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무원들이 가장 흔하게 하는 말 중 하나가 “규정이 없어 일을 못한다”거나 “규정에 맞지 않아 할 수 없다”라는 것이다. 반면 선출직인 시장이나 의원들은 “규정이 없으면 만들고, 규정이 맞지 않으면 규정을 바꿔서라도 일을 하라”라는 주문을 하게 된다.

공무원 대부분은 규정과 현실의 요구라는 괴리 속에서 나름의 절충점을 찾아가며 일을 한다. 꽉 막힌 공무원이라고 평가받는 사람은 규정만을 고수할 것이고, 좀 더 유연한 공무원은 규정이 갖는 한계를 인정하고 규정이 가지고 있는 적은 재량이라도 적극 활용할 것이다. 유능한 공무원은 중앙정부나 의원들을 적극 설득해 현실에 맞게 규정을 만들어갈 것이다. 하지만 규정을 만들고 수정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특히 지방정부는 법령의 제·개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 없는 상황에서는 더욱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퇴직 후 지인들이 자신들의 민원을 처리하는 공무원들의 방식을 가지고 울분을 토로하는 경우를 접하게 되면서, 공무원이 아닌 제3자로서 새롭게 현실과 규정이라는 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지인들의 민원의 경우 대부분 안 되는 것을 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규정의 재량성을 좀 더 인정해서 일을 처리해 달라는 것이었다. 우리말에 ‘아’ 다르고 ‘어’ 다르다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 딱 맞는 말인 것 같다. 즉 민원인의 요구에 대해 엄격한 규정 적용이라는 틀을 가지고 일을 처리하는 것과, 민원의 요구를 수용할 수 있는 규정들을 적극적으로 찾아가면서 일을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접근방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민원인으로서는 더욱 그 차이가 크게 느껴질 것이다. 민원인의 눈으로 한 발 다가서보면 규정이 인정하는 융통성이 보이게 된다. 만약 정말 불가능한 경우에는 그 사유를 분명히 알려준다면 민원인도 충분히 수용할 것이다.

과거 현직 시절 서울 시내버스를 캐릭터로 한 애니매이션 ‘타요’를 제작했다. 타요는 버스 이미지사용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던 서울시, 직접 애니매이션을 제작하는 업체, 제작 후 이를 방송에 내보내겠다는 교육방송사의 협업으로 이뤄졌다. 각 당사자들은 일정한 제작비용도 공동 부담하도록 하고 있어 당시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는 어떤 방식으로 계약을 하느냐는 것이었다. 계약 부서에서는 계약관련 규정이 미비해 계약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계약 관련 규정의 융통성을 근거로 협의를 진행해 최종적으로 계약을 하고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만약 당시 담당자가 계속 규정만을 완강하게 고집했다면 계약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공무원들이 규정을 가지고 일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하지만 규정은 변화하는 현실에 즉각 대응하기 어렵기에 집행하는 공무원들에게 상당한 재량을 부여하고 있다. 사실 많은 행정 관련 변호사들은 이런 규정상 재량의 인정 여부나 절차의 정당성 등을 가지고 행정청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승소하게 된다. 재판을 통해 이런 재량성을 인정하기보다는 행정을 담당하는 공무원들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시민의 민원을 풀어나가는 것이 비용이나 시간 절약은 물론 시민의 행정에 대한 신뢰도를 높여 나가는 첩경일 것이다.

고홍석 서울시립대 국제도시과학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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