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인물편 : 사라 베르나르]
위대한 女배우, 무명 예술가와 마주
안목 적중…‘영원의 여인’으로 기록
예술가 또한 드디어 재능 꽃 피웠다
편집자 주
후암동 미술관은 무한한 디지털 공간에 걸맞은 방대한 내용과 자료의 초장편 미술 스토리텔링 연재물 원조 맛집입니다. 기사는 여러 참고 문헌 기반에 일부 상상력을 더한 스토리텔링 방식으로 쓰였습니다.
■기자 구독■을 누르시면 매 주말 풍성한 미술 이야기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좋아요’와 댓글은 콘텐츠 제작에 큰 힘이 됩니다.
‘위대한’ 여배우의 요청
“이거 그린 사람…. 내가 만나볼 수 있어?”
1894년, 12월 30일. 프랑스 파리. 배우 사라 베르나르가 비서에게 물었다. 깡마른 그녀의 목소리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단어 하나하나에 힘을 주는 버릇 덕일까. 그녀의 모든 말이 귀에 꽂혔다. 베르나르는 극장 대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대로 비스듬히 누운 채 연극 <지스몽다>의 새로운 포스터를 가리키고 있었다. 정확히는 그것에 대한 초안이었다. 종이 두 장을 위아래로 이어 붙인, 분장한 연극 주인공(베르나르 본인)의 전신이 실물 크기로 그려진 모습이었다.
그런데, 이 포스터는 보통의 연극 포스터와는 다른 면이 꽤 있었다.
일단 가로가 아닌 세로로 2m 이상 길쭉하게 내려오는 형태부터 그랬다. 공연을 칭찬하는 소개글도 없고, 작품 속 결정적 장면도 억지로 욱여넣지 않았다. 심지어 행사 이름과 장소, 배우 이름까지 교묘하게 숨어있었다. 그러니까, 아라비아풍 양식에 파묻힌 이 그림은 좀처럼 홍보물로 보이질 않았다. 베르나르보다 그림을 먼저 본 직원들은 이 때문에 이미 기겁을 한 상태였다.
무명예술가 청년의 도전
아, 올 게 왔구나.
베르나르의 비서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사라. 당신 성깔이라면 작업자 멱살이라도 잡고 싶겠지요. 그래도…. 그것만은 참아요. 우리도 엄청나게 당황했어요. 곧 포스터 수정에 대한 대책 회의를 열 계획이에요.” 비서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덧붙였다. “…내가 저 사람을 변호하는 건 아니지만, 저것도 시간에 쫓기면서 겨우 만든 거긴 할 거예요.”
비서 말도 일리는 있었다.
베르나르가 <지스몽다> 포스터를 다시 찍어야 한다고 방방 뛴 건 불과 며칠 전 일이었으니.
당장은 베르나르가 연출하고 주연까지 맡은 <지스몽다>는 또 한 번 흥행에 성공한 상황이긴 했다.
신이 난 그녀가 곧장 공연 기간 연장을 밀어붙인 일 또한 이해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따로 있었다. 이 갑작스러운 결정을 대중에게 어떻게 알리느냐는 것이었다. “새 포스터를 그리고, 그걸 뿌려서 알려주면 되잖아!” 여기에 대한 그녀의 당시 해답이었다.
아니, 누가 지금 바로 포스터를 그릴 수 있는가.
어떤 사람이 달콤한 성탄절 연휴를 건너뛰고 일감을 받겠는가. 심지어 단 며칠 만에, 그 까다로운 베르나르를 만족시킬 작품을 만드는 게 가능하기나 한가. 베르나르가 거느린 직원 모두가 받아칠 말이 한가득이었다. 하지만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이미 다들 알고 있었다. 그녀의 고집을 꺾는 게 불가능하다는 걸.
그때부터 비상이었다.
그해 12월 26일. 이날도 식은땀만 잔뜩 뺀 베르나르의 비서는 한 인쇄소 문을 두드렸다. 반응이 없었다. 역시 어딘가로 크리스마스 휴가나 갔겠지. 또 한 번 돌아서는 순간…. 문이 열렸다!
“무슨 일이시죠?”
