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여년간 이어온 K팝 독특한 시스템
수많은 영광과 함께 부작용 노출
지독한 경쟁과 밤샘 활동 고갈
연습생부터 데뷔ㆍ성공까지 속도전
개개인 돌아보지 않는 혹독한 과정
K팝 시스템은 한국사회 자화상
개인의 가치·뮤지션의 복지 고려 필요
템포 늦추고 음악 위한 산업으로 성장해야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K팝과 아이돌 시스템 자체가 사람을 숙성하게 놔두지 않는 것 같아요. 10년 동안 방탄소년단으로 물리적 스케줄을 하다보니 내가 숙성이 되지 않더라고요.” (RM)
1세대 H.O.T.부터 2세대 소녀시대·빅뱅, 3세대 방탄소년단(BTS), 4세대 에스파에 이르기까지…. K팝 성장과 영광의 모든 순간을 만든 ‘K팝 아이돌 시스템’이 다시 한 번 점검 대상이 됐다. 지독한 경쟁, 소모와 속도전, 몰개성화 등 K팝 시스템의 병폐가 노출됐다. 소위 “K팝 업계를 통틀어 가장 모범사례”(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로 꼽히는 RM의 입을 통해 이런 점이 나온 것은 특히 의미심장하다.
방탄소년단의 RM은 최근 유튜브 영상을 통해 그룹의 ‘단체 활동’ 잠정 중단을 선언하며 K팝 시스템 안에서 느낀 피로감과 고충을 토로했다. 그는 “어떤 식으로 해야 할지 충분히 고민한 다음에 돌아오고 싶은데 놔두지를 않는다”며 “계속 뭔가를 해야 하다 보니, 내가 성장할 시간이 없다”고 호소했다.
■ K팝 성공신화 이끈 통합형 시스템…소모전·몰개성 부작용 노출
한국을 넘어 아시아와 유럽으로, 팝 음악 시장의 본토인 영미 지역까지 뻗어나간 K팝은 ‘3대 기획사’로 불려온 SM·JYP·YG엔터테인먼트가 구축한 독창적인 시스템 안에서 성장했다. 1990년대 이전 주먹구구식으로 음악을 내놓던 시절과 달리 K팝의 등장과 함께 체계적인 비즈니스 모델이 만들어졌다. 일종의 ‘인재 육성’ 시스템이다. 캐스팅, 연습생의 트레이닝, 콘텐츠 제작을 위한 프로듀싱, 홍보부터 유통까지 이어지는 마케팅 등 전 과정을 K팝 시스템으로 구축했다. SM엔터테인먼트가 일본 아이돌 육성 시스템에서 벤치마킹해 한국에 맞게 수십년간 진화한 시스템으로, 만 열세 살에 데뷔한 ‘아시아의 별’ 보아부터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효율적인 ‘통합형 시스템’은 음악, 안무, 무대, 의상 등 내적·외적의 통일성을 갖춘 완벽한 콘텐츠를 생산해냈다. 이로 인해 한국의 기획사는 ‘가수를 찍어내는 공장’이라는 해외 비판도 나오지만, 이것 자체가 “K팝의 핵심”(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이자 성공의 일등공신이다.
하지만 소위 ‘내부 구성원’, 즉 가수들의 고충은 상당하다. 오랜 시간 ‘통제된 생활’과 혹독한 연습과정, 끊임없는 밤샘 등의 강행군이 이어진다.
해외 음악시장과 비교해도 K팝 스타들은 전반적으로 ‘업무 과다’에 시달린다. 이규탁 한국조지메이슨대 교수는 “음반 한 장을 발매하는 데에는 여러 이해와 시간, 노력이 필요하다”라며 “K팝의 경우 매 앨범마다 콘셉트가 따로 있고, 음악, 안무, 무대 등 모든 콘셉트가 높은 완성도를 요구하는데 해외와 달리 K팝은 싱글, EP 등 앨범이 나오는 주기가 유난히 짧다”고 말했다.
실제로 방탄소년단만 해도 지난해 콜드플레이와의 협업곡까지 더해 세 곡의 신곡이 나왔다. 앨범으로는 싱글 두 장이다. 많이 내는 경우 일 년에 세 장의 앨범을 내는 경우도 있다. 정민재 대중음악평론가는 “해외에선 우리가 흔히 미니앨범이라고 부르는 EP를 내는 사례는 거의 없고, 1~2년 동안 정규 음반 한 장씩 내는 활동을 하면서도 피로감이 쌓인다고 토로하는데 K팝 안에선 번아웃이 오지 않는다면 그것이 신기할 지경이다”라고 말했다.
쉼 없이 달리기만 하는 일정은 K팝 가수들의 정신적, 육체적 피로로 이어진다. 걸그룹 트와이스 미나는 2019년 심리적 긴장과 불안감 등을 호소했고, 2020년엔 정연이 불안 증세로 휴식기를 가졌다. 위클리 신지윤은 2020년 데뷔 이래 불안 증세로 휴식과 활동 재개를 반복하다 결국 그룹을 탈퇴했다.
전문가들은 “스스로도 고갈되고, 소진되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다”고 입을 모은다.
뿐만 아니라, 오랜 시간 엄격한 시스템 안에서 통제된 생활을 하다 보니 아티스트 각자의 개성과 가치보다는 ‘원팀’을 위한 가치에 방점을 둘 수 밖에 없다. 그룹 내의 멤버들에게서 몰개성화에 대해 아쉬움과 불만이 나오는 지점이다. 이미 한두 해의 이야기가 아니다. 과거 걸그룹 나인뮤지스는 자신들을 주인공으로 한 다큐멘터리 ‘나인뮤지스 : 그녀들의 서바이벌’을 통해 이러한 고충을 토로했다. 그게 이미 2014년의 일이다. 이번에 방탄소년단 맏형 진 역시 “그룹 활동을 하다 보니 기계가 돼 버린 느낌”이라며 “내 취미도 있고 하고 싶은 일도 있다”고 말했다.
