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천 개의 파이프가 만드는 웅장한 소리

온도 18~20℃·습도 40~70%로 ‘관리’

작동 오류도 생길 수 있어 세심함 필요

오르가니스트 박병준 연주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인류를 실은 우주선이 거대한 미지를 향할 때, 수천 개의 파이프가 경이로운 소리를 쏟아낸다. 끝을 알 수 없는 무한한 우주의 신비, 그것을 향한 인간의 두려움과 고통이 파이프 오르간을 통해 시공을 확장한다. 성스러운 종교음악을 노래하던 악기가 들려주는 ‘태고의 소리’. 아름다운 선율이 광활한 공간으로 인간을 끌어당기면, 커다란 파이프 속의 공기 소리가 작은 점에 불과한 인간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린다. 영화 ‘인터스텔라’가 담아낸 ‘우주의 음악’이다.

영화음악가 한스 짐머는 파이프 오르간이 주인공이 된 OST(오리지널 사운드 트랙)를 만들기 위해 2년을 몰두했다. 마침내 모든 음악이 완성됐을 때, 그와 ‘인터스텔라’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영국 런던의 템플 교회에서 해리슨 앤 해리슨 사의 4단 건반 오르간으로 OST를 녹음했다. 연주는 교회의 오르가니스트인 로저 세이어가 맡았다.

SF(Science Fiction) 영화에 인간이 만든 가장 복잡한 악기인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쓰인 것은 단연 이례적인 일이다. 한스 짐머는 “파이프 오르간은 때론 아주 낮고 힘차며 때론 부드럽고 섬세해 어린아이의 합창 같기도 하다”며 “우주의 경외와 웅장함을 극대화하기 위해 파이프 오르간을 주악기로 사용했다”고 했다. 영화에서 파이프 오르간의 깊고 풍부한 소리는 우주의 광대함이었고, 그 앞에 놓인 인간의 무수한 감정이었다.

거대하고 아름다운 수천개의 파이프. ‘인류 최초의 악기’인 피리를 다발로 묶어 도열한 원통형 쇳덩이가 울창한 숲을 이룬다. 명료한 하나의 선율부터 여러 소리를 혼합한 풍성한 화음까지…. 피아노나 바이올린, 플루트 같은 악기 하나로는 낼 수 없는 오묘한 소리가 합창하니 인류는 이 노래를 ‘신의 목소리’라고 했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과 이동식 연주대(콘솔) [롯데문화재단 제공]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과 이동식 연주대(콘솔) [롯데문화재단 제공]

파이프 오르간의 시작, 고대 그리스 귀족의 사치품

“동이족은 유별난 음주(飮酒) 가무(歌舞)의 겨레다.” (中 진나라 사서 위지 동이전 중)

일찍이 우리 조상들은 노래와 춤을 즐기는 민족이었다. 가무가 있는 자리엔 악기가 필수. 이들은 대나무를 칭칭 묶어 소리를 냈다. 구멍이 뚫린 나무통에 바람을 불면 오묘하고 신비로운 자연의 소리가 났다. 쉥이라고 불렸던 악기다. 전통악기 생황의 시작이자 동양 버전 ‘오르간’의 기원이라고 추정되는 악기가 바로 쉥이다.

실제 파이프 오르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 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765년 조선의 ‘을병연행록’에 실린 기록이다. 조선 실학자인 홍대용이 중국의 남천주교당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처음 본 뒤, 우리 악기인 생황을 떠올렸다는 것이다.

서양에서 최초의 파이프 오르간은 고대 그리스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65년 알렉산드리아의 과학자 크테시비오스가 수력으로 공기를 빨아들여 손으로 개폐하는 방법으로 소리를 내는 수력 오르간(Hydraulis)을 제작했다는 기록이 남았다. 물 오르간은 그 시대의 상류층이 사랑한 ‘사치품’ 중 하나였다. 물 오르간 연주자들은 고대판 콩쿠르에 참석하기도 했다. ‘신탁의 도시’ 델포이에선 연주자 안디파트로스가 이틀간 쉬지 않고 연주해 우승했다.

