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악마는 1997년 8월께 출범했다. 당시 대학 3학년의 필자는 군 입대를 앞두고 프로축구 경기를 관람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PC통신 하이텔 축구동호회를 통해 프로축구팀 포항스틸러스 서포터로서 경기가 있는 날이면 언제든 경기장으로 달려갔다.
그러던 차에 프로팀 서포터들이 모두 연합해 한국 대표팀 서포터 활동을 해보자는 논의가 있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방향이 정해지자 모든 게 빠르게 진행됐다. 가칭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GHSC)이 만들어졌고, 온라인에서 갑론을박 끝에 공식 명칭이 ‘붉은악마’로 정해졌다. 오늘날 붉은악마의 시작이다. 이렇듯, 초창기 붉은악마는 국내 프로축구팀 서포터의 거대한 연합체로 출범했다. 각 프로팀 서포터들이 국가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프로팀 유니폼 대신 국가대표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붉은악마’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붉은악마의 첫 공식 활동은 1997년 8월 10일, 서울 잠실주경기장에서 열린 한국 대 브라질의 친선경기 단체 응원전이었다. 이날은 현장에 참석한 필자는 물론, 붉은악마에게도 역사적인 날이었다. 이 무렵부터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오 필승 코리아’ 등 지금은 ‘전설’이 되어버린 붉은악마의 응원구호가 하나둘 만들어졌다.
한 달여 후인 그해 9월 28일엔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월드컵 아시아예선 한일전이 열렸다. 필자를 포함한 50여명의 붉은악마 도쿄 원정응원단이 꾸려졌다. 붉은악마의 사상 첫 해외 원정응원이었다.
경기 당일, 단체버스를 타고 엄청난 부담을 안은 채 도쿄 시내를 지나 경기장으로 들어서자, 수만명의 일본 축구대표팀 서포터 ‘울트라니폰’의 함성이 들려왔다. 이에 맞서는 붉은악마는 비록 수십 명에 불과했지만, 일기당천의 자세로 우리 선수들에게 힘을 불어넣어야 했다. 1대0으로 전반전을 마치고, 악을 써가며 ‘대한민국’과 ‘아리랑’을 수백 번은 불렀던 것 같다. 그리고 마침내 서정원의 동점골과 이민성의 역전골. 필자에게 평생의 무용담이 된 이날의 ‘도쿄대첩’은 그야말로 선수들과 붉은악마가 땀과 눈물로 함께 이뤄낸 승리였다.
붉은악마는 프랑스월드컵 본선이 개막한 1998년 6월, 프랑스로 보낼 원정응원단도 구성했다. 필자 역시 붉은악마의 일원으로 프랑스행 비행기에 올라, 조별리그 네덜란드전(마르세유)과 벨기에전(파리) 응원에 참여했다. 경비를 아끼고자 태국 경유 항공티켓을 끊는 등 여정은 힘들고 고됐지만, 축구팬으로서 인생에 다시 없을 귀중한 경험을 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인연과 경험은 2002년 한일월드컵까지 이어져, 필자는 이탈리아전(16강·대전), 스페인전(8강전·광주), 독일전(4강·서울), 터키전(3·4위전·대구) 등 한국팀의 한일월드컵 토너먼트 전 경기 붉은악마 응원에도 힘을 보탰다.
이렇게 구구절절이 지난날의 무용담을 늫어놓는 건 이번 북중미월드컵 ‘대참사’를 목도하면서 ‘원조’ 붉은악마로서 침묵하는 것도 책임의 방기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일단 우리의 감독 육성 시스템에 오래된 질문이 있다.
해외에서는 조제 무리뉴, 안드레 빌라스 보아스, 율리안 나겔스만 등 선수 출신이 아니거나 선수로서 명성을 얻지 못했던 많은 이들이 명장이 된다. 한국에선 꿈도 꾸기 어려운 일이다. 이 문제를 방치한다면 앞으로도 참사는 반복되지 않을까 싶다.
김수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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