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측 물가압력’에 선제적 금리 인상
‘반도체 경제효과’ 연구결과 연이어 발표
교역조건 개선에 소득 ‘쑥’…소비 늘어
부동산 등 자산 쏠림도…내수진작 제약
통화정책 부담 커져…한동안 관망할 듯
[헤럴드경제=김벼리 기자] 유례없는 반도체 ‘슈퍼 사이클’에 경제 성장세가 확장되고 국민들의 소득도 크게 늘고 있지만 한국은행의 우려는 커지고 있다. 반도체 수혜를 입은 IT 업계를 중심으로 늘어난 소득이 부동산 등 자산 형성에 유입되는 조짐이 나타나고 있어서다.
자산 증가가 소비로 이어지는 소위 ‘자산효과’가 미미한 한국 경제 구조에서 소득 증가분이 부동산 자산에 집중되면 앞으로 소비와 내수, 더 나아가 경제를 제약할 가능성이 높다. 그렇게 되면 경제 성장 경로나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도 한은의 예상 경로보다 낮아질 가능성이 있다.
지난달 한은 금융통화위원회가 수요측 물가 압력에 선제 대응해 기준금리 연속 인상을 단행했지만, 자칫 물가 대응의 긍정적 효과보다는 취약차주 부담이나 양극화 심화 등 부작용이 더 부각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금리 연속 올린 한은, 한달 새 ‘반도체 효과’ 연구 세편 발표
1일 금융권에 따르면 한국은행은 최근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교역조건 개선이 한국의 경제성장률과 물가를 중장기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는 연구 결과들을 연이어 발표하고 있다.
지난 7월 19일 이종웅 조사총괄팀 차장 등은 ‘이번 교역조건 개선은 왜 다른가: 반도체 경기 호조의 실물경제 파급영향‘ 보고서에서 최근 교역조건 개선은 그 폭과 지속 기간이 과거 개선기 수준을 웃돌 가능성이 높고, 양호한 교역조건 흐름이 상당 기간 이어지며 GDI(국내총소득)가 견조한 증가세를 이어갈 것으로 전망했다.
지난달 30일에는 정원석 물가동향팀 차장 등이 ‘수요주도 물가압력이 근원물가에 미치는 영향’ 보고서를 통해 최근 반도체 경기 호조로 교역조건이 크게 개선되면서 가계의 실질 구매력을 키우고, 근원물가가 높은 오름세를 이어갈 가능성이 있다는 분석 결과를 내놨다.
바로 다음날 정희완 전 조사총괄팀 과장 등이 작성한 ‘반도체 수혜 지역의 소비는 어떻게 될까’도 공개됐다. 이 보고서는 실증 분석을 통해 반도체 산업 호황이 이미 국내 소비에 유의미한 긍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밝혀냈다. 더 나아가 앞으로 성과급 지급 규모가 커지면서 소비 경로를 통한 파급이 더욱 확대될 것이라고도 전망했다.
약 한 달 새 ‘반도체가 경제성장률과 수요측 물가 상승 압박을 키운다’는 메시지를 세 번이나 낸 셈이다. 한은 금통위가 지난달 관례를 깨고 기준금리를 연속 인상한 가운데 선제 대응이 필요했다는 명분을 쌓고 있는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교역조건 개선에 소득 늘지만…자산 집중시 ‘내수 진작’ 효과 반감
다만 해당 보고서들이 제시한 장밋빛 청사진은 모두 ‘조건부’였다. 무엇보다 교역조건 개선의 수혜가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IT 부문, 그중에서도 고소득·고자산층에 집중된 특징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고소득·고자산층은 한계소비성향(늘어난 소득 중 소비에 쓰이는 비율)이나 자산효과가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내수 파급효과가 제한적이고, 경제 성장률과 양극화 등에 부정적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보고서에서는 반도체 종사자 비중이 높은 지역 중 서울에 가까운 이천의 경우 성과급의 상당 부분이 주택 관련 소비와 경기 남부지역 부동산 매매에 쓰인 것으로 추정됐다. 이재호 조사총괄팀 차장은 이에 대해 “늘어난 소득이 자산시장보다 소비와 실물 경제로 원활히 환류될 수 있는 여건을 조성해야 한다”고 제언했다.
한은이 반도체발(發) 소득 상승분이 부동산이나 주식 등 자산에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현재 한국에서는 소득 대비 주택자산의 비중이 클수록 소비를 줄이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산에 더욱 돈이 몰리면 경제 전반에 부작용이 커질 수 있다. 이동렬 한은 조사국장이 지난달 경제전망 설명회에서 “(소비가) 부동산으로 흘러간다면 소비 회복이 낮아질 수도 있을 것”이라며 “성장의 수혜가 어느 쪽으로 갈지는 예상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한은에 따르면 2000년 이후 한국에서는 소득 대비 주택자산가치 비율이 상승할수록 가계의 소비성향은 떨어졌다. 특히 하락 정도는 다른 나라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컸다. 한은은 그 원인으로 최근 10년간 ‘부유한 유동성제약 가계의’ 비중이 높아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쉽게 말해 자산은 많지만, 자산의 대부분이 주택 같은 실물 자산이라 당장 지출한 현금은 부족한 가계들이 많아져 자산 증대의 소비 진작 효과가 작아졌다는 분석이다.
주요 자산 중 하나인 주식도 마찬가지다. 한은에 따르면 지난해 코스피가 75% 넘게 오르며 가계의 주식 자본이득이 429조원에 달했지만 이중 소비로 이어진 비율은 1.3%에 그쳤다. 더 나아가 무주택 가계의 경우 주식을 통한 이득의 약 70%를 부동산에 투입한 것으로도 추정됐다.
종합하면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현재 경제 구조에서는 자산 증대가 소비 활성화로 이어지지 않고 있는 셈이다.
통화정책에도 주요 변수로 작용…“효과 점검” 일단 신중론
이런 점은 통화정책에도 주요 변수로 작용한다. 한은은 반도체 수출 호조에 따른 교역 조건 개선이 경제성장률을 끌어올리고 있고, 이에 따른 수요측 물가 상승 압력이 앞으로 본격적으로 나타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지난달 기준금리를 연속 인상한 것도 이런 경로에 기반한 결정이었다.
그런데 성과급이나 임금 인상이 소비 진작으로 이어지지 않으면 수요측 물가압력은 예상보다 낮아질 수 있다. 수요측 물가 상승 압력을 선제적으로 잡기 위해 금리를 높였는데, 우려했던 만큼 인플레이션 정도가 크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금리 인상에 따른 부작용만 두드러질 수 있다.
대표적인 것이 취약차주와 중소기업 등의 금리 부담이다. 한은은 대출금리가 0.5%포인트 오르면 자영업자 1인당 이자 부담이 112만원 늘어나는 것으로 추산했다. 취약차주 부담에도 금통위가 연속 인상을 단행한 명분은 ‘물가를 선제적으로 잡겠다’는 것이었는데, 정작 인플레이션이 예상보다 미미할 경우 적절한 정책이었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한은이 교역조건 개선으로 늘어난 소득을 자산이 아닌 실물로 유인하는 실효성 있는 정책을 지속해서 주문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앞으로 금통위의 고민은 점점 깊어질 전망이다. 신현송 총재는 지난달 통화정책방향 기자간담회에서 “이번에 (기준금리를)연속 인상했기 때문에 효과를 점검해야 한다”며 한동안 상황을 관망할 것임을 시사했다.
kimstar@heraldcorp.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