수압식 오르간은 이후 유럽에서 중세부터 바로크 시대에 이르기까지 종교문화의 발전과 함께 호황을 맞았다. 11세기엔 건축의 발전으로 거대한 교회들이 등장하며 웅장한 오르간이 등장했고, 17~18세기 바로크 시대로 접어들며 ‘오르간의 전성기’를 맞았다. 전문가들은 “오르간은 서양 중세에선 교회 악기였으나, 더 거슬러 오르면 귀족 연회와 검투사 경기에서 등장한 세속적 악기”라고 했다. 세속의 오르간 역시 ‘사치품’이었다.

현재의 전기식 오르간으로 진화한 것은 근현대의 일이다. 19세기엔 증기기관이 오르간에도 사용됐고, 20세기엔 전기 모터를 통해 바람을 파이프로 보낼 수 있게 됐다. 모터로 바람을 보내지 못하던 과거엔 사람이 직접 바람을 일으켰다. 인간의 기술과 예술성, 노동력의 총체가 파이프 오르간이라는 거대한 악기를 지탱한 셈이다.

부천아트센터 파이프오르간 [부천아트센터 제공]
부천아트센터 파이프오르간 [부천아트센터 제공]

‘호흡하지 않는 괴물’ vs ‘악기의 교황’

‘호흡하지 않는 괴물’(스트라빈스키) vs ‘악기의 교황’ (베를리오즈)

작곡가 스트라빈스키는 오르간을 두고 이런 악평을 내놓으며 오르간 작품은 거의 쓰지 않았다. 하지만 대다수의 위대한 음악가들은 오르간을 “풍부하고 다채로운 음색”을 지닌 ‘악기의 제왕’, ‘악기의 교황’이라고 했다. 단 하나의 악기로 수만 개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오르간은 “오케스트라의 소리를 모방한 악기”(신동일 오르가니스트)이기도 하다.

헤르만 슈뢰더 국제 오르간 콩쿠르 우승자인 오르가니스트 박준병은 “파이프 오르간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압도할 만큼 큰 소리를 내는 악기이면서도 부드러운 성향도 강하다”며 “독주 악기로도 훌륭하나 악기와 연주할 때도 잘 어우러지고 오케스트라에 맞서 음악을 주도할 수 있는 악기”라고 했다.

실제로 오르간은 두 얼굴을 가진 악기다. 건반으로 연주하긴 하지만 소리는 관악기의 속성을 가진다. 연주자가 트랜스포머형 피아노(연주대)에 앉아 건반을 누르면 크고 작은 관 안으로 공기가 들어가 소리가 나는 원리 때문이다. 피아노가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현을 때려 소리를 내는 ‘현악기’이면서 ‘타악기’인 것처럼 파이프 오르간은 타악기이면서 관악기다.

오르가니스트 박준호는 “오르간은 관에 바람을 집어넣어 소리가 나는 악기”라며 “연주대(콘솔), 송풍기관(바람상자), 파이프 등 3개 요소를 갖춰야 오르간이라고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천아트센터 파이프오르간 [부천아트센터 제공]
부천아트센터 파이프오르간 [부천아트센터 제공]

파이프 오르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복잡한 악기다. 최소 1년 이상의 제작 기간이 걸리는 만큼 다양한 구조와 재료로 지어진다. 작동 원리는 단순하나 그 과정은 노고의 연속이다. 오르가니스트가 연주대에 앉아 건반을 누르면 파이프가 마개를 연다. 이를 통해 바람이 전달돼 소리가 나게 된다. ‘바람’이 모이는 곳은 바람상자로 불린다. 바람상자는 사람의 몸으로 치면 폐와 같은 역할이다. 바람상자엔 악기로는 어울리지 않은 ‘벽돌 더미들’이 빼곡하게 자리하고 있다. 오르간의 풍압을 조절하기 위해 마련된 장비다. 오르가니스트가 연주하는 동안 바람이 들고나는 일이 반복되는 만큼 벽돌이 일정한 무게로 눌러줘 바람의 세기, 풍압을 고르게 유지할 수 있도록 한다.

