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처럼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던 철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대기업들은 올해 정기 주주총회에서 여성을 대거 사외이사로 선임하며 빗장을 걷었다. 남성 위주의 이사회는 그동안 우리나라 기업 지배구조의 약점으로 지적을 받아왔다. 그러나 성별 다양성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이사회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물론 법의 영향도 컸다. 자본시장법 개정으로 내년 8월부터 자산 2조원 이상의 상장사는 여성 이사를 한 명 이상 의무적으로 둬야 한다. 주요 기업들은 이에 대응해 미리부터 여성 이사 영입에 나선 것이다.
여성의 이사회 진입을 시작으로 앞으로 국내에서도 이사회 다양성에 대한 논의는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예상된다. 이미 국내외 기관투자자와 의결권 자문기관에서는 이사회 다양성을 강하게 주문하는 추세다. 블랙록은 주주총회에서 다양성이 부족한 이사회 구성에 대해 반대 의결권을 행사하고 있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과 캘리포니아교직원퇴직연금(CalSTRS)은 성별뿐만 아니라 학문적 배경, 경력 등 다양성 요건을 고려해 이사회 구성원을 선임해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이러한 기준에 비춰보면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사회 본연의 기능 강화를 위해 여전히 몇 가지 개선이 필요해 보인다.
저마다 ESG(환경·사회·지배구조) 경영을 강화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최근 강조되고 있는 환경이나 안전, 위험관리 분야의 전문가 영입은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다.
기후변화와 탄소배출 규제에 대응해 정유·화학 등 주요 기업들이 친환경사업으로의 전환에 속도를 내고 있지만 이사회에서 이를 점검하고 조언할 전문가 영입은 미흡한 실정이다.
최근 잇단 사업장 안전사고와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등으로 안전 및 위험관리 역시 국내 기업들의 당면 과제로 떠올랐지만 아직 이사회에서 이를 중점적으로 들여다 볼만한 전문가는 보이지 않는다.
아울러 신기술 분야 전문가의 이사회 진입도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기업들이 미래 성장동력 확보를 위해 첨단 신기술 분야에 투자를 앞다퉈 확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차 투자 규모가 커지고 있는 만큼 이사회에서 이를 심의하고 판단하는 역할은 더욱 중요해질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대부분의 사외이사는 법원, 검찰, 공정거래위원회, 국세청 등 사정기관 출신 인사들로 채워지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에도 이러한 경향은 뚜렷하게 나타났다.
기업들도 나름의 이유는 있다. 각종 규제 법안으로 인해 사법 리스크가 더 커진 만큼 이에 대응하기 위한 전문가 영입이 우선이라는 것이 공통된 목소리다.
그러나 ESG를 비롯해 위험관리, 테크놀로지 등이 경영에서 빠르게 부각되고 있는 현실을 고려할 때 해당 부문의 역량을 갖춘 이사들을 선임하는 것 역시 향후 이사회 혁신의 주요 과제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