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한국에서도 왕정이 유지되고 있었다면....’

‘만약 한국이 일본 지배를 계속 받고 있었다면...’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서거와 세기의 이벤트로 치러졌던 장례식을 접하면서 어떤 이들은 이런 질문을 한 번쯤 던져보지 않았을까. 여왕의 서거는 지금으로부터 그리 오래지 않은 역사에 왕정과 식민지 경험이 있는 우리에게 만감이 교차하는 사건일 수밖에 없다. 부질없다는 역사적 가정을 좀 더 해보자. 만일 한국이 일제의 지배 없이 근대로 진입해 입헌군주제로의 전환을 이뤘다면 왕은 국민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21세기까지도 정신적 구심이자 국가의 상징으로 존경받고 있을까. 아니면 때마다 거센 폐지 목소리에 부딪히는 과거 유물이자 국론분열의 뜨거운 감자가 됐을까. 우리 국민은 막대한 세금이 투입되는 왕실의 운영을, 대대로 세습되는 최상위 신분의 존재를 허할 수 있었을까. 혹시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자산이자 전성기를 맞은 K-컬처의 일부가 됐을까. 끔찍한 상상이지만 일본의 식민지배가 지금도 계속되거나 한국이 독립국이되 형식적으론 일본 연방으로 일왕을 국가의 수장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처지라면 또 어떨까.

문제는 민주주의라는 이념과 그 구현 형식으로서의 통치제도다. 21세기에 런던 웨스트민스터사원에서 펼쳐졌던 거대한 장례의 풍경은 돌이킬수록 새삼 놀랍다. 군주국, 사전적인 뜻으로는 ‘임금(君)이 주인(主)인 나라’다. 봉건 태생의 이 통치제도는 영국의 13세기 ‘마그나카르타(대헌장)’와 17세기 ‘권리장전’을 거쳐 ‘헌법’과 ‘의회 견제’의 옷을 입고, 현대민주주의에서도 시민권을 얻었다. 곧 ‘왕이 주인인 나라’와 ‘국민이 주권자인 정치제도’라는 모순이 법과 의회제도라는 접착제로 이어붙여진 것이다.

하지만 접착력이 과거와 같진 않다. 여왕 서거 전 즉위 70주년 기념행사를 앞두고 실시한 영국 내 여론조사에서 군주제 지지는 62%로, 10년 전 73%에서 눈에 띄게 하락했다고 한다. 공화제에 대한 요구는 여왕의 ‘카리스마’에 힘입어 그동안 전면화되지 않았지만 국민적 지지가 낮은 찰스 3세 재위기에는 군주제 철폐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다는 분석도 영국 언론에서 나왔다.

막스 베버는 지도자의 권위를 세습에서 나오는 ‘전통적 권위’와 공식적 법과 제도에서 기인하는 ‘합법적 권위’, 개인의 능력에 바탕한 ‘카리스마적 권위’로 유형화했다. 그렇다고 보면 여왕의 ‘카리스마’가 정당화해주던 ‘전통적 권위-합법적 권위의 결합’으로서의 입헌군주제는 앞으로 더욱 존폐의 도마 위에 오를 수 있다. 여왕 서거와 함께 서구사회 일각과 영국 식민지에서 일었던 식민주의에 대한 신랄한 비판과 영연방 국가들의 탈퇴 움직임도 주목할 만하다.

정치 이념과 통치 체제는 역사의 산물이다. 시대에 따라 생성·변화·소멸을 거치는 유한한 것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대통령제나 의원내각제도 마찬가지다. 근대가 민주주의와 대통령제, 의원내각제 등을 만들어냈듯 머지않은 시기에 인류는 새로운 정치 이념과 통치제도를 발명해야 할 것이다. 당장 우리는 ‘제왕적 대통령제’라는 역사적 시효를 다해가는 통치제도와 함께 ‘개헌’의 당면과제를 안고 있지 않은가. 세습봉건 왕조와 사회주의가 기괴하게 결합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마주한 채 말이다.


suk@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