한 청년이 꾸벅 고개를 숙였다. 베르나르의 비서는 그 말에 울컥해버렸다. 일면식도 없는 청년에게 지금까지의 일을 일러바치듯 토로했다. 그런 뒤 한 가닥 희망을 쥔 채 물었다. “자네는 너무 젊어보이니 경험이 부족할 것 같군. 혹시 소개해 줄 사람이 있는가?”
“선생님.”
사정을 잠자코 듣고 있던 청년이 그제야 입을 열었다. “제가 해볼게요.”
비서가 그 풋내기 청년에게 일을 맡긴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비서가 아닌, 베르나르가 직접 인쇄소에 전화를 걸어 일을 맡겼다는 이야기도 있긴 하다).
그리고 며칠 후 받아본 시안이 지금 이 모양 이 꼴이었다. 듣지도 보지도 못한 포스터 형식이었다. 베르나르가 또 한 번 난리를 치겠군. 비서 등 직원 모두가 베르나르의 눈치만 보며 침을 삼키고 있는 이유였다.
여배우와 예술가의 만남
“…사라. 알겠지요? 그러니까…. 마음은 알겠지만, 성질은 좀 죽여주세요.”
“무슨 소리야? 잔말 말고 그 인쇄소 사람을 데려오라니까?” 망했다. 비서는 혼잣말을 하며 돌아섰다. 곧장 문제의 청년을 불렀다. “저 방안에 사라가 있어. 이제 자네가 알아서 하게.” “제 면전에서 화를 내려는 걸까요?” “모르지.” 청년은 긴장한 채 문을 열었다.
“누구?”
나른한 표정의 베르나르가 그에게 물었다. “제가 그 포스터를 그린….” “오, 선생님이시군요! 이렇게나 젊으실 줄은 몰랐어요.” 베르나르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선명한 쇄골뼈가 도드라지게 보일 만큼 허리를 세웠다. 성질도, 역정도 없었다. 외려 ‘도도한 사라’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한껏 예를 갖춘 모습이었다. 예상 밖 반응이었다. “선생님.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베르나르는 청년을 대뜸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말했다. “선생님은 저에게 불멸의 이미지를 선물했어요.” 이런 말도 했다. 그랬다. 베르나르는 ‘문제의 포스터’를 저 혼자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하고 있었다.
“내년 1월1일이 이틀 뒤니까 날짜도 딱 좋군요.”
베르나르는 들떠보였다. “이 포스터를 새해 첫날에 맞춰 파리 시내에 뿌릴 거예요.” 베르나르는 잠깐 잊고 있었다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선생님은 혹시 이름이?” “무하. 알폰스 무하입니다.” 청년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눈앞 상황에 여전히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무하 씨. 여태껏 어디 숨어 있었어요? 우리, 앞으로는 계속 함께 해요. 알겠죠?” 그녀는 그렇게 무명 청년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베르나르는 무하가 만든 생소한 포스터에서 대체 뭘 엿봤을까. 그리고, 그녀의 안목은 끝내 적중했을까.
이것은 언뜻 봐선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의 기묘한 우정 이야기다.
야성, 그리고 감각의 여인
베르나르는 당시 프랑스의 국민 배우로 불리고 있는 거물 연예인이었다.
사실, 베르나르는 여리여리한 체격의 한 성격하는 여인이었다. 풍만한 몸, 우아한 몸짓 등 당시 프랑스의 미인상과는 거리가 있었다. 외모 또한 그렇게까지 탁월하다고도 볼 수 없었다.
그런 그녀의 무기는 굶주린 암사자와 같은 야성이었다.
사냥터에 나선 암늑대와 같은 타고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 성향은 그냥 생기지 않았다.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사라의 격정사 : 살아남았다
베르나르는 지금껏 쉽지 않은 삶을 살았다. ‘살아남았다’는 표현마저 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베르나르는 매춘부 어머니 밑에서 사생아로 컸다. 태어난 해는 1844년, 눈뜬 곳은 파리 라틴 지구였다. 그녀는 날 때부터 잘 먹지도, 잘 입지도 못했다. 자랄수록 약해졌고, 철이 들수록 예민해졌다. 베르나르는 어릴 적부터 여러 하숙집을 거쳤다. 어머니가 곁에 없을 때가 많았기에, 주로 혼자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며 일상을 견디곤 했다. 열 살 무렵부터는 수도원 학교에서 사실상 숙식을 해결했다. 진지하게 수녀로의 삶도 생각했다. 그러나 규칙 위반과 일탈 행위로 인해 주변의 미움만 살 뿐이었다.
