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인 첫 오스트리아 ‘학술 예술 1급 십자훈장’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개인이 집을 짓더라도 모든 건축물은 공공성 띄어야”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의 뒤로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 현판이 보인다. 1992년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자택 ‘수졸당(守拙堂)’을 설계한 비용으로 받았다. 충청도 폐가에서 발견된 이 현판을 받은 후, 승 위원장은 건축사무소 이름을 이로재로 바꾸었다. 이상섭 기자/babtong@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의 뒤로 그의 건축사무소 ‘이로재(履露齋)’ 현판이 보인다. 1992년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의 자택 ‘수졸당(守拙堂)’을 설계한 비용으로 받았다. 충청도 폐가에서 발견된 이 현판을 받은 후, 승 위원장은 건축사무소 이름을 이로재로 바꾸었다. 이상섭 기자/babtong@

그곳에서는 아무도 그를, 한국을 몰랐다. 한국에도 건축을 하는 이가 있느냐며 구경하듯 몰리곤 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장이 지난 9월 30일 오스트리아의 ‘학술 예술 1급 십자훈장(Cross of Honour for Science and Art, First Class)’을 받았다. 아시아인 최초의 수상이다. 그리고 빈 공과대학으로 유학을 떠난 지 39년 만이다.

자랑을 좀 해달라고 요청하자 승 위원장은 웃음을 터뜨렸다. “정말 대단한 겁니다” 오스트리아에서 살아보고, 공부도 하고, 결혼도 한 그는 유럽을 다스린 합스부르크 왕가가 있던 그 곳의 문화적 자부심이 담긴 훈장이라고 설명했다. 훈장 수여식에는 한복을 입고 참석했다.

▶초라했던 한국 청년, 오스트리아의 훈장을 받기까지=그는 도망치듯 유학을 떠났다. 많은 젊은이들이 민주화에 목마른 때였다. 시위 앞자리에 서곤 했던 71학번 승효상을 선배들은 ‘위험하다’고 자꾸 바깥으로 밀어냈다. 그렇게 시위행렬서 벗어나 들어간 곳이 스승 김수근 건축가의 사무실이었다. 그 밑에서 마산 성당을 지었다. 성당에서 만난 요제프 플라처 주임신부는 그에게 빈 공대 유학을 권했다. 유학 중 머물 수도원도 알아봐줬다.

빈 서부역의 나자로 수도원은 나이든 수도사들이 모인 곳이었다. 승 위원장은 “검은 옷을 입은 수도사들이 아무 말없이 식사하던 그 곳에서 외롭고 힘들었다”면서 “그래서 지금도 그 때 식사로 나오던 소시지를 먹지 못한다”고 말했다.

수도원에 들어간 지 4개월 후, 그는 김수근 건축가 사무실에서 만난 아내와 빈에서 결혼을 했다. 수도원에서 나와 결혼식을 하며 둘 만의 신혼생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곧 아이가 생기고 그는 학업 대신 구직 활동에 나섰다. 승 위원장은 “취직을 하려고 설계 사무소에 편지를 보내자 모두 면접보러 오라고 연락이 왔어요. 가보니, 한국에서도 건축을 하다니 신기해서 오라는 거였어요. 그저 궁금해서…”라고 말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 건축을 하는 이가 있다니’란 호기심이 충만했던 때를 보낸 그는, 그래서일까. 2017년 서울시 총괄건축가 임기를 끝내고 빈 공대 객원교수로 강단에 섰을 때를 이야기하며 그 날의 기분이 떠오르는 듯 손바닥을 가슴에 댔다. “정말 뭉클했다. 37년 만에 아무도 모르는 한국에서 온 학생이었던 내가 다시 선생이 돼 이 곳에 서다니…”

▶잘 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종교처럼 설계를 한다= 세계적인 건축가이지만, 본래 신학을 공부하려 했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월남한 목사였다. 늘 종교안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오히려 왜 종교를 가져야하는 지 공부를 하고 싶었다. 아버지는 장남의 신학 공부를 반대했다.

