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거장 난니 모레티 신작 출연

피아니스트 출신 신인 배우 칸 입성

일 년간 영화 3편, 넷플릭스 드라마까지

“음악과 연기 모두 표현하는 예술”

피아니스트 유선희는 이탈리아 거장 감독 난니 모레티(왼쪽)의 신작 ‘미래의 태양(A Brighter Tomorrow)’을 통해 배우로 데뷔, 제 76회 칸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다. [본인 제공]
피아니스트 유선희는 이탈리아 거장 감독 난니 모레티(왼쪽)의 신작 ‘미래의 태양(A Brighter Tomorrow)’을 통해 배우로 데뷔, 제 76회 칸 국제 영화제 레드카펫을 밟는다. [본인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우연처럼 찾아온 ‘행운’이었다. 배우인 친구의 제안에서 새로운 역사는 시작됐다. “선희, 에이전시에서 아시아 계통의 배우를 찾는대.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 한 번 해봐.” 아무런 기대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생애 첫 ‘영화 오디션’을 봤다. 이탈리아 거장 난니 모레티 감독의 새 영화 ‘미래의 태양(A Brighter Tomorrow)’이었다.

“지난 일 년 사이 굉장히 많은 경험을 하고 있어요. 아직 칸에는 한 번도 가보지 않아 즐거우면서도, 준비 과정이 너무나 생소했어요. TV에서나 보던 걸 하다 보니, ‘이게 뭐지?’ 싶더라고요. (웃음)”

피아노는 유선희(41)에게 ‘첫사랑’이었다. 세 살 때 피아노 앞에 앉은 이후, 평생을 클래식 음악가로 살아왔다. 이미 여섯 살에 콩쿠르에서 입상하며 두각을 보였고, 예원학교에 입학해 공부를 이어갔다. 소위 말하는 ‘엘리트 코스’를 밟아왔던 피아니스트 유선희의 삶은 지난 1년 사이 완전히 다른 길로 접어들었다.

이탈리아에서 새로운 넷플릭스 드라마 촬영에 한창인 유선희는 전화 인터뷰를 통해 “날짜가 가까워질수록 기분이 이상하다”며 제 76회 칸 국제 영화제 입성을 앞둔 소감을 들려줬다. 한국인 통역사 역할로 출연한 첫 영화 ‘미래의 태양’이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이름을 올려 그는 오는 24일(현지 시간) 레드카펫을 밟는다.

“지금 이탈리아에선 10여년 전에 비해 한국에 대한 관심이 굉장히 많아졌어요. K-팝, K-드라마, K-뷰티의 세계적 인기를 이탈리아에서도 확인할 수 있고, 봉준호 박찬욱 김기덕 감독님 등 한국영화도 좋아하고요. 그런 시점에 한국의 뉴 페이스에 대한 관심이 생기며 제게도 이런 행운이 찾아온 것 같아요.”

피아니스트 겸 배우 유선희 [본인 제공]
피아니스트 겸 배우 유선희 [본인 제공]

모레티 감독 ‘미래의 태양’ 출연…“음악과 연기 모두 표현의 예술”

‘미래의 태양’은 1950년대 러시아가 헝가리를 침공하던 시절을 배경으로, 영화감독 조반니(난니 모레티)가 ‘인생 역작’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모레티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 영화는 당대 정치사를 소환하며 현재와의 연결고리를 만든다. 유선희가 연기하는 한국인 통역사는 “영화에선 터닝 포인트가 되면서도 중요한 키를 쥔 인물”이다. 이탈리아 영화에 한국인 통역사가 출연한다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라 구체적으로 밝히긴 어려운 인물이다. 지난해 3월부터 3개월간 촬영한 영화는 지난달 20일 현지에서 개봉, 관객과 만나고 있다. 영화는 이미 “세 번이나 봤다”고 한다.

“시나리오가 완성된 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이었는데 감독님께서 마치 다가올 일들을 예견한 것처럼 지금의 상황과 맞아떨어져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물론 이탈리아에서 최근 발생한 사건들이 이 영화에도 담겨 있어요. 그런 장면들과 그것을 담아낸 감독님의 천재성이 현지에서도 굉장히 이슈가 됐어요.”

거장 감독과의 작업은 흥미로운 일이었다. 2001년 ‘아들의 방’으로 황금 종려상을 받은 이탈리아의 ‘국민 감독’ 모레티는 현지 영화계에선 ‘완벽주의 성향’으로 정평이 나있다. 반복되는 촬영과 수준 높고 까다로운 감독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클래식 음악가들이 걸어온 길과도 닮았다.

“어릴 때부터 클래식 음악을 해오다 보니, 소리 하나 하나 완벽을 추구하기 위해 반복해 연습하는 것이 당연하게 트레이닝 돼있어요. 영화 촬영에서의 감독의 역할은 오케스트라 협연에서의 지휘자와 닮았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음악을 할 때도 지휘자가 이런 저런 요구를 하며 그가 그리는 방향으로 나아가니까요. 대가와의 작업은 힘든 점이 있지만, 부담보다는 재미가 더 컸어요.”

영화 촬영은 생애 처음이나, 장르와 영역을 뛰어넘는 시도들이 유선희에게 낯선 일은 아니다. ‘정통 클래식’ 코스를 밟으면서도 그는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협업하며 경계를 넘어왔다.