통통 튀는, 나쁘게 말하면 통제가 불가능한 소녀 베르나르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준 이가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이복동생이자 당시로는 어머니의 새로운 연인이었던 남자, 샤를 뒤크 드 모르니였다. 예술에 조예 깊은 그는 격정적인 성격의 베르나르에게 연기를 권했다. 1862년, 그의 영향력 덕에 그녀는 명문 극단 코미디 프랑세즈에 입단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베르나르는 그곳에서도 오래 있지 못했다.
그녀에게는 무대 공포증이 있었다. 그녀는 극작가 장 라신의 비극 <이피제니>로 데뷔했지만, 잔뜩 긴장해 참담한 연기만 보였다. “나도, 너 자신도 언젠가 그 연기를 용서할 수 있지만…. 하늘에 있는 라신은 절대 용서할 수 없을 거다.” 당시 총감독에게 이런 말까지 들을 지경이었다.
불같은 성격도 문제라면 문제였다.
“네 어머니 말이야. 오늘은 어떤 남자랑 있어?” 베르나르가 몰상식한 극장 문지기의 이런 모욕을 듣자마자 머리통에 우산을 꽂아버렸다는 건 익히 알려진 사례다. 그런가 하면, 베르나르는 코미디 프랑세즈의 주력 배우 나탈리 부인에게 뺨을 때린 적도 있었다. 당시 나탈리 부인은 베르나르의 여동생이 자기 치마 끝을 밟았다며 온갖 성질을 다 부리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분을 못 이겨 여동생을 거칠게 밀치자 언니로서 참다못해 보인 행동이었다. 이유야 어떻든, 열아홉 신인 배우가 중년의 주연급 배우 따귀를 갈긴 건 엄청난 일이었다. 베르나르는 쫓기듯 극단에서 나와야 했다.
베르나르는 이후 벨기에의 한 귀족 남성과 사귀었다.
다음 해에는 아들도 낳았다. 다만 결혼식은 올리지 못했다. 남자 쪽 집안의 결사반대가 이유였다고 한다. 베르나르는 이제 미혼모였다. 그녀를 위해서도, 아이를 위해서도 무엇이든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베르나르와 오래 알고 지낸 지인들은 훗날, 이쯤을 그녀의 각성 시기로 꼽곤 한다. 베르나르는 파리로 돌아왔다. 절박함을 안고 연기를 다시 시작했다. 등 떠밀려 나간 코메디 프랑세즈 대신, 세아트르 데 로데오에서 재차 무대에 올랐다.
베르나르는 작은 역할부터 맡으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았다.
성깔이야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욱하는 마음을 꾹 눌렀다. 끓어오르는 야성은 무대에서만 폭발시켰다. 어느덧 분노하는 연기, 절규하는 연기, 슬프게 죽어가는 연기 등 격정적 장면의 천재가 돼 있었다. 베르나르는 드디어 연극 <행인>의 주연을 꿰찼다. 무대 공포증까지 이겨낸 그녀는 신들린 모습을 보였다. 곧바로 인기 스타 대열에 설 수 있었다.
베르나르는 당시 약점으로 꼽힌 마른 몸도 강점으로 바꿨다.
그녀는 보통은 남자가 맡는 역할까지 자처해 받아들였다. 가령 그녀는 극작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햄릿>에서 ‘여성’ 햄릿으로 나서 색다른 감성을 전달했다. 스스로를 대체 불가능한 연기자로 만든 모습이었다. 베르나르는 그사이 코메디 프랑세즈로 화려하게 귀환했다. 곧이어 영국, 유럽을 넘어 미국, 캐나다 등 순회공연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관에서 낮잠을 자는 모습, 토끼털 코트만 걸친 채 시내를 누볐다는 일화, 원숭이와 카멜레온 등 신기한 반려동물을 기른다는 소문 등 그녀와 관련한 모든 게 화제였다. 보불전쟁 당시 연기를 잠시 접고 간호사로 나섰다는 이야기가 돌자 성녀 이미지까지 덧씌워졌다.
‘신성한 사라’, ‘여왕 베르나르’.