파이프 오르간이 ‘금속의 쇳덩이’로만 구성된 것은 아니다. 나무로 된 파이프도 있다. 금속 파이프는 금관악기처럼 날카롭고 큰 소리를 내는 반면, 나무 파이프는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를 낸다. 이처럼 파이프오르간은 파이프의 재료와 구성 등에 따라 다양한 소리를 만들 수 있다.

연주대엔 손으로 연주하는 4~6단의 건반과 발로 연주하는 발 건반을 동시에 갖추고 있다. 파이프 오르간의 연주대는 ‘하나의 컴퓨터’라고 부른다. 오르가니스트는 연주 때마다 손발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여기에 전자음악을 하듯이 중간중간 오르간 건반 쪽으로 툭 튀어나온 장치를 누른다. 오르간의 다채로운 음색을 결정하는 ‘스톱’이라는 장치다. 스톱은 바람을 불어넣을 파이프를 선택해 음색을 조절한다. 박준호는 “오르간은 굉장히 다양한 소리가 나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스톱 덕분”이라고 했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스톱 버튼 [롯데문화재단 제공]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스톱 버튼 [롯데문화재단 제공]

스톱은 여러 개의 악기와 같다. 모든 스톱에는 숫자와 악기의 종류가 적혀있다. 이 숫자는 음색을 수치화해서 표현한 일종의 ‘암호’다. 스톱에 적힌 숫자가 바로 파이프의 길이를 의미, 숫자가 클수록 파이프가 길어지니 음폭이 더 커진다. 스톱에 적힌 악기 이름은 해당 악기의 소리를 낸다는 의미다. 바이올린, 플루트, 비올라 등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들어있다. 파이프의 숫자, 스톱의 개수가 많을수록 파이프 오르간은 더 많은 소리를 낼 수 있다. 하나의 스톱은 하나의 소리를 내지만, 여러 개의 스톱을 조합하면 보다 다양한 소리를 낼 수 있다. 플루트 스톱과 현악 스톱이 만나면 ‘부드럽고 따뜻한 소리’가, 트럼펫 스톱과 플루트 스톱이 만나면 ‘화려하고 밝은 소리’가 난다. 이러한 이유로 오르가니스트는 마치 지휘자처럼 자신만의 소리를 조합해 음악을 만들어나간다. 오케스트라가 없이도 오케스트라의 음색을 만들 수 있는 ‘신묘한 악기’가 바로 파이프 오르간이다. 오르간을 풍성한 오케스트라의 선율을 내는 ‘악기의 제왕’으로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신동일 오르가니스트는 “소년 시절 오케스트라 레퍼토리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오르간에서 오케스트라 소리가 나는 것을 듣고 오르가니스트의 꿈을 꾸게 됐다”고 말했다.

오르가니스트는 다른 악기 연주자에 비해 유달리 분주하다. 오르가니스트들이 솔로 공연을 위해 리허설을 준비하는 시간은 최소 5~8시간. 각각의 곡에 따라 철저한 ‘음악 계획’을 세우고, 최적의 음악적 표현을 위해 스톱을 조합한다. 연주를 할 때는 시시각각 스톱을 누르고 발로는 낮은 음을, 두 손으로는 여러 단의 건반을 오간다. 양손, 양발을 모두 사용하는 것은 물론 현대곡에선 팔꿈치 연주까지 해내야 하기에 철인3종 선수 같은 근력을 갖춰야 하고, 여러 악기(스톱)를 조합해 음악을 만들어야 하는 ‘두뇌 풀가동’이 요구하는 지적, 창의적 음악 활동을 요구한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롯데문화재단 제공]

‘크고 까다로운’ 오르간, 연주 중 오류는 ‘빈번’

지난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열린 라트비아 출신 오르가니스트 이베타 압칼나의 첫 내한 공연. 오르간이 갑자기 멈췄다. 카랑카랑하고 웅장한 소리로 4분짜리 야나체크의 ‘글라골리트 미사’ 후주곡까지 1부의 모든 순서를 지나온 뒤였다. 덕분에 20분의 인터미션 동안 공연장은 다소 분주했다. 오르간 빌더가 막간을 이용해 악기를 살피는 시간이 길어졌다. 중간 휴식시간이 지나도 공연은 시작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오후 8시 48분, 결국 주최 측은 2부 공연을 취소했다.

