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관에게는 국민의 신뢰와 존경 말고는 힘이 될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법관에게 칼이 있다면, 머리 위 천장에 가느다란 한 가닥 말총에 매달려 있는 ‘다모클레스의 칼’이 있을 뿐입니다. 만일 그 가닥에 조그만 상처라도 생기면 칼은 언제든 법관 머리 위로 떨어질 것입니다.”
2011년 2월, 서울 서초동 대법원 청사에는 36년 간의 법관 생활을 마감하고 퇴임하는 한 대법관의 목소리가 울렸다. 퇴임사에서 ‘다모클레스의 칼’을 언급하며 판사들의 ‘신독’을 당부한 이 대법관은 6개월 뒤 이명박 대통령에 의해 대법원장에 지명된다. 청와대와 ‘재판 거래 의혹’으로 최근 논란이 불거진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다.
25일 대법원 특별조사단이 공개한 보고서를 보면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의 이름이 200회 이상 언급된다. 사람을 시켜 특정 판사의 성향을 문제삼아 뒷조사를 시키고, 법원 구조 개혁을 촉구하는 행사를 축소시키도록 영향력을 행사했다. 청와대와 긴밀히 연락하며 각종 민원을 받아오는 일도 맡았다.
2015년 양 대법원장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한 원년으로 선포했다. 일선 재판부에 복귀한 지 얼마 안된 임종헌, 이민걸 부장판사를 다시 법원행정처로 불러들여 차장과 기획조정실장에 임명했다. 법원 내에서 국회 인맥이 가장 두터운 이들이었다.
법조계에서는 ‘상고법원 도입에 대한 대법원장의 강력한 의지가 드러난 인사’라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법원 행정의 초점은 상고법원 홍보에 맞춰졌다. 재판을 해야 할 판사들이 홍보 현수막이 달린 자전거를 타고 뛰쳐나가 밖을 돌아다니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했다.
법원행정처는 원래 일선 판사들의 재판 업무를 돕기 위한 조직이다. 제도 연구를 통해 효율적인 재판 모델을 제시하는 게 주 업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대법원장의 의견이 반영된 지침을 ‘하달’하는 조직이 됐다.
법원에서 가장 유능하고 성실한 인재들이 재판이 아닌 행정업무를 한 보상은 인사로 이뤄진다. 이들 중 상당수가 고등법원 부장판사로 승진하고, 그 중에서 대법관이 됐다.
특히 법원행정처 차장은 대법관 1순위로 꼽힌다. 국회를 오가기 때문에 정무적 감각이 뛰어나고,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로 대법원장의 의중을 잘 파악한다. 국회에 끈이 많기 때문에 인사청문회를 통과하기도 수월하다. 양 대법원장 본인은 물론, 그가 지명한 김용덕, 고영한, 권순일 대법관도 행정처 차장을 지냈다. 3권 분립을 위협하는 ‘정무적 감각을 갖춘 대법관’은 이렇게 생긴다.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만, 법원은 선거를 거치지 않고 국가 권력의 한 축을 담당한다. 일종의 특권이다. 하지만 이것은 ‘여론에 눈치보지 않는 법원’을 만들기 위한 장치이지, 판사 개개인이나 법원 조직을 위한 게 아니다. 하지만 이렇게 독립시켜 준 법원의 인사권은 대법원장이 내부 장악력을 높이는 데 활용됐다.
임종헌 전 차장은 이번 의혹에 관한 조사 과정에서 양 대법원장의 지시가 있었느냐는 추궁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답으로 일관했다고 한다. ‘삼부요인’ 중 한 명인 대법원장이 ‘특정 행사를 취소하라’거나 ‘어느 판사의 뒤를 조사하라’고 시킬 정도로 한가한 자리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할 사람을 골라 권한을 쥐어주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이게 범죄행위냐 아니냐는 차후 문제다.
어찌됐건 법원행정처가 청와대와 교감하며 특정 사건 정황을 전달하고, 사회적으로 관심이 쏠렸던 사건들도 ‘청와대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뒷받침하기 위해 최대한 협조했던 사례’로 내세웠다. 양 대법원장이 ‘법관의 유일한 무기’로 꼽았던 국민의 신뢰와 존경은 산산조각 깨져 흩어졌다.
양 대법원장은 취임 이후 일선 판사들을 향해 ‘법관의 양심과 개인의 독특한 가치관을 혼동하지 말라’고 수차례 경고했다. 이른바 ‘튀는 판결’로 법원 신뢰가 떨어진다고 여긴 탓이다. 하지만 신뢰를 깨뜨린 건 일선 재판부가 아니라 국회와 청와대를 향해 로비를 벌인 자신이었다. 조사 결과 그대로 임 전 차장이 알아서 움직인 것이라 해도, 양 대법원장이 자신의 의중을 담아 그 자리에 앉혔다.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서야 청와대가 판사 옷을 강제로 벗기고 원하는 판결을 만들어냈다지만, 지금은 법원이 자발적으로 엎드렸다는 점에서 더 비참하다.
아마도 양 대법원장은 ‘다모클레스의 칼’이 일선 판사들 위에만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실제 청와대와 교감을 나눈 내용대로 대법관들이 영향을 받았는지는 대법관이 아닌 임 전 차장이 답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전원합의체 재판장이었던 양 전 대법원장만이 해명할 수 있다. 사법부 위에 대롱 대롱 달려 있던 칼은 이미 떨어지기 직전이다. 침묵은 선택지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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