문화의 아이콘이 된 베르나르에게 붙은 별명이었다. 베르나르의 영광은 끝없이 이어졌다. 1890년대. 베르나르는 어느덧 쉰 살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러나 타고난 예민함과 피나는 관리 덕에 여전히 최고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시 삼십 대 초반의 무명 화가였던 무하는, 그런 베르나르에게 갑작스럽게 간택을 당한 것이었다.
무하의 역전사 : 끝내, 꽃피웠다
여왕의 직감은 이번에도 적중했다.
1895년, 1월1일. 파리 시내가 발칵 뒤집혔다. 광고탑 곳곳에 붙은 무하의 <지스몽다> 포스터 때문이었다.
거리의 모두가 이를 보고 있었다.
꿈꾸는 듯 멍한 표정의 사람들은 미술관에 걸린 작품을 마주한 듯한 모습이었다. 무하의 이 그림은 남아나질 못했다. 많은 이가 홀린 듯 포스터를 떼어내 챙겼다. 안방에 걸고, 작업실에 붙이고, 심지어 암시장에 내다 팔았다. 포스터는 곧장 4000부가 다시 찍혀야 했다. 말 그대로 신드롬급 인기였다.
베르나르는 이번 포스터를 하나의 예술품, 즉 그 자체를 목적으로 보고 흥행을 점친 것이었다.
그녀의 직원들이 그저 홍보물이자 일차원적 수단으로 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물론, 포스터가 흥한 만큼 연장된 연극 또한 당연히 매번 만석이었다.
무하 또한 이 일로 인해 하룻밤새 파리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 중 한 명으로 올라섰다.
여신처럼 아름다운 여인의 중앙 배치, 식물의 곡선과 반복되는 패턴을 활용한 장식 등 특유의 그림 스타일 또한 주목받았다. <지스몽다> 포스터는 곧 ‘새로운 예술’이라는 뜻을 가진 아르누보 사조의 출발점이자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사라와 무하 : 서로 귀인이 되다
베르나르도 무하 덕에 큰 후광을 누렸지만, 무하에게도 이번 건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 치하의 체코 지방 출신인 무하는 타고난 재능을 갖고도 여러 굴곡을 겪었다. 그에게는 미술학교 시험 낙방과 직장 해고의 경험이 있었다. 귀족의 후원을 받아 마침내 파리로 왔지만, 이 또한 갑자기 끊기는 바람에 인쇄소 아르바이트 등으로 생계를 꾸려야 했다. 좀처럼 운이 따라붙질 않는 케이스였다. 그럼에도 그림만은 놓지 않고 성실히 그렸는데, 보상을 이제야 받는 기분이었다.
베르나르와 무하는 이제 언제, 어디서든 함께 있었다.
그녀의 미국 투어 때도 같이 있었으니 이 정도면 애착 수준이었다. 1896년 <로렌자치오>와 <카말리아(동백 아가씨)>, 1898년 <메데이아>, 1899년 <햄릿> 등 베르나르는 무하의 손끝에서 몇 번이고 다시 불멸의 여인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까탈스러운 베르나르도 무하만은 전적으로 믿었다.
그녀는 무하에게 그림뿐 아닌 무대 의상과 보석, 장식에 대한 조언도 구했다. 성격 급한 베르나르가 조곤조곤 이어지는 무하의 제안만은 경청했다. 무하가 연기할 때 쓰라고 만든 장신구를 평소에도 걸치며 자랑하곤 했다. 무하 또한 베르나르의 부탁에는 특별히 더 열과 성을 다했다.
“무하 씨. 이걸 받아주세요.”
어느 날, 베르나르는 그런 무하에게 낡은 나무 가구를 안겼다. 이어지는 강행군에 눈을 비비고 있던 무하는 엉겁결에 이를 받아들였다. 그것은 보기보다 묵직했다. “이게 무엇이죠?” 베르나르는 무하의 물음에 싱긋 웃었다. “옆면을 밑으로 내려보세요.” 그러자 검고 흰 피아노 건반이 모습을 보였다. 그러고 보니, 윗면 한편에는 어딘가 익숙한 이름이 쓰여있었다.
‘MOZART’….
베르나르는 무하에게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휴대용 피아노를 선물한 것이었다. 이는 그녀가 여행용 화장대로 쓰곤 했던 애장품이기도 했다. 둘은 이런 대단한(!) 물건을 주고받을 만큼 각별했다.
둘의 계약 기간은 6년이었다.
