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 SPAF’ 연극 ‘지상의 여자들’
오는 30일까지 정동극장 세실
“여성 서사의 다양한 관점 담아…
인간, 동물, 환경 이야기까지”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배우들은 하루에 다섯 시간씩 열흘간 원작 소설을 소리내 읽었다. 연극 ‘지상의 여자들’이 막을 올리기에 앞서 진행한 첫 작업이다.
“이 과정을 통해 소설의 원작자가 우리 사회에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읽고자 했어요. 우리 몸 안에 쌓여가는 언어를 발화하면서 작품의 주제에 대해 배우들이 이야기하고 싶은 지점들이 생겨났어요.” (전인철 연출)
드라마터그(극작술을 연구하는 사람)로 참여한 전강희는 “혼자 읽었을 때는 가볍게 지나간 문장들은 소리내 읽는 과정을 통해 또 다른 의미가 부여되고, 이러한 과정에서 배우들이 가져가야 할 서브 텍스트가 생겨났다”고 말했다. 배우들은 이 무대에서 각각의 배역을 소화하는 극중 인물로 존재하면서도, 배우 자신으로도 존재한다. 전강희는 “몰입과 거리두기를 오가는 과정”이라고 했다. 연출을 맡은 극단 돌파구의 전인철 대표는 “연극이 현실의 이야기를 깊게 다루다 보니 우리가 사회 안에서 공유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라마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도 보여주고자 했다”고 말했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Seoul Performing Arts Festival, 이하 2022 SPAF)’를 통해 지난 27일 개막한 연극 ‘지상의 여자들’(정동극장 세실)은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 지난해 낭독 공연을 가진 이후 올해는 트라이아웃으로 관객과 만난다. 내년 서울공연예술제에선 정식 공연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
‘지상의 여자들’은 “폭력적인 남자들이 지구에서 사라지는 이야기”(전인철)다. 동명의 원작 소설은 폭력적 상황에 처한 다양한 인물들의 치밀하고 심오한 “심리묘사가 인상적”(전강희)이다. 방대한 소설의 내용 중 연극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폭력, 종(인간)과 종(동물) 사이의 폭력”(전인철 연출)에 집중했다. 배우들은 “1인 5역을 하고, 음향 효과”까지 도맡는다. 전강희는 “배우의 연기를 보는” 재미가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이 작품은 극단의 정체성을 강하게 보여준다. 전인철 연출은 “‘지상의 여자들’은 돌파구 작품의 연장선에 있으면서도 새로운 흐름을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극단 돌파구는 2015년 창단 이후 계급, 청소년, 젠더에 대한 문제의식이 저변에 자리한 작품을 선보여왔다. 전강희는 극단 돌파구의 작품에 대해 “동시대를 살아가는 다양한 사람들의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를 확장해나가는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봤다. 2015년 초연한 연극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이 극단의 성격을 보여준 첫 작품이었다면, 이 작품이 “디벨롭되고 대중과 호흡하는 과정에서 매끄러워진 시선이 보다 날카로워진 중간 지점의 작품”(전강희)이 ‘지상의 여자들’이다. 극단의 차기작으로 예정된 이홍도 작가의 작품(제목 미정)은 보다 날선 시선으로 정체성을 이야기한다.
전인철은 “최근 10여년 한국 사회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엄청나게 많은 변화를 맞고 있다”며 “변화하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나’라는 존재를 끊임없이 돌아보며 고민해야 할 지점들이 생겼다. 나 역시 이 사회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고민하다 보니, 정체성을 다루는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말했다. ‘지상의 여자들’은 극단 돌파구가 “예술가의 촉을 세우고 자연스럽게 (방향성을) 확장해가면서 만났다”(전강희)는 점에서도 중요한 작업이다.
작품은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안고 있는 다양한 이슈를 무대로 가져온다. 젠더, 계급, 환경 문제를 포괄한다. “소설을 무대화하는 작업을 많이 해온 돌파구의 이전 작품들처럼 소설 문체를 버리지 않고”(전강희) 대본으로 가져왔다. 원작에서 한 발 더 나아간 지점도 생겼다. 전인철 연출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물론 인간과 동물의 관계를 더 진행했다”고 말했다.
“원작을 읽고 무대에 올리는 과정에서 교차성이라는 것에 대해 공부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자기 안의 정체성이 만나고 헤어지는 부분, 오염된 환경에 있는 동물들과 인간이 다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공부를 해나가며 새로운 시선이 생기게 됐어요.”(전강희) “인간 중심으로 세상을 보는 것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연극에서 좀 더 하고 있는 거죠.” (전인철)
흔치 않은 시선을 담아내는 무대는 작품의 주제와도 맞닿아있다. “오염된 강과 동물의 이야기”도 나누는 작품은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의 ‘무대 재활용’을 통해 완성됐다. 지속가능한 연극을 위한 시도다. 전 연출은 “연극계에서 기후위기와 관련 창작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해왔다”며 “세트에 많은 돈과 재료를 들여 만들지 않고, 기존 재료를 100% 활용하는 무대로 구현했다”고 말했다. 무대는 박상복 디자이너가 맡았다. “기존의 흰색 무대에 회색 칠을 해서 디귿자 형태의 무대”(전인철)로 탈바꿈했다.
‘지상의 여자들’은 공연계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루고 있는 여성서사에 새로운 접근을 시도한 작품이다. 전강희는 “이 작품은 여성서사가 크게 정의되는 작품”이라며 “쟁점을 변화 과정을 거쳐온 페미니스트의 역사가 모두 담겨있는 것은 물론 여성을 비롯해 남성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다른 종의 이야기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나와 다른 존재가 가지는 상처와 아픔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는 이야기를 하는 작품이에요.” (전강희)
전 연출은 “남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한국 여성과 이주민 여성 등 여성과 여성 사이의 다양한 권력 관계가 들어와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잘 보지 못한 여성의 서사”(전인철)라는 점에서 새로운 접근이다.
극단 돌파구는 지난 9월 연극 ‘XXL 레오타드 안나수이 손거울’로 런던 노팅힐 코로넷 극장에서 현지 창작자와 관객들을 만나고 돌아왔다. 한국 연극이 언어가 다른 나라로 진출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 연출은 “기존엔 외국의 고전을 한국식으로 표현한 작품이나 언어가 없는 작품의 해외 진출이 많았다”며 “넷플릭스의 영향으로 관객들이 한국어에 익숙하고 자막으로도 연극을 보는 것을 즐긴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지상의 여자들’도 향후 영국으로 향해 K-스토리의 힘을 보여줄 계획이다. 공연은 30일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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