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할 권리(아미아 스리니바산 지음, 김수민 옮김, 창비)=“페미니즘은 여성 자신이 성 계급의 일원임을, 다시 말해 ‘성’ 혹은 ‘섹스’라는 것을 근거로 했을 때 사회적 지위가 열등한 사람들로 구성된 계급의 일원임을 인식하는 데서 출발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촉망 받는 페미니스트 사상가 중 한 명인 인도출신의 스타 철학자 스리니바산의 ‘섹스할 권리’는 이 명쾌한 선언에서 시작된다. 37세 최연소 옥스퍼드대 석좌교수가 된 스리니바산의 첫 단독 저서로 미투 운동 이후 페미니즘의 방향성을 제시한 필독서로 꼽힌다. 저자는 섹스의 자유를 성평등의 결정적 가늠자로 본다. 너무 흔해서 자유인양 착각하는 게 아니라 진정한 섹스 평등을 말한다. 책은 모두 여섯 꼭지의 에세이로 이뤄져 있다. ‘누가 남성을 음해하는가’에선 미투운동으로 화두가 된 피해자 중심주의의 필요성과 그 한계를 지적하고, ‘섹스할 권리’는 아일라비스타 살인사건과 남성의 성적 권리의식을, ‘욕망의 정치’에서는 그 누구에게도 다른 사람과 섹스할 권리, 즉 성관계를 요구할 권리는 없지만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지는 우리의 성적 욕망에도 정치적 검토와 재교육이 필요할 수 있다는 도발적 주장을 제기한다. ‘학생과 잠자리하지 않기’는 권력관계 내 성관계를, ‘섹스, 투옥주의, 자본주의’는 페미니즘 내 반성매매, 성노동론 논쟁을 면밀히 검토한다. 논쟁적이고 결론을 내리기 어려운 주제이지만 저자는 섹스가 정치적·사회적·경제적 종속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자유로워지면 세상이 어떻게 될 지에 희망을 품는다.에세이들은 한국사회에도 유의한 논점을 던진다.
▶투명한 힘(캐슬린 스튜어트 지음, 신혜경 옮김,밤의책)=일상은 시간이기도 하지만 사물 혹은 관계이기도 하고 사건이기도 하다. 일상은 이들에 의해 감각되고 이해되며 물질적인 것이 된다. 인류학자 캐슬린 스튜어트는 우리의 일상에 존재하는 작은 미스터리한 순간들에 주목한다. 불꽃을 일으키고 발화하는 일상의 어떤 순간들, 무의식적으로 인생에 영향을 주고 자극하는 작은 힘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포착한다. 작은 불꽃은 사소한 말 한마디로 시작하기도 한다. 이를 잘 보여주는 한 예가 있다. 서부 텍사스 어느 카페에 오토바이 여행자 한 쌍이 절뚝거리며 들어온다. 노닥거리던 이들의 시선이 둘의 헝클어진 머리와 찢어진 옷에 쏠린다. 둘은 아랑곳 없이 긴밀한 대화를 나누는가 싶더니 곁을 지나가던 여성에게 서쪽 도로를 갈 예정이라면 오토바이 부품이 있는지 찾아봐 달라고 부탁한다. 읍내로 들어오는 길에 사슴을 치는 바람에 오토바이를 놔두고 왔다는 얘기다. 카페 안은 일순 고요해지다 이내 호기심으로 질문들이 오가고, 대화는 종잡을 수 없이 여러 갈래로 뻗어나간다. 자유와 규제, 행과 불행, 경솔함 등 추상적인 얘기로까지 나아간다. 이 우연한 사건이 불러일으키는 작은 파장은 어디로 이어질 지 알 수 없다. 특정 순간을 빠르게 스케치해 보여주는 저자의 독특한 글쓰기는 빈곤과 공동체, 해고와 파업 등 사회적 이슈도 툭 던지는데 거창한 이론이나 주장은 없다. 시적인 재현이란 글쓰기, 은유적으로 그려낸 데 책의 독특함과 새로움이 있다.
▶7월14일(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열린책들)=역사적 사실를 이야기로 엮어 온 콩쿠르상 수상 작가 뷔야르가 프랑스대혁명의 서막을 알린 비스티유 감옥의 점령 현장을 짧고 강렬하게 담아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그날 바스티유 점령의 현장에 있던 민중 개개인들이다. 주요 인물 몇몇과 핵심 사건에 초점을 맞춘 기존의 이야기와 달리 땀과 먼지를 뒤집어쓰고 푼돈을 버는 노동자, 백수건달, 시골사람 등 이름 없는 군중의 시각으로 그려냈다. 말끔히 정돈된 역사, 아카데미즘을 거부하는뷔야르가 말하는 ‘밑바닥’의 시각이다. 뷔야르는 아카이브에서 전져 낸 공식 문서에서 기나긴 이름의 목록과 통계를 발견한다. 바스티유를 습격한 900여 명의 이름, 그 중 사망자 수는 98명. 작가는 숫자로 치환된 입이 없는 이들에게 이야기를 통해 생명을 불어넣었다. 허름한 다락방에 살며, 술친구와 자주 어울리고, 저녁 무렵 아내와 창가에 서서 잡담하기를 좋아했던 금박공, 가로등 점등원 프랑수아는 강변 시장에서 싸게 구입한 바지를 입고 구두끈을 대충 묶고 다녔으며, 산책을 즐겼다. 둘은 총에 맞아 죽었다. 기록조차 남기지 못한 잊힌 여성들도 있다. 뷔야르의 이 재현작업은 과거에서 현재로 길을 내는 데 있다. 뷔야르는 죽은 자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오늘을 겹쳐내며 힘있는 문체로 새로운 역사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윤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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