건축은 누님의 권유로 전공했다. 승 위원장은 “누나라고 건축을 잘 알았겠느냐만은, 이제와 보면 건축은 신학과 닮아있다”면서 “나 아닌 남을 위해 집을 설계하고, 집은 한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그래서 건축을 ‘귀한 행위’라고 정의했다.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에 대한 존경과 애정없이 설계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다. 승 위원장은 “(설계를 하며) 항상 두렵고, 주저주저하고, 잘 살기를 바라고, 그런 것들이 신학과 정말 잘 맞는다”면서 “성직자가 된 심정으로 건축하는 게 맞는거라고 본다”고 밝혔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추구하는 그의 건축관 ‘빈자의 미학’은 이렇듯 종교적 집안에서 자란 영향이 컸다. 그래서 서울이란 도시의 공공성에 대해서도 목소리를 높이곤 한다.

승 위원장은 “개인이 집을 짓더라도 이웃이나 그 공간을 나누는 모두가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모든 건축물은 공공성을 띄어야 한다”고 말했다. 세월이 지나 문화재도 되고 기념비적 건축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은 모두의 자산이라는 인식없이는 나오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그는 “인류의 자산이 될 수 있는 건축은 공공재적 성격을 띄어야 하는데 한국은 이런 부분이 너무 부족하다”면서 “하다못해 비가 올 때 지나가는 이가 비를 피할 수 있는 공간이 없는 것, 도시와 건축의 공공성 결여가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광화문 광장을 대립이 아닌, 시민의 영역으로= 수년 간 그의 이름 뒤에 따라붙는 광화문 광장 재조성 사업에 대해 물었다. 승 위원장은 “실은 광화문 광장 뒤 경복궁, 그 뒤의 북악산에서 이어지는 축이 중요하다. 서울을 만든 축이다”면서 “그동안 이 구조는 늘 대립의 축처럼 인식돼왔는데 광화문부터 북악산까지 연결되는 시민의 축으로 바꾸고 싶은 게 나의 생각”이라고 밝혔다.

광장이 불만의 목소리를 낼 때 시민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일상의 공간이 되었으면 좋겠다고도 설명했다.

그가 서울이 배웠으면 하는 도시로 꼽는 곳은 독일의 ‘베를린’이다. 도시를 걷다보면 권력과 경제, 이념, 종교 등 도시를 이룬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승 위원장은 “정치와 경제의 결말은 건축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다”면서 “베를린은 전쟁으로 깡그리 파괴된 후에도, 성찰하는 공간을 많이 두었다”고 말했다. 도시를 걷다보면 홀로코스트 기념물 등의 흔적을 만나며 생각하는 도시로의 기능을 한다는 것이다.

그는 내년 4월까지 국가건축정책위원장을 맡는다. 승 위원장은 위원회의 역할에 대해 “건축을 부동산으로 규정하는 것부터 바꾸고 싶었다”고 했다. 그는 “프랑스의 건축법은 1조 1항이 ‘건축은 문화다’인 반면, 우리는 ‘땅에 건물을 짓는 행위’로 규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건축을 단순히 국토교통부에 속한 부동산이 아닌 사회 문화로 확대하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경남고 동기로 막역한 그는, 애초에 위원장직은 계속 거절했다. 앞서 서울시 총괄건축가를 지내며 공공의 자리에 대한 무게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사무실 ‘이로재(履露齋)’에 좀 더 몰두하고 싶었다. 선후배가 찾아와 거듭 권해 마지못해 승낙했다.

승 위원장은 “건축은 발주·설계·건설의 3단계가 있는데 한국은 발주단계에서 설계비를 싸게 써낸 이에게 설계권을 주는 가격입찰제에 따라 하고 있다”면서 “건축의 가치를 모르는 이들이 설계에 나서다보니 우리나라 국가건축정책을 심의하는 위원회가 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는 “랜드마크는 중요하지 않다”면서 “일상에서 항상 만나는 건축들이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늘 만나는 작은 건축들이 잘돼야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동숭동 언덕에 위치한 ‘이슬을 밟는 집’이란 뜻의 그의 사무실은 주택이 밀집한 골목에 자연스레 녹아있다. 언덕의 지형을 그대로 살려 경사가 급한 계단을 따라 미로같은 통로를 내려오면 그가 일하는 공간이 보인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가 유 교수의 자택을 설계해준 감사의 표시로 선물한 이로재 현판이 책상 뒤로 놓여있다.

이로재는 중국 고서에 나오는 글귀로, 효심이 깊은 선비가 아버지가 감기에 걸리실까 처소까지 외투를 걸치고 아침 일찍 와서 기다리다 따뜻해진 외투를 건네드린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승 위원장은 “따뜻한 마음을 가진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을 의미한다”면서 “건축은 삶이 담겨있고 그 삶을 유추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귀한 것이라는 모티브를 만들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성연진·양대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