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계 큰 별 이건희 회장 타계
반도체 신화…IT코리아 초석
‘글로벌 경영’을 일상 경영언어로
반도체 육성은 사업보국 사례
무사안일 경계 끊임없이 독려
시대 변곡점마다 날카로운 시선
먹거리 발굴 리더십 업계 귀감
재계의 큰 별이 졌다. 변방의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을 세계의 중심에 올려 놓은 이건희 회장이 별세했다. 이 회장은 혁신과 도전의 아이콘이자 승부사였다. 시대를 앞선 경영 화두를 던진 혁신가였다. 삼성은 한국의 삼성에서 세계의 삼성으로 도약했다. 반도체와 모바일 신화를 쓰며 정보기술(IT) 강국의 초석을 놓았고, 생소했던 글로벌 경영을 일상의 경영언어로 바꿔놓았다.
그는 취임 일성 당시 약속을 끝까지 지킨 기업가로 꼽힌다. 취임사에서 “미래 지향적이고 도전적인 경영을 통해 삼성을 세계적인 초일류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고 약속했다. 이런 삼성의 대도약 신화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이 회장은 비범한 기업가였다. 시대의 화두를 제시하고, 상상력을 자극하는 혁신가였다. 무사안일을 경계했고, 조직에 끊임 없이 긴장을 불어넣었다. 초일류를 향한 부단한 전진은 오늘의 삼성을 만들었다. ▶관련기사 2·3·4·5·6·8·9·10·26·27면
1993년의 신경영 선언은 흔히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지금도 회자된다. 하지만 그 과정은 지난했다. 1993년 6월부터 8월 초까지 프랑크푸르트에서 도쿄에 이르는 대장정이었다. 사장단, 국내외 임원, 주재원 등 연인원 1800여명이 이 회장과 함께 했다. 임직원들과 나눈 대화시간은 350시간에 달했다. A4 용지 8500장에 해당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시대의 변곡점마다 그의 시선은 더욱 날카로워졌다. 냉철한 분석에 무모할 정도의 과감성이 더해지자 힘은 배가됐다. 세계 시장 1위를 석권한 반도체와 휴대폰은 이 회장의 역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수의 역할을 애써 부정하는 이들에게 이 회장은 새 먹거리를 발굴하는 리더십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그의 반도체 사업 육성은 사업보국(事業報國)의 대표적 사례로 회자된다. 이 회장이 파산 직전의 한국반도체를 인수한다고 했을 때 당시 비서진 모두 강하게 반대를 외쳤다. 일본의 한 기업 연구소는 ‘삼성이 반도체를 할 수 없는 다섯 가지 이유’라는 보고서를 내놓으며 조롱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회장은 무모할 정도로 과감했다. 그는 “언제까지 그들의 기술 속국이어야 하겠느냐”며 “기술 식민지에서 벗어나는 일, 삼성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휴대폰의 미래를 내다본 시점의 혜안 또한 탁월했다. 그는 “반드시 1명당 1대의 무선 단말기를 가지는 시대가 온다. 전화기를 중시해야 한다”고도 했다.
이 회장이 예견한 미래는 정확하게도 현실이 됐다. 극일(克日)을 달성한 반도체는 역으로 이제 일본이 신경질적인 수출 규제로 대응할 정도로 일본과의 격차를 벌렸다. 휴대폰은 오늘날 전 세계의 필수품으로 자리 잡아 사람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는 창업보다 어렵다는 수성을 뛰어 넘어 제2의 창업을 이뤄낸 기업가로 평가받는다. 내로라했던 글로벌 기업들도 이 회장이 이끄는 삼성의 기세에 끝내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쳐다볼 수도 없었던 인텔, 소니, 파나소닉, 노키아, 에릭슨, 모토로라 등이 줄줄이 삼성의 추격에 자리를 내줬다. 천하의 애플도 긴장한 나머지 삼성과 세기의 특허전을 벌였다. 그가 뿌린 또 다른 씨앗은 삼성의 새로운 미래로 성장하고 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속에서 삼성바이오로직스는 초격차 전략으로 세계 최대 규모인 36만4000리터의 의약품 생산설비를 갖춘 위탁생산(CMO) 기업으로 성장했다.
이 회장의 리더십의 기저에는 위기의식과 긴장감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부단히 위기를 강조했다.
2002년 4월 사장단 회의에서 “5년에서 10년 후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생각하면 등에서 식은 땀이 난다”고 했고, 2003년 신경영 10주년 자리에서는 “신경영을 안 했으면 삼성이 2류, 3류로 전락했거나 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오싹하다”고 강조했다. 2010년 3월 경영에 복귀한 자리에서는 “지금이 진짜 위기다. 글로벌 일류기업들이 무너지고 있다. 앞으로 10년 내에 삼성을 대표하는 사업과 제품은 대부분 사라질 것이다”고 경고했다.
이 회장은 마지막 신년사에서도 혁신과 도전의 고삐를 놓지 않았다. 그는 2014년 신년사에서 “남보다 높은 곳에서 더 멀리 보고 새로운 기술, 새로운 시장을 만들어 내자”라며 “자유롭게 상상하고 마음껏 도전하기 바란다. 우리의 더 높은 목표와 이상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자”고 말했다.
그가 마지막까지도 강조했던 초일류와 혁신의 DNA는 고차적인 경쟁이 벌어지는 현재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한계를 극복해 가는 기업가 정신이 3, 4대로 접어드는 기업가들과 청년들에게 적잖은 울림을 남기고 있다. 정순식 기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