두 사람 모두 헤어지는 순간 어떤 마음이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베르나르는 계속해 무대를 향해 나아가고, 무하는 상업 화가가 아닌 순수 화가로도 인정받기 위해 서로를 놓은 것으로 전해진다.
사라의 열정 : 전설이 되다
무하가 베르나르를 영원의 여인으로 만들어줬다면, 베르나르의 열정은 그녀 자신을 그 이상 존재로 끌어올렸다.
늘 그랬듯 열연을 펼친 베르나르는 실수로 무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악 소리가 날 만큼의 큰 무릎 부상이었다. 남미 투어 중 벌어진 일이었다. 베르나르는 이번 사고 뒤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가 찾은 곳은 병원이 아닌 또 다른 공연장이었다. 의사는 어서 수술을 해야 한다고 거듭 말했지만, 그녀는 늘 “공연이 먼저”라며 이를 미룰 뿐이었다.
그러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녀는 수술은커녕 독일군을 피해 도망 다녀야 할 처지에 놓였다. 결국 1914년, 그녀는 괴사한 한쪽 다리를 엉덩이 바로 밑까지 절단해야 했다. 당시 그녀는 일흔 살이었다.
평범한 노인이었다면 이번 일을 삶의 의지를 놓는 계기로 삼았으리라.
하지만, 역시나 베르나르는 평범하지 않았다. 그때도, 지금도 그녀의 고집을 꺾을 이는 아무도 없었다. 베르나르는 그 몸을 이끌고 또 공연을 했다. 한 쪽 다리가 없는 만큼 주로 기대거나 앉은 채 대사를 읊었다. 비루했던 그녀의 삶을 구원한 연기에 보답하듯 매 순간 최선을 다해 울고, 웃고, 죽이고, 죽었다.
1922년, 베르나르는 리허설 중 쓰러졌다.
한 시간 뒤 정신이 든 그녀가 처음으로 꺼낸 말이 “(연기를)어디까지 했었어?”였다고 한다. 그런 그녀는 1923년, 또 한 번 의식을 잃었다. 이번에는 일어나지 못했다. 나이는 일흔아홉 살, 사인은 요독증이었다.
파리에서 이뤄진 베르나르의 장례식에는 100만명가량의 사람이 모였다.
그녀의 관이 가는 곳마다 꽃잎이 흩날렸다. 온 유럽, 바다 건너 미국의 각계도 그녀의 죽음을 애도했다. “세상에는 다섯 종류의 여배우가 있다. 형편없는 배우, 꽤 괜찮은 배우, 연기를 잘하는 배우, 대단한 배우, 그리고… 사라 베르나르.” 미국의 대문호 마크 트웨인은 그녀에 대해 이렇게 칭송했다.
무하의 끈기 : 그 또한, 전설이 되다
한편, 베르나르와 떨어진 무하도 그만의 길을 개척했다.
무하는 1000년 넘는 그의 슬라브족 역사를 주제로 한 그림 그리기에 생을 바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십수년을 매달린 결과 대규모 역사화인 ‘슬라브 서사시’를 내놓을 수 있었다. 이 덕에 민족주의적 정서를 품은 순수 미술 화가로도 명성을 쌓을 수 있었다.
그는 1939년, 나치 독일의 게슈타포(비밀경찰)에게 당한 고문 후유증으로 숨지기 전까지 민족의 정신적 지주로 역할도 했다.
숨진 당시 나이는 일흔아홉 살이었다. 무하의 장례식 또한 나치 독일이 직접 통제해야 할 만큼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렸다. 베르나르와 무하는 함께 있을 때도 위대했고, 따로 있을 때도 위대했다. 둘은 여러 면에서 달랐지만, 결국에는 혼자서도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에서는 똑같았다. 그렇기에 서로가 상대에게 더 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참고 자료>
나의 이중생활, 사라 베르나르의 회고록, 사라 베르나르, 마르코폴로
알폰스 무하, 새로운 스타일의 탄생, 장우진, 알에이치코리아
알폰스 무하, 유혹하는 예술가, 로잘린드 오르미스턴, 씨네21북스
기자의 말풍선
독자님들. 신화편, <트로이 전쟁> 대기획은 2주일에 한 번씩 발행될 예정입니다. 다음주에 2편을 들고 인사드리겠습니다. 많이 기대해주셔서 감사합니다!