이규탁 교수는 “K팝은 하나의 정해진 콘셉트 안에서 음악, 춤, 패션 양식을 통일하는 커다란 이미지를 확립하고 있어, 멤버들마다 존재하는 각자의 개성과 다양한 취향을 반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짚었다.
■ 막대한 투자·성공 위한 채찍질… K팝 시스템은 ‘한국 사회 자화상’
부작용의 원인은 결국 내부에 있다. 사실 K팝 아이돌 그룹을 육성하는 것은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일이다 성공 여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한 팀을 데뷔시키는 비용은 해마다 늘어난다. 업계 관계자들은 “연습생들은 숨만 쉬어도 돈이 나간다”고 토로한다. 투자는 하지만, 모래성 같은 산업 안에서 과정은 혹독해진다. 옥석을 가린다는 명목으로 ‘월말평가’ 등의 채점방식과 과도한 경쟁을 거친다. “K팝에 요구하는 완벽성을 충족”(이규탁 교수)하려다 보니 연습생 기간도 길어지게 된다. 대신 지원과 투자는 강력하다. 이 과정을 거친 이후 목표는 빠른 성공과 투자비용 회수다.
정민재 평론가는 “가요계는 7년의 표준계약으로 시작하는 만큼 이 기간 동안 최대한 빨리 높은 자리에 올라가고, 많은 활동을 통해 이익을 남겨야 한다는 인식이 바탕하고 있다. 그렇기에 일 년 동안 새 앨범을 2~3장씩 발매하는 너무나 힘든 활동을 하게 된다”고 말했다.
심지어 최근엔 앨범 발매 이후의 활동 기간도 짧아졌다. 대체로 한 달 정도이나, 1~2주 안에 끝내는 흐름도 나타난다. 일주일 동안 지상파부터 케이블까지 총 4~5번의 음악방송 한 바퀴를 돌고 난 뒤 활동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이 역시 비용의 문제다. 인기 걸그룹이 소속된 가요기획사 관계자는 “요즘엔 음악방송에 한 번 출연하는 데에도 1억 원의 비용이 든다”며 “의상, 무대 세팅, 연출 등을 우리 그룹의 콘셉트에 맞는 퀄리티 높은 무대를 선보이려다 보니 비용이 점점 늘고 있다”고 귀띔했다. ‘영혼을 갈아넣어’ 새 음반을 만들어도 “퀄리티 높은 수록곡까지 보여줄 있는 기회는 없어”(이규탁 교수) 가수들의 아쉬움이 커진다.
이는 결국 ‘7년 징크스’로 이어지는 길이다. 7년간 스스로를 혹사시킨 활동 이후, “재계약 시점이 되면 이탈 멤버”(정민재 평론가)가 나온다. 소진돼 떠나거나, 자기가 원하는 길로 가겠다는 것이다. 기획사에선 지난 성과를 가늠해 그룹의 존폐를 결정하게 된다.
업계에선 최정상에 오른 톱스타의 고백을 통해 드러난 K팝 시스템의 ‘불편한 진실’이 향후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임진모 대중음악평론가는 “K팝을 지켜내는 것이 가수 개인이냐 시스템이냐를 두고 다양한 목소리와 고민이 나오고 있는 시기”라고 했다.
물론 시스템을 뜯어 고치기란 쉽지 않다. 과거부터 이어진 이 시스템이 지금의 K팝을 일궜기 때문이다. 박희아 대중음악평론가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가 퀄리티 높은 음악과 퍼포먼스를 만들어냈고, 그것이 하나의 문화로 받아들여져 일본으로 역수출이 된 만큼 시스템의 공과가 극명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정상 스타의 외침은 더 큰 메아리가 되고, K팝 시스템의 개선과 변혁의 트리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이규탁 교수는 “K팝 시스템을 한 번에 뒤집을 순 없다. 다만 지금도 변화의 조짐이 보인다”며 “기획사가 계획한 대로만 추진하는 것이 아니라 가수들 개개인의 자율성과 음악·문화적 취향과 의견을 보다 적극적으로 반영하고 강화하는 방향으로 서서히 달라지게 되리라 본다”고 말했다. 박희아 평론가는 “구조가 한 번에 바뀌지는 않겠지만, 방탄소년단을 계기로 더 많은 K팝 가수들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가 생기고 그것이 더 큰 의견으로 모아질 것이라 판단된다”고 말했다.
속도전과 경쟁 체제, 이로 인한 소모와 고갈 등 각종 문제를 안고 있는 K팝 시스템은 ‘한국 사회의 자화상’이다. 고도성장을 겪어온 우리 사회가 이면에서 다양한 부작용을 노출한 것처럼 K팝 산업 역시 그 모습을 닮아 있다.
정민재 평론가는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 쉬지 않고 결과를 내는 것에 몰두하다 보니 어느 순간 뇌관이 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며 “K팝 역시 산업적, 음악적으로 궤도에 올라왔고, 성공에 경도돼 속도전에 몰두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제는 K팝 역시 템포를 낮추며 완성도와 뮤지션의 복지를 돌아보고, 경쟁 내신 조금은 느린 호흡으로 음악을 위한 산업으로 나아갈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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