“클래식 이외의 음악 장르와 여러 시도를 하는 편이었어요. 연기 쪽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다양한 시도를 하다 보니 이런 기회도 찾아온 것 같아요. 연기도 일종의 예술이기에 제겐 음악과 더불어 좋은 시너지가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피아니스트로 평생을 살아오다 신인 배우로 첫 발을 디딘 유선희는 연기와 음악 모두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본인 제공]
피아니스트로 평생을 살아오다 신인 배우로 첫 발을 디딘 유선희는 연기와 음악 모두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고 말했다. [본인 제공]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며 그간 살던 이전 세상과의 교집합을 발견한다. 연기와 음악 모두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점이다. “음악이 악보에 적힌 작곡가의 생각을 충실히 따르며 나만의 색깔을 담는 것이라면, 연기는 대본 속 캐릭터를 잘 살려 나의 색을 입히는 일”이다. 다만 차이라면 “피아노는 악기를 통해 내면의 예술을 표현하지만, 연기는 대사와 목소리, 몸짓을 통해 직접적으로 전달한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거대한 공동 작업의 세계에선 ‘협업의 기쁨’도 마주했다. ‘하나의 장면’을 완성하기 위해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방향’으로 향해 가는 사람들과의 호흡은 큰 감동이었다.

“음악에서의 협업처럼 뭔가를 나누고 공유하며 말로는 통하지 않는 에너지를 느꼈어요. 이 많은 사람들이 흐트러짐 없이 서로를 배려하며 작업하고, 그 과정에서 시너지를 만들어가는 것이 제겐 큰 교훈이었어요.”

피아니스트 겸 배우 유선희 [본인 제공]
피아니스트 겸 배우 유선희 [본인 제공]

“한국인 유선희, 나의 정체성이자 자부심…두 개의 길이 나의 특색”

어릴 적부터 그의 앞엔 늘 여러 개의 길이 있었다. 올곧게 중심을 딛고 서면서도, 거침없이 다른 길로도 발을 내디뎠다. 열다섯 살에 이탈리아로 유학와 피아니스트로의 길을 걸어온 그는 “왕성한 호기심”으로 음악 세계를 넓혀왔다. 카푸스틴 음반 발매는 그 계기였다. 그는 “카푸스틴의 연주는 클래식 음악의 틀 안에 있으면서도 마치 재즈 피아니스트가 연주하는 것 같은 즉흥성이 있다”며 “그걸 계기로 팝, 일렉트로닉, 재즈까지 다양한 장르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했다.

“그게 저의 특색인 것 같아요. 클래식 음악을 하면서도 다른 장르의 음악을 했고, 피아니스트이면서 배우이기도 하고, 한국인이지만 이탈리아에서 산지 더 오래 됐고요.”

1997년 이탈리아에 도착했을 당시, 한국의 존재감은 미미했다. 동양인에겐 언제나 “중국인이냐, 일본인이냐”고 물었다. “둘 다 아니”라고 하면 “대체 넌 어느 나라 사람이냐”는 질문이 먼저 나왔다. 한국이라는 나라의 이름이 떠오른 것은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이탈리아와 인상적인 경기를 치르면서다. 완전히 다른 이목구비와 피부색을 가진 사람들 틈에서 유선희의 오랜 숙제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균형을 찾는 일”이었다.

“이른 유학생활 덕분에 이곳 문화엔 빨리 적응했어요. 하지만 외모도 문화도 너무 다른 곳에서 온 제겐 언제나 한국인이면서 이탈리아인이라는 두 세계를 넘나드는 것이 인생의 숙제라는 생각이 따라왔어요. 서로 다른 세계와 문화를 갖고 있다는 건 저의 장점이기도 하고요. 그게 제 일에도 반영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이탈리아에서 26년을 살았지만, 그는 여전히 ‘유선희’라는 이름을 쓴다. “한국인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싶어 이름을 바꾸지 않았다”고 한다. “이곳 사람들은 아시아계 이름을 어려워해요. 늘 이탈리아 식으로 발음해 ‘순희’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아요. 모레티 감독님도 순희라고 하고요. 그럴 때마다 항상 ‘선희’라고 고쳐드리죠.”

모레티 감독과의 첫 작품 이후 유선희는 ‘신인 배우’로의 행보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일 년 사이 또 다른 이탈리아 영화의 촬영을 마쳤고, 넷플릭스에서 방영할 미국 드라마를 비롯해 단편 영화 촬영도 예정돼있다. “한국에서 캐스팅 제안이 온다면, 한국인 유선희로도 서고 싶다”고 한다. 그는 지금의 새로운 일들이 자신의 음악과 삶에도 전환점이 되리라 봤다.

“제겐 언제나 두 갈래의 길이 있었어요. 그 길들이 구불구불 이어지다 만나기도 하고 다시 갈라지기도 해요. 남들과는 다른 길일 수 있지만, 그 길이 제게 맞는 방향이라는 생각을 해요. 연기를 하면서, 고정관념에 매여 있는 클래식 음악을 하는 데에 있어서도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저만의 색깔을 만들며 제 자신에게 충실한 음악인, 배우가 되고 싶어요.“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