롯데콘서트홀 관계자는 “공연 종료 후 이동식 오르간(콘솔)의 건반 센서 변형으로 인해 오작동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설치 9년차인 롯데콘서트홀의 파이프 오르간이 공연 중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다. 이베타 압칼나까지 고작 두 번이다.

전통적인 파이프 오르간이 공기와 밸브로 작동한 기계식이었던 반면 현대의 오르간은 디지털 신호 처리와 전산 시스템이 더해졌다. 키보드와 스톱 조작, 발 건발의 동작 하나 하나를 디지털 신호로 바꿔 소프트웨어를 거쳐야 파이프로 연결된다. 달라진 시대의 연주자는 연주 전 수십~수백 개의 스톱 조합을 미리 저장한다. 이동형 연주대(콘솔)에 내장된 컴퓨터가 이를 모두 관리한다. 최근엔 USB 저장 장치를 활용하는 경우도 있다. 롯데콘서트홀의 파이프오르간 역시 이동 연주대에서 본체로 전기 신호를 보내는 첨단 시스템을 갖춘 악기다. 하지만 ‘첨단의 기술’이 적용될수록 프로그램 오류는 왕왕 생긴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오르가니스트들은 연주 중이나 리허설 과정에서 오르간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세계 어떤 공연장에서나 빈번히 일어나는 일이라고 말한다. 이날 연주를 한 이베타 압칼나 역시 “언제 어디서든 있을 수 있고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이런 에피소드로 책 한권도 쓸 수 있다”며 “메모리를 저장한 것이 다 날아가기도 하고 아무래도 기계다 보니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오르가니스트 박준병 역시 “워낙 크고 까다로운 악기이자 기계적으로 작동하는 악기이다 보니 프로그램 오류 등 연주 중간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가 굉장히 잦다”며 “그래서 작은 파이프 오르간으로 연주할 땐 직접 수리를 한 뒤 다시 연주를 이어갈 때도 있다”고 말했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내부 [롯데문화재단 제공]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 내부 [롯데문화재단 제공]

아날로그이면서, 클래식 악기 중 유일한 전기 장치이다 보니 이 안엔 전자, 목공, 금속, 전기공학, 음향공학 등의 분야가 얽혀있다. 당연히 관리와 점검, 수리 과정도 까다롭다. 파이프오르간은 특히나 온도와 습도에 민감하다. 롯데콘서트홀 파이프 오르간을 책임지는 안자헌 마이스터는 “온도는 18∼20℃, 습도는 40% 이상~75% 미만이 가장 이상적”이라며 “습도가 높으면 나무가 뒤틀리고 떨어지면 쪼그라든다”고 귀띔했다.

연주대는 피아노와 닮았지만 조율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안 마이스터는 “파이프 오르간은 5000개의 파이프를 연습 때마다 조율하진 않는다”며 “음정 변화에 둔감한 음색도 있고, 민감한 음색도 있다. 변화에 따라 그때그때 관리하고, 연주 때는 조명이나 관객에 따른 온도 상승에 맞춰 준비하고 있다”고 했다.

안 마이스터의 경우 한 달에 한 번씩 롯데콘서트홀의 파이프오르간을 점검한다. 그는 이때 ▷연주대의 각 기능 ▷바람 공급대의 바람 압력 ▷건반과 스톱(음색 조정 장치) 액션 ▷각 음색의 조율 상태 등을 살핀다.

그는 “가장 오래된 파이프오르간은 600년이 넘었다. 보통 수명이 200년 정도인데,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따라서 사용 기간도 달라진다. 400년이 넘은 오르간도 많다”며 “점검을 할 때는 각각의 기능이 문제없이 동작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shee@heraldcorp.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