박규민ㆍ손열음까지

“개성 따라 다른 소리ㆍ표현의 제약 넘어”  

“연주자의 개성 반영…표현의 제약 뛰어넘어”…억대 악기 지원의 비밀 [세모금]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는 지난해 삼성문화재단에서 1725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를 후원받아 사용하고 있다. [빈체로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수제 현악기’ 명장인 이탈리아의 과다니니 가문이 제작한 바이올린부터 전 세계에 150대 정도 밖에 남지 않은 과르네리 델 제수, 현대 바이올린의 틀을 확립한 스트라디바리우스까지….

악기는 연주자의 ‘정체성’이다. 첼리스트 최하영은 “연주자가 상상하는 목소리를 악기를 통해 전달한다”며 “자신만의 아이덴티티에 따라 악기의 소리가 다르게 들린다. 나만의 정체성을 가진 음색을 내기 위해선 끊임없이 연구가 따른다”고 말했다. 악기는 그만큼 연주자에게 중요한 동반자다.

클래식 업계 전문가들은 “연주자들이 연습 과정에 어떤 악기를 사용하느냐가 이들의 성장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고 입을 모은다. 이에 국내 클래식 음악계에선 여러 재단이 음악 영재와 전도유망한 음악가로의 성장을 돕기 위해 바이올린, 첼로, 피아노 등 다양한 악기를 후원하고 있다.

“연주자의 개성 반영…표현의 제약 뛰어넘어”…억대 악기 지원의 비밀 [세모금]
한국계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는 삼성문화재단으로부터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후원받아 사용 중이다. [삼성문화재단 제공]

삼성문화재단은 올해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 박수예, 비올리스트 이해수, 첼리스트 한재민을 2023년 악기 후원 프로그램 펠로우로 선정했다.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한국계 연주자를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주목할 만한 연주활동과 음반 작업을 하고 있고, 국제 콩쿠르 입상 성적 등을 바탕으로 음악계 전문가들의 추천과 검증을 거쳐 연주자를 선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문화재단이 보유하고 악기는 ‘세계 3대 명품 바이올린’으로 손꼽히는 ‘스트라디바리우스’, ‘과르네리 델 제수’, ‘과다니니’를 비롯해 ‘가스파로 다 살로’ 비올라와 ‘마테오 고프릴러’, ‘조반니 그란치노’ 첼로, ‘루이지 만토바니’ 더블베이스까지 총 7대다. 다른 악기가 아닌 현악기만 후원하는 것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현악기가 개인이 소장하기엔 워낙 고가라는 점도 이유로 작용했다. 가격은 천차만별이나, 보통 ‘명품’으로 치는 악기는 가장 작은 바이올린을 기준으로 최고 250억원에 달한다.

한국계 바이올리니스트 랜들 구스비는 1708년산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대여받았다. 이 악기는 앞서 클라라 주미 강이 사용했다. 스트라디바리우스는 전 세계에 500~600대 정도 남아있지 않다. ‘소리의 스펙트럼’이 균일한 악기라는 평가가 많다. 박수예는 1753년산 조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 바이올린, 이해수는 1590년산 가스파로 다 살로 비올라, 첼리스트 한재민은 1697년산 조반니 그란치노 첼로를 대여받았다. 네 사람 이외에도 바이올리니스트 김봄소리가 지난해 삼성문화재단에서 1725년산 과르네리 델 제수를 후원받아 사용하고 있다.

“연주자의 개성 반영…표현의 제약 뛰어넘어”…억대 악기 지원의 비밀 [세모금]
박수예는 1753년산 조반니 바티스타 과다니니 바이올린을 후원받아 사용 중이다. [목프로덕션 제공]

금호문화재단에서도 1993년부터 명품 고악기를 젊은 연주자에게 지원하고 있다. 금호문화재단 관계자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연주자들이 값비싼 악기에 대한 걱정 없이 오직 연주에만 몰두할 수 있도록 금호악기은행 제도를 마련하여 악기를 무상 대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재단에선 과다니니의 명품 바이올린과 마찌니와 같은 고악기 첼로를 포함, 바이올린 8점, 첼로 1점, 피아노 1에 이르는 총 10점의 악기를 갖고 있다. 만 27세 이하의 젊은 음악가를 대상으로 오디션을 열어 악기 수혜자를 선정한다.

그간 금호문화재단에서 악기를 후원받은 연주자들의 이름은 화려하다. 바이올리니스트 권혁주·신지아·이유라·임지영·김봄소리, 클라라 주미 강, 첼리스트 이상은·이정란·최하영 등이 있다. 악기를 후원받은 이후 연주자들의 콩쿠르에서 연이어 좋은 성적을 냈다는 점도 인상적이다. 임지영은 2014년 10여년간 1794년 과다니니 크레모나로 바꾼 뒤 콩쿠르에서 연달아 우승 소식을 전했고, 재단에서 고악기를 대여받은 뒤 퀸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선 한국인 최초로 우승했다. 크레모나를 후원받은 최예은은 2006년 몬트리올 국제 음악 콩쿠르 2위, 김봄소리는 2013년 ARD국제콩쿠르 1위 없는 2위에 올랐다. 금호문화재단에선 바이올리니스트 김동현, 이수빈, 박규민 등이 악기를 후원받고 있다.

“연주자의 개성 반영…표현의 제약 뛰어넘어”…억대 악기 지원의 비밀 [세모금]
피아니스트 손열음. [파이플랜즈 제공]

임대 기간은 악기 임대 규정에 따라 1년이다. 다만 예외도 있다. 피아니스트 손열음이다. 1998년 7월 금호영재콘서트를 통해 독주회를 연 손열음의 집에 피아노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은 박성용 전 금호그룹 명예회장이 뵈젠도르퍼를 후원, 그 뒤로 쭉 사용 중이다. 손열음은 지난 5월 연 모차르트 피아노 소나타 전곡 리사이틀에서도 뵈젠도르퍼 피아노로 연주했다. 이 피아노는 19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인 프란츠 리스트가 평생 사용했다.

악기는 음악가의 목소리를 전달하는 것은 물론 이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풀어낼 수 있는 도화지이기도 하다. 연주자의 ‘길들임’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좋은 악기’는 연주자의 상상력과 표현력에 제약을 덜어준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음악계 전문가들은 “연주자들이 어떤 악기를 연주하다 보면, 특정한 음색에서 더이상 표현이 안되는 지점을 만나게 될 수 있다”며 “그럴 때에 조금 더 좋은 악기를 만나 음량이나 음의 깊이, 색채감이 다양해져 표현의 제약을 받지 않고 반영할 수 있다”고 말했다.

같은 악기라도 연주하는 사람에 따라 색깔과 분위기가 달라진다. 삼성문화재단 관계자는 “악기는 연주자의 특성과 개성에 따라 다른 느낌으로 표현된다. 좋은 악기는 독주회와 협연, 프로그램에 따라 적합한 연주를 할 수 있는 악기인데, 재단에선 볼륨, 사운드 등 이러한 부분에 적합한 악기를 지원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연주자의 개성 반영…표현의 제약 뛰어넘어”…억대 악기 지원의 